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없는 단편들
작은 것으로부터 전 (2025. 11. 19—2026. 2. 22, 경기도 미술관)
생생화화生生化化: 사라지는 감각들 전 (2025. 12. 6—2026. 2. 22,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이선영(미술평론)
경기 남단과 북단에 걸쳐 열린 두 전시는 서울이라는 중심 외곽에 넓게 분포한 지역과 관련된 키워드를 가진다. 전시 주최자와 공간 정체성과 관련(경기문화재단의 시각예술 지원 프로그램) 되며, ‘작은 것...’, ‘사라지는...’이라는 부제에 암시되듯, 가려져 있던 주변을 가시권에 놓는다. 지배적 중심 바깥은 예술의 정체성과 닿아있기에, 그 위치가 나쁘지 않다. 두 전시의 작품들은 큰 덩어리가 아닌 미세한 것을 다루지만, 단지 섬세한 것은 아니다. 그 의미와 가치가 인정된 거대한 것의 세부를 가다듬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것들을 그자체의 논리로 세우려 한다. 요컨대 전체 없는 단편들이다. 좌표를 확정해 주는 안정된 전체 없이 존재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로 엮인 채 작동한다.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가 아니라 단편들 간의 횡단적 관계다. 작품들 사이에, 참여 작가들 사이가 모두 그렇다.
어떤 것들은 거의 폐기물처럼 보이지만 예술이 아니라면 어떤 기능도 없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순수하게 다가온다. 가령 예술이 어떤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상을 아름답게 꾸며주거나 아름다움을 말해주거나 돈으로 호환되거나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시된 작품들 대부분은 아름답지 않고, 수수께끼같이 내용을 감추며 거의 돈으로 지불되기 힘든 상태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은 AI를 비롯해서 첨단 기술들이 하나 둘 인간으로부터 기능을 빼앗고 대체해도 남아있을 최후의 어떤 영역에 속한다. 명명되거나 분류되기 힘든 나머지들은 죽음에 가깝다. 합리적 삶의 동일성을 위협하고 해체하는 부조리한 타자들이다. 배제된 것을 주인공에 세울 수 있는 것은 동일성이 본래 타자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현대적 사고에 힘입는다.
변화가 일어나는 가장자리
김나영&그레고리 마스의 최신작 [사이코 빌딩No.5]은 철근, 페인트, 전광판 같은 여러 재료가 여러 형태와 색으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사이코’라는 키워드는 2024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의 전시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를 떠올린다. 보편적 이성이 아닌 자기만의 논리에 충실한 광기는 무질서로 간주되지만, 지배적 이성의 독주에 샛길과 균열을 내고 변화를 준비한다. 20년 넘게 듀오로 활동한 김나영 &그레고리 마스의 작품들은 깊은 의미로 이어질 균형과 조화 대신에, 작품마다 다소간 흥미로운 부분들이 포진해 있다. 하나의 코드를 갈고 다듬는 대신에 최초의 영감을 날것에 가깝게 포착한 전시장 전체가 작업실이나 벼룩시장처럼 어수선하다. 바닥과 벽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기댄 채 세워진 것들은 그것이 가리키는 일관된 이야기가 없다. [킴킴 갤러리; 트라우마 자랑]에 나타나듯, (고)박이소 등 동료 작가 43명을 끌어들여 프로젝트 성격의 열린 작품이다. 그들은 비영리 단체, 출판 편집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는 하나의 형식으로 환원됨으로서 지배적 논리에 귀착되지 않으려는 선택이다. 작가들의 흥미를 자아냈던 현실의 단편들이 예술이 아니라면 무어라고 할 수 없는 형식으로 배열되어 이 부조리한 무대 관객의 무의식을 자극한다. 미술사조와 굳이 비교하자면 다다(dada)같은 역설, 배리(背理), 허무, 유머 등이 느껴진다.

김나영 & 그레고리마스, [사이코 빌딩 no 5], 2025년(사진 출전은 경기도 미술관)

최수앙, 괴물원 연작 2025/ UFO 2025
극사실적 정밀함으로 인체를 재현하기도 했던 최수앙의 최근 작품은 조각예술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기준인 (인간적) 형태와 의미를 폭발적으로 해체한다. 전시장 바닥에 돌출한 관처럼 연출된 금속 받침대는 그 위에 솟은 2미터 높이의 수수께끼같은 존재들의 출발점이다. 더 이상 주어진 궤도를 순항할 수 없는 것들이 취약한 부분을 틈타 삐져 나온 산물은 누출이 아닌 분출의 모양새다. 천정에 매달린 [UFO]는 지상 괴물들의 짝패인 공중 괴물로 나타난다. [괴물원]은 동물도 식물도 아닌 미지의 것들로, 여전히 작동을 위한 복잡한 모양새를 갖춘다. 괴물원의 구성원들은 정확한 분류도 명명도 불가능한, 단지 집합된 상태다. 한 괴물이 여러 종을 혼합한 것이듯 그의 작품은 다양한 접착 물질로 이리저리 뻗은 형태의 균형을 잡는다. 유기체 내부 조직들까지 참조하는 최수앙의 작품은 임상의학적 시선에 의해 분석되고 재조합된 낯선 몸이다. 2005년에서 2020년까지 여러 작품 제작 과정에서 파생된 실험의 과정을 모은 [조각들]은 이번 전시가 과정에 방점이 찍힌 것을 알려준다. 수평적인 바닥에 느슨하게 배열한 것들은 색깔만 통일되어 있을 뿐 어떻게 조합될지 모를 이질적 요소들의 집합이다. 물론 잘 맞춰진 퍼즐 같은 작품도 있지만, 관객이 보는 형태나 의미가 열린 것은 마찬가지다.
탈북자들의 이상과 현실을 소재로 한 박혜수의 [지상낙원]은 타자화된 삶을 풍자한다. 경기도는 두 체제를 가르는 긴 접경지대를 포함한다. 오예슬 작가와 협업한 대형 그래피티 벽화의 흐릿한 외곽선과 부드러운 색감은 꿈속 풍경 같지만, 그 앞에 쏟아져 쌓인 지폐들(한국은행의 협조로 제공받은 분쇄화폐)은 누군가에게 닥친 가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우리의 일상 표현에 ‘갈아넣는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인간의 꿈과 열정을 갈아 넣어야만 하는 ‘지상낙원’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죽음에서 탈출했지만, 이 낙원 속 그들은 투명인간이 되었다. 작품 [나라 없는 사람 Ver. 25]에서 탈북민의 목소리나 관련 담화는 엿듣기 식으로나 듣게 된다. 남/북한은 서로를 향해 체제 선전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안쪽에서 반대편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한 사정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마찬가지다. 풍경 맞은 편에 작가가 돌린 탈북자 관련 설문지들에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선명하다. 감시초소와 부지런히 작동되는 자동화 기기는 지상낙원의 주요 소품이다. 탈북자는 동포가 아닌 이방인으로 살게 되며, 이는 세계화 국면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난한 이주자들의 공통 운명이다. 하지만 얼굴 없는 자본은 경계를 넘나들며 보다 많은 타자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있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의 작품들은 일상의 감각을 넘어서려는 도전이 삶의 타자인 죽음까지 닿아있다. 신재은, 김민혜, 임선이, 정수, 한수지, 유비호의 작품에서 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장례지도사의 경험이 있는 신재은은 금속으로 된 시신 거치대를 활용한 작품으로 섬뜩함을 자아낸다. 작품 [삼키는 몸]은 살아 있는 자의 진동이 있는 시체 거치대에 관객이 누워볼 수 있다. [무표정의 이빨]은 앉으면 신체에 각인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장내(腸內) 미생물 영상은 나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 그리고 그 역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고문부터 죽음에 이르는 사건의 중심에는 몸이 있다. 수평은 휴식이자 죽음이다. 김민혜는 육아 중에 주로 생활했다던 바닥에 주목했다. 삶의 짝패인 죽음은 극강의 모든 활동에 내재하며, 제목 속 ‘물이 모이는 곳’처럼 필연적이다. 수행하기 힘든 복잡한 게임을 떠올리는 사각형은 예술과 마찬가지의 전일 노동의 체험이 깃든 무대다.

임선이, 드리워진 표피와 비워진 신체의 기억, 2025, PLA 3D 프린트, 스테인리스 스틸, 반타블랙 등, 가변 설치(사진출전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한수지, 제논피부-개굴개굴, 2025,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13분 40초, 비디오 스틸
알루미늄 바탕 위에 점토·금속·목재 조각을 낮게 배열해 만들어진 표면은 평면으로도 입체로도 환원되지 않은 일종의 장(場)이다. 임선이의 [드리워진 표피와 지워진 신체의 기억]에는 무기력한 남성 조각상이 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으며 또 다른 조각상의 얼굴은 나무처럼 갈갈이 갈라진다. 심장은 바깥에 나와 있다. 지금도 서서히 녹슬고 있는 표피(조각의 피부)를 통해 드러나는 노쇠, 죽음을 각인한 몸은 묵직하다. 하지만 무겁고 불투명한 몸은 이제 기관별 수명을 가진다. 정수는 전시 공간 중 가장 빛이 잘 드는 장소에 놓인 진열대에 서서히 말라가는 사과를 관찰하게 한다. 썪거나 쭈글쭈글해지는 빨간 사과는 지금도 늙어가는 모두를 상기(memento mori) 시킨다. 생명의 과정을 보다 자세한 관찰을 위해 확대경도 장착된다. 또 다른 진열장은 위아래가 바뀐 형국이다. 유기체의 숙명인 병과 죽음이라는 변화를 관찰하려면 지상에 가까운 낮은 자세가 필요하다. 몸으로 대표되는 실재에 대한 감각은 기술의 발전에 의해 변화했다.
한수지는 인공피부로 가정된 두터운 PVC 비닐막으로 뫼비우스 띠같은 몸을 표현한다. 덩어리로부터 자유로워진 이 표면은 부분에서 전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생성막’이다. 무성생식의 메카니즘은 자연으로부터 자율화된 과학기술이 다루는 생명의 양상이다. 유비호 자연풍경은 ‘윈도’에 의해 현실감을 잃고 떠돌며 이리저리 비틀려 재구성된다. 기계 눈의 시점은 중력과 방향감각을 초월하고 인간은 점차 그 시점에 맞춰야 한다. 서정적인 풍경과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의 대조, 그리고 하늘로 대변될 수 있는 모든 초월적 시점의 변조는 기술이 인간 사회에 준 충격에 대한 반향이다. 몸은 사회와 비교된다. 사회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타자의 배제는 맹목과 망각으로 나타난다. 손광주, 장보윤, 이소요의 작품은 읽어야할 많은 자료들이 압축되어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비판적인 거리감을 요구한다. 손광주의 [거룩한 성_시안]은 지금은 시대의 유물이 된 각종 맹신적 구호들이 난무한다.
이념이 다른 체제여도 이데올로기로서의 양상은 유사하다. 상식의 관성은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타자가 배제되는 만큼 맹목의 강도는 커진다. 남한/북한, 민족국가/제국, 세속/성스러움의 관념적 이항 대립은 질곡의 현실을 유지한다. 장보윤의 작품에서 히로시마나 오키나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은 시간에 묻히고. 불가능에 가까운 소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사진, 텍스트, 영상 등으로 제시된다. 전시를 위해 제작한 긴 인터뷰지처럼 사실은 즉각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거듭된 해석이 요구된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소통은 현대 사회의 즉각성에 의해 억압되곤 한다. 이소요의 [돌 위에 나무 위에 숲]은 산의 생태계를 미시적 시선으로 탐사하여 기록한 사진과 자필 텍스트로 이루어진다. 작품 틀과 같은 크기의 상자 안에서 꺼내 펼쳤다가 다시 접어 넣을 수 있는 구조는 무수한 주름의 운동으로 가득한 생태계와 비슷하다. 걷기, 관찰하기, 읽기, 쓰기는 생성과 소멸을 주관하는 시간이라는 축을 같이 타고 흘러간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6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