어둠을 지나 존재를 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반드시 치유와 소통이 아니라도, 예술 작업은 그 자체로 그러한 요소가 있다. 삶 속에서 맞땩뜨리는 수많은 현실적 장벽 속에서 적어도 사각 캔버스 안에서만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곧 작업 내에서도 그러한 장벽들은 닥쳐오지만, 어찌 됐든 그것은 작가 하기 나름이다. 권혁상의 [어둠을 지나 존재를 보다] 전은 그에게 닥친 어둠을 헤쳐 나간 흔적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구상적 이미지가 없기에 어떤 서사가 있는지 읽기는 힘들다. 전시 작품의 내용은 ‘2019년부터 나는 추상표현주의적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밝히는 형식적 맥락에서 찾아진다. 그는 재현적 요소 없이 드리핑과 스크래치 등으로 화면을 채운다. 뿌리고 긁고 하는 식의 행위에는 카타르시스적인 요소가 있다. 쏟아내기와 걷어내기는 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사전 스케치 없이 시작하는 그의 작업은 그때그때의 상황을 봐가며 진행하는 몰입의 과정이다. 최초의 계획에 충실하기 보다는 화면과의 대화를 통해 진행하며, 완성의 시점 또한 작업 중 대화의 결과다. 



권혁상 무제4 2026 Acrylic 50호 L 91.0 P 116.8


무작정 시작되는 여정 때문에 화면은 물감층으로 두껍게 덮이기 마련이고, 조율을 위해 다음 단계의 작업이 필요하다. 권혁상의 작업에서 스크래치는 덮여있던 것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작가는 ‘물감을 흘려보내는 행위가 감정의 분출이었다면, 표면을 긁어내는 행위는 안쪽을 드러내는 일에 가깝다. 나는 화면을 덧입히기보다, 그 안에 쌓인 결을 드러내고 싶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고 드리핑과 스크래치 작업을 비교한다. 스크래치는 내용상 ‘격렬함보다는 조율에 가깝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 역시 충돌이 아니라 조응으로 다가온다. 유기체의 과정과 비교하자면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서도 나타나듯, 상처는 감싸기 보다는 개방해야 더 쉽게 아무는 경우가 있다. 또한 나의 바닥, 즉 취약한 부분을 드러냄으로서 타자들과 동병상련같은 공감을 꾀한다. 드리핑은 자신 깊숙이에 있는 응어리를 분출하는 과정이다. 그의 작품에서 분출은 한번이 아니라 거듭해서 이루어지며, 전후를 가늠하기 어려운 흔적들로 남는다. 


물감으로 하는 행위는 마치 눈물처럼 비워내야 할 감정의 응어리들을 흘려보낸다. 그래서 승화를 통해 감정을 억압하는 문명의 방식은 터트리기 과정을 뒤로 미룰 뿐이다. 발산해야할 감정의 총량은 있기에 임시방편은 성공할 수 없다.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식은 시간이다. 권혁상의 덧칠하고 긁어내는 방식에는 시간성이 필수다. 추상미술이 모더니즘 논리의 정점에 있을 때 시간성은 지양되었다. 시간은 서사적 요소이며 이는 미술에서 문학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모더니즘 논리의 핵심에 있었다. 추상은 재현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뒤로하고 한눈에 포착되는 무엇, 즉 미술의 정체성인 시각성에 호소하고자 했다. 그 미학적 논리의 결론은 얇은 평면성으로의 환원이었는데, 이는 미술사에서 금방 마르는 공업용 도료부터 캔버스 같은 바탕 면에 물감이 염색처럼 스미는 방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된 바 있다. 권혁상의 [어둠을 지나 존재를 보다]는 전시 부제부터 시간의 추이가 드러난다. 



권혁상 무제16 2026 Acrylic 8호 L 44.5 P 37.9



권혁상 무제17 2026 Acrylic 8호 L 44.5 P 37.9


이번 전시의 작품을 이끌었던 동기에서 시간성은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데 필수다. 한편 고통의 증가 방식 또한 시간적이기에 치유를 단언할 수는 없다. 큰 고통은 보다 작은 고통을 덮는다. 큰 고통이 사라지면 그 아래 순위가 순차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삶의 고통은 결코 해결되지 않고 어딘가 도사리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다. 긁어내기는 이러한 떠오름의 과정에 촉매 역할을 한다. 화면 층이 여러 색의 물감으로 두텁기에 어떤 층이 어떻게 드러날지 작가도 명확히 예측하기 힘들다. 작품이란 자신이 시작하고 진행하지만, 스스로 다시 발견해야 하는 과정이다. 이번 전시에 걸린 33점을 출품하기 위해 전시 일정이 결정된 이후 석달 동안 무려 50여점을 제작한 것은 작업과 작가의 관계를 암시한다. [어둠을 지나 존재를 보다]라는 부제는 작업을 통해 어둠을 통과해 온 투쟁의 과정이다. 모체라는 아늑한 환경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온 이래, 유기체는 수많은 적대적 요소와 상호반응한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탄생이라는 조건 자체에서 트라우마를 본다. 


[어둠을 지나 존재를 보다] 전은 분출이 아닌 관조의 과정이며, ‘이 전시는 그 과정을 기록한 하나의 흔적이다...’라고 밝힌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는 [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서 ‘고통스럽게 하는 외상은 밖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러한 공격이 남긴 심적 흔적이다. 충격의 자연성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자아의 표면에 찍힌 자국이다...그 자국, 즉 감정을 지나치게 떠맡고 있는 까닭에 고립된, 그래서 자아에게 괴로운 바로 그 영상이다’라고 지적한다. 영상이라는 비유는 실제보다는 환상의 요소가 개입됨을 말한다. 모년모일을 결정할 수 없는 운명과도 트라우마의 기제 중 어떤 것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날짜와 시간이 박히는 사건이 있다. 권혁상에게 그 사건은 2021년 9월에 아버지를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잃은 일이다. 책임소재를 밝히기 위해 그가 홀로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사고 수습 과정은 또 하나의 큰 상처로 남아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유기체가 생명이라는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경계가 파열되는 것이다. 



권혁상 무제5 2026 Acrylic 50호 L 116.8 P 91.0



권혁상 무제9 2026 Acrylic 30호 L 90.9 P 72.7



권혁상 무제11 2026 Acrylic 30호 L 90.9 P 72.7


그의 작품에서 흘러내리는 물감, 직시하고 싶지 않아 덮어버린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것에 대한 형태와 색감은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과정이다. 최소한 그가 작업을 통해서 ‘어둠을 지나 존재를’ 보게 되었다면 적어도 작가의 단계에서는 성공일 것이다. 존재는 철학에서 과정이나 실존 등과 대조되는, 보다 단단한 주체성의 개념을 포함한다. ‘보다’라는 키워드 또한 시각 특유의 거리두기를 떠올린다. 주체와 대상 사이를 주파하는 거리는 양자가 뒤섞이는 과정보다는 객관적이다. 작가가 10여 년 전에 그리던 식의 구상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 몰입의 과정은 필수다. 그가 추상표현주의적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한 때는 2019년이다. 그는 이 시기의 작업에 대해 ‘당시의 화면은 드리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물감이 흘러내리고 튀며 겹쳐지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싶었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응축되어 있던 불안정과 긴장감, 현실을 살아내며 쌓여 온 상처들이 화면 위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고 회상한다.


‘검정과 무채색이 주를 이루던 화면은 나의 내면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어둠을 피하지 않고 통과하려 했다. 2020년을 지나면서 화면은 이전보다 밝아졌고, 색은 점차 따뜻해졌다. 검정을 바탕으로 한 강한 대비, 난색 위주의 밝은 색채는 어둠을 지나온 이후에야 마주할 수 있는 밝음에 대한 나의 감각’이다. 화면 중앙에 밝은 띠 하나는 어둠을 뒤편으로 밀어내고 있다. 무엇인가 재현을 한 것은 아니지만 화면 하단보다 적은 밀도감을 가지는 부분은 허공이며 빛과 어둠의 드라마는 이 장에서 벌어진다. 화사한 색상이 주를 이루는 화면에 검은 띠는 긁혀지고 있다. 어둠을 이겨내려는 싸움이다. 한 공간에 나란히 걸리는 작품은 일종의 쌍을 이루며 관객은 두 작품에서 시간의 추이를 감지할 수 있다. 밝음과 어둠이 차지하는 비율은 작가가 그렇게 그린만큼 관객에게도 다르게 보인다. 겹겹의 물감층에서 빛을 머금은 색은 가장 위층에 자리한다. 비정형 형상들 가운데 빛이 들어오는 창같은 요소는 작가의 의도를 환하게 드러낸다. 화사한 봄빛이 추운 겨울의 어둠을 뒤로 한 채 화면 가득히 펼쳐져 있다.


출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