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자 여럿인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미향의 [생명의 춤-빛이 되다] 전의 작품들은 조각, 판화, 회화 등 여러 방식이 교차되고 최종 작품은 자수 작품까지도 연상되는 독특한 기법이 구사된다. 종이로 캐스팅한 후 얇은 한지를 돌돌 말은 일정 굵기의 선으로 작업한 작품들은 자연을 재현하지 않으면서 자연적 과정에 다가가려 한다. 자연의 움직임으로부터 영감받는 추상적 형태는 잔잔하지만 큰 울림을 낳는다. 그의 작품은 서정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메아리까지 포괄한다. 이 전시는 생명에 대한 관심에 더하여 얼마 전 한국에서 벌어졌던 빛의 혁명과도 조응한다. 중차대한 현실에 대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색색의 응원봉이 함께한 많은 이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곳곳에서 펼쳐진 발랄한 토론의 장은 국내외적으로 놀라움을 주었다. 새나 물고기에서 관찰되는 군무는 집단지성을 통해 군중의 움직임과 비교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있듯이 무차별적인 군중이나 대중이 아닌 하나이자 다수인 다중(多衆)이다.

김미향 dance 2101 한지 캐스팅 240x121cm 2021
그의 출발은 자연이지만 자연과 사회를 포괄하는 순리를 조명한다. 회화와 판화를 모두 전공한 김미향은 회화적 촉감과 판화적인 세밀한 공정이 공존한다. 그리듯이 섬세하게 만든 그의 작품은 자연에 풍부한 겹과 결로 그 실재감을 부여하며, 유려한 선적 흐름과 깊은 색감의 조합에는 선율과 화음의 조화가 있다. 개별 방법론에 얽매여 공예적 노동에 함몰되는 것은 상상만으로 ‘자유로운’ 예술을 하겠다는 희망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다. 마치 수놓아진 실처럼도 보이는 풍부한 촉각성으로 시각성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의 색과 형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여러 장의 한지로 페이퍼 캐스팅(Paper casting)을 이용해 올록볼록한 텍스처를 만들어 한지의 촉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한지 자체의 발색을 높이기 위해 채색 물감으로는 옻을 사용했다. 옻에 테라핀으로 농담을 조절해서 둥글게 찍는 점들이 바탕이 되어 그 위에 3~5번의 레이어가 생기게 점을 찍어 나간다.’
한지와 자연과의 연결은 개인적 체험에도 근거한다. 할아버지가 지은 한옥집에서 살았던 작가는 창호지 바른 문 뒤로 보이는 마당의 꽃밭과 더불어 자랐다. 종이는 그에게 단순히 이미지가 펼쳐지는 빈 배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재료이다. [생명의 춤-빛이 되다] 전은 정지된 매체에 움직임을 최대한 담는다. 생명, 춤, 빛, 되다 라는 키워드에 모두 움직임이 있다. 동식물은 물론 미생물부터 인간까지, 그리고 타자 중의 타자인 신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추상 어법이 가지는 보편성에 기댄다. 전시장에 걸린 크고 작은 작품들은 비슷한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지만, 마치 지문처럼 개별 작품의 특성이 새겨져 있다. 개별성은 전체를 활기 있게 하고 전체는 흩어짐을 막아준다.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 종이를 말아 이어 붙인 움직임의 표현은 회오리나 동심원 구조로 나타난다. 작품 [dance 2021](2021)에서 여러 중심을 가지고 회오리같은 흐름은 감정과 육체, 그리고 자연의 물리적 과정을 관통하는 보편적 운동이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공간에서 운동하는 원자를 춤과 비유하기도 한다. 작품 [dance 2101](2021)에서 중심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지는 형태는 중심을 향한 겹겹의 움직임에 가속도를 붙인다.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화면 아래의 점들 또한 중심의 밀도를 간직한다. 모선(母船)에서 분사된 보트들이나 바람결에 흩어지는 꽃의 포자 같은 관계다. 한지와 옻이라는 한국적 매체는 빈공간을 여백처럼 다가오게 한다. 그에게 여백은 형태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움직임의 자리이다. 움직임은 춤과 비유되었다. ‘수묵화에서 볼 수 있는 발묵 효과로 인해 점들의 정지 된 것이 아니라 발산하며 부유하는 자유로운 기운으로 느껴지는 춤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올 한 올이 살아있는 결은 마치 굵은 필획 속에 남아있는 궤적들로 다가온다. 작품 [dance](2023-2025)는 큰 작품을 일부가 단독으로 떨어져 나온 듯한 작은 원형 작품들이 전시장 한 벽면에 군집으로 설치됐다.
제각각의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한 소우주들은 성장이라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 그렇게 대우주와 소우주는 서로를 품는다. ‘한지를 얇게 잘라 염색 후 꼬아서 표현한 둥근 형태’가 만드는 동심원 구조의 작품군은 광물질적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명도의 크기를 극대화한 선들을 동심원 구조로 배치하여 마치 금속성의 판이 빠르게 돌아가는 듯이 보인다. 동심원 구조에 드리워진 선은 마치 예전의 LP 판이 플레이되는 모습처럼 ‘생명의 춤’을 위한 음악을 재생한다. 작품 [dance 3,4](2021)의 동심원 구조는 지구의 자전을 증거하는 천체사진(장노출로 찍은 빛의 궤적)이나 팽이같이 돌면서 수행하는 수피교도의 춤도 떠올린다. 김미향의 작품 속 운동은 그리드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일정 공간 속에 찍혀 번진 듯한 점에 내재된 움직임은 근처의 다른 움직임들을 방해하지 않음을 말한다. 작품 [dance 2105](2021)에서 밝은 바탕에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놓인 원들은 각자의 속도대로 돌고 있다.
움직임을 내재한 정지 형태다. 한날한시에 공장에서 출고된 생산물의 정밀한 동일성이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비교한 단자(monad)처럼 자연이 입력한 프로그램을 각자 수행하는 개체들의 공조를 말한다.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조화로운 세계에 비전을 공유하는 작품에는 단자적 사고가 있다. 돌돌 말은 종이는 하나의 단위가 되어 이합집산하여 세계를 만든다. 추상의 어법을 구사하는 작품은 재현이 아닌 생성이다. 서양철학에 대한 기념비적인 요약인 버트런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의하면,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라는 무한수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단자들에는 창이 없는데, 그럼에도 각 단자가 우주를 반영하는 까닭은 우주가 단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자연스럽게 결과에 이르는 본성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 단자에서 일어난 변화와 다른 단자에서 일어난 변화는 예정조화에 의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두 단자가 정확히 서로 같은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같은 시각에 울리는 까닭은 시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 아니라, 각 시계가 정확히 맞는 정밀한 기계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은 시계 전부를 외부에서 조종해 놓은 단 하나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단자가 동시에 비슷한 꿈을 꾼다고도 말한다. 그는 실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지만 모두 우주를 각자의 관점에서 반영함으로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한다’(러셀). 김미향은 ‘리듬이란 생명의 규칙적인 숨결이며 영혼의 파동’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삶은 보여지는 것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힘(invisible force)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낳고, 모든 것을 연결하고, 모든 것을 성장시키는 이 초월적 원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의 관점인 영원의 상하에서, 즉 영원성의 측면에서 보려는’(스피노자)는 경건한 자세이다.
누군가 사회 안에서 정의를 지지할 때 그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현실주의적 원리를 초월한다. 물론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초월적 태도는 종교를 비롯한 형이상학적인 관점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시세판 같은 현대에 형이상학은 비판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허위의식이나 환상같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작거나 큰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작업 또한 실천이다. 김미향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지난 빛의 혁명에 대한 아름다운 형상을 추가하게 되었다. [dance 1,2](2022)에서 동심원 구조에 적용된 명암법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여러 크기의 회전하는 동심원은 추상적인 원근법이 적용되어 작은 것은 멀리, 큰 것은 가까이 있는 효과를 주며, 하얀 여백을 무한한 우주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여백의 주름들은 무엇인가의 흔적인데, 그것은 공간에 흩뿌려져 운동하는 단자적 존재들의 궤적이 아닐까.
그의 작품에서 종이는 융기하고 채워지고 꼬이면서 단순히 중성적인 바탕에 머물지 않는다. 미술평론가 이재걸은 이번 전시의 평문 [흐름의 세계상(世界像)]에서 ‘1988년경부터 35년에 걸쳐 꾸준히 발전시켜 온’ 김미향의 작업 방식에 대해 ‘작가는 판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만, 판화의 복재성을 거부하고 단 한 장의 작품, 단 하나의 회화적 아우라(aura)를 획득한다’고 평가하면서, 이를 ‘판(版)-회화’라고 말한다. 김미향은 현재에도 회화와 판화 관련 단체 모두에 적을 두고 있다. 이재걸은 그 작업 공정에 대해 ‘나무로 제작된 이미지 원형 판을 제작하고, 이 음각과 양각의 조각적 볼륨 위로 겹겹이 쌓아 붙여 놓은 한지를 힘껏 찍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엠보싱 프린팅(embossing printing) 위에 옻칠을 입힌다. 옻칠의 오묘한 번짐으로 미점(米點)을 찍기도 하고, 자연의 색으로 물들인 한지를 꼬아 선(線)을 긋기도 한다.’
그러한 작업은 재료가 비록 종이여도 견고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가 주로 쓰는 옻도 자연스럽게 스미는 색과 더불어 보존성을 높인다. 여기에 더하여 한지 태우고 그을음으로 작업하기도 한다. 요즘 적지 않게 접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작가가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꽃의 형상이 보이는 작품들은 나무를 소재로 한 이전 작품의 연장이다. 작품 [grace 1,2](2019)에서 활짝 핀 꽃은 빛, 또는 비의 세례를 받는다. 지는 모습마저 우아한 꽃은 그것이 다음 해의 부활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작품 [dance 1007](2021)에서 접힌 주름이 펼쳐지는 과정은 꽃에서 전형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심집중적 구조는 배아나 씨앗 또는 꽃같은 형태를 떠올린다. 이름있거나 없는 세상의 수많은 꽃들처럼 각자 다른 리듬으로 각자의 세계를 접고 펼친다. 그리드 구조로 찍힌 점처럼 배치되어 각각의 세계가 가지는 자율성을 강조된다. 각 존재는 단수성(singularity)을 가진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카오스모제]는 질서/무질서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선 실천을 예시하면서 단수성(singularity)을 강조한다. [카오스모제]에 의하면 단수성은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사회적 실천을 둘러싸고 구성되는 고유한 가치를 중시한다. 그것을 특수성(particularity)처럼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위한 중간 다리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 [봄의 향연](2026)처럼 저마다의 꽃들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마음껏 피는 모습이 바로 축제이다. 꽃은 씨앗의 나중 모습이자 열매의 전단계이다. 각 단계는 일정한 부피 안에 주름이 접혀있고 이후에 펼쳐지며 다시 되접히는 과정을 품고 있다. 질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일자는 다양체를 포괄하고 다양체는 일자를 계열의 방식으로 전개하는 한에서의 통일성을 말한다. ‘일자는 포괄하고 전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는 반면, 여럿은 포괄되어 있을 때는 접힘과 그리고 전개될 때에는 펼침이다’
‘유기체 또한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로 간주된다...오늘날 구형 단백질이 근본적으로 주름 잡혀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생물학은 생명체를 그렇게 규정한다’ ‘펼침은 접힘의 반대나 소멸이 아니라 접힘 작용의 연속 또는 확장, 접힘이 현시되는 조건이다. 펼침은 주름들에서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다’(질 들뢰즈). 단자적 형태에 주름이 가득하며 운동성을 띄고 있는 김미향의 작품에 대한 의미는 질 들뢰즈의 [주름]에서 정리한 라이프니츠 철학의 원리에 따른다. ‘두 개의 극이 있다. 모든 원리가 한데 다시 접혀지는 하나의 극과 반대로 모든 원리가 각자의 구역을 구별하면서 모두 펼쳐지는 다른 하나의 극. 두 극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단 하나의 유일한 심연 밖에는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정도에 따라 구별된다. 모든 것은 방식의 양태에 따라 다르다. 어떠한 철학도 단 하나의 유일한 세계의 긍정, 그리고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의 긍정을 이토록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지 못했다...’(질 들뢰즈)
러셀은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는 학설을 창안한 사람으로 이를 신학적 낙관론이라고 평가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여러 가능 세계가 존재한다는 학설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무한수의 가능 세계가 존재하는데 신은 현실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모든 가능 세계에 대해 미리 응시하며 숙고한 다음 선한 존재인 신은 가능세계들 가운데 최선의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낙관론은 보수주의로도 기울 수 있지만, 최선의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비전을 강조함으로서 변화를 꾀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초록 이파리 한 장부터 둥글게 모여 헤엄치는 물고기 떼까지 만물에 깃든 생명의 춤을 예찬하는 김미향의 작품이 가지는 비전은 매우 긍정적이다. 거기에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 같은 사유가 있다. 브라운 톤의 작품 [fall is comming](2019)은 식물이 성장을 멈추고 결실을 맺을 준비를 한다.
두터운 보호막 속에서 웅크린 채 익어가는 열매는 그 안에 부활의 씨앗 또한 포함한다. 가느다란 선으로 만든 풍부한 표면의 주름은 생물이 씨앗이나 배아에서 접힘을 반복하여 추후의 펼침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력을 표현한다. 그의 기본적인 조형 언어는 추상이지만 작품 [an afternoon with a dog](2025)에서 나타나듯, 단자적 조형 요소와 주름의 조합은 개와 함께한 오후 같은 일상적 장면을 표현하는데도 큰 무리가 없다. 작품 [face](2017)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오목조목한 모양새는 조그만 면적에 수많은 근육의 층이 깔려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낳는 얼굴의 특징을 반영한다. 작품 [도시의 사람들1,2](2019)은 식물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둥 떠 있으며 서로 간에도 긴밀하다고는 볼 수 없는 도시인의 상황을 표현한다. [생명의 춤-빛이 되다]라는 부제를 보이는 장면에서 찾을 때 관객들은 작은 물고기 떼나 철새의 군무를 떠올릴 수도 있다.
작품 [새들의 춤](2020)은 운동성을 가지는 동심원을 기본으로 하면서, 미약하게나마 새에 대한 재현적 요소가 있는 작품이다. 철새도래지 등의 장소에서 새들의 집단 군무 등을 보면 그 누구라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각 형태에 일정한 간격을 둔 형식은 하나이자 다수인 존재에 대한 표현이다. [dance of life 4](2023)는 석양을 배경으로 집단 군무 중인 새들의 춤같은 모습이며, [dance of life 1,2,3](2023)에서 단자적 형상들은 돌기처럼 풍부한 질감으로 공간을 채우며, 나선으로 흐르는 선은 심해의 물고기 떼들의 집단 군무같은 모습이다. 살아남아 전수받은 유전자를 후대에 다시 전달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전략일 수 있는 자연의 움직임과 형태는 미적 거리감을 통해 자유로운 동작인 춤으로 승화된다. 작품 [bait ball](2020)은 작은 물고기들이 포식자에게 대처하기 위해 거대한 공같은 형태로 운동하는 모습에서 영감 받았다. 긴 선들의 촘촘한 배열이 아닌 짧은 선의 짧은 선들의 집합은 색조와 구성의 방식에 의해 흐름으로 나타난다. 구를 이루며 움직이는 물고기 더미들이 있는 출렁이는 물결은 다양한 곡률의 운동을 표현하는 장이 된다.
작품 [바다이야기1,2](2021)는 옻을 주로 사용하는 그의 작품에서 사용된 아크릴 물감 채색이 포함된 것으로, 생명이 시작되고 궁극적으로 다시 모여들 바다라는 모체를 표현한다. 특히 생명과 관련되어 바다는 에덴동산같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던 원초적 시공을 떠나 진화의 여정에 올랐던 육상생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다. 심해와 깊은 숲을 동시에 떠올리는 작품 [healing garden](2019)은 지나치게 노출되어 상처받는 존재가 치유하는 공간이다. 빛은 움직임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푸른 이파리 실루엣은 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작품 [memories of days gone by](2025)는 광합성으로 빛을 가공하여 모든 지상의 존재에게 삶의 조건을 형성한 존재가 바로 식물임을 말한다. 작품 [chaos](2018)에서 어둠과 빛의 관계처럼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이면이다. 어두운 바탕 속 빛의 궤적은 둘의 싸움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서 한 방향의 결을 거스르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의 조우는 양자 간의 극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그가 자연에서 관찰했던 집단지성을 사회에서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뻤을 것이다. 작품 [the revolution of light](2025)는 빛을 혁명과 연결시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사건이 벌어진 한국에서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다중의 힘을 본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김미향은 얼마 전 빛의 혁명에서 정의에 대해 생각했다. 응원봉 하나하나가 빛이 되어 춤추는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보았다. 작품 [festival of light](2026)에서 빛의 입자들 한가운데서 보이는 십자 형태는 하나 되는 힘의 축제를 표현한다. 사회적 차원의 움직임에는 연결고리가 필수다. 작품 [a meeting of destiny](2026)에서 개별적 존재들은 인연의 끈을 통해 연결되기도 한다. 작가는 새나 물고기처럼 쌩쌩 움직이는 것 뿐 아니라, 달팽이 같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생명의 귀함을 생각한다. ‘개체마다 에너지는 다른 것이다. 각각의 에너지로 추는 생명의 춤이라는 점은 같다’. 또한 마른 나뭇잎부터 물과 공기, 빛 가운데서 생명을 알아본다. 그에게 생명은 생존을 위해 중력에만 구속되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빛처럼 날아오를 수도 있는 존재다.
출전; 충북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