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이어지는 유연한 구조
이선영(미술평론가)
손부남의 전시 ‘보이지 않는 끈–구조로의 전환’은 2020년 청주시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과 ‘연결’돼 있다. 구체적 형상은 사라지고 있지만, 암각화나 동굴벽화같이 형상이 있던 시기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어 작가가 전시 키워드로 던진 ‘구조로의 전환’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통 ‘구조’하면, 딱딱함이 연상된다. 그것은 비본질적인 것을 과감하게 잘라낸 환원적 국면을 말한다, 언어학부터 인류학, 정신분석학까지 20세기에 지배적 담론을 이루었던 구조주의가 후기(post) 국면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구조(원래는 해부학자와 문법가의 용어)는 특히 원인과 결과의 결정주의적 낡은 도식을 위장하는데 이 말들이 쓰일 수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빈센트 B. 라이치는 [해체 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보편 규칙이 아닌 우연성을, 심층이 아닌 표층을, 통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토대가 아닌 결함을, 정체성이 아닌 차이를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바르트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Mixed media on canvas, 213×270cm, 2020(모든 사진출전은 충북갤러리에 있음)
‘만일 텍스트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이 형태는 단일하거나 잘 짜여져 있거나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편이고 지워진 그물망이다’(바르트) 손부남의 구조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구조에 대한 대안처럼 유연하다. 그는 구조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이어지는 개방적인 구조를 향한다. 작가가 중시하는 이어감을 위해서 구조는 유연할 필요가 있다. 그가 눈덮인 풍경의 구조에 대해 말할 때의 그 눈을 생각해 보자. 집 앞의 그 눈은 고산 위의 만년설처럼 굳어있지 않는다. 바다 위의 만년설이라 할 수 있는 빙산은 무의식/의식/초자아 같은 전형적인 3계 구조의 모델도 되었지만 말이다. 만년설이나 빙산이 녹듯 딱딱한 구조는 유연한 구조로 변화했다. 계층적인 심층구조로부터 다층적 표면이라는 보다 유연한 구조로의 전환이다. 손부남의 구조는 구조가 발생되거나 사라지는 움직임에 더 방점이 찍힌다. 그에게 구조는 구조화다.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비평과 이데올로기]에서 ‘형식은 내용이 흘러가는 상징적인 틀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형식으로서 파악되는 문제, 즉 형식은 끊임없는 자기생산의 구조로서 따라서 구조가 아닌 구조화로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숲속에 자리하여 어느 각도로 보아도 정원같은 손부남의 작업 환경과 관련해서 정원과의 비유도 그의 구조 개념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철학자 롬바흐는 [정원의 철학]에서 정원에서 ‘살아있는 구조’를 본 바 있다. 작가는 최근의 변화에 대해 ‘화면은 강한 색채 대신 밝은 회백색과 베이지 톤의 중성적 공간으로 정리되었고, 질감의 층이 시간처럼 쌓이면서 하나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구조로의 전환’은 ‘형상이 없어지면서 화면의 질감, 면, 선. 질감, 시공간’ 등 화면의 질서가 생기는 변화를 포함한다. 그것은 지시대상과 단절되고 화면의 내재적 질서를 중시하는 추상화로의 전환인가.
동양적 사유에 기반하는 그의 작품에는 ‘동양에는 추상이 없다’는 맥락에서 추상화는 아니다. 그의 작품이 추상화처럼 보이는 것은 많을 때는 10번까지도 물감을 쌓는 방식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지 그와의 단절이 아니다. 자연은 수많은 공간적 층의 시간적 집적으로 두툼한 실재를 형성해 왔다. 그와 유사한 지위를 가지는 인공물은 오래된 유물일 것이다.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실재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으며, 인간은 극히 일부분을 모사하여 응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연과학에서의 모사는 구조적이기에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고, 표피적 재현을 거부하려는 현대미술과 자연의 관계 또한 구조적이다. 가령 자연과학은 DNA 구조를 발견하여 농업이나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산업의 생산력을 높인다. 손부남의 작품에서 구조는 자연과 문화를 공히 형성하는 기호적 차원을 말하며, 평평한 기호는 화면의 구조 또한 변화시킨다. 그의 작품은 쌓인 눈 아래에 대지가 있듯이, 무언가를 덮는 축적의 시간이며, 그 시간들이 공간에 남긴 흔적이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Mixed media on canvas, 60×244cm, 2025
자연이나 구조에 대한 염두는 그의 작품이 순수한 추상은 아님을 말한다. 하지만 추상의 어법은 공유한다. 돌가루 같은 재료를 혼합하여 부조나 바위같은 견고함을 부여한다. 바인더에 따라 부드러운 부분도 있고, 화면 전체를 다 채우는 것이 아닌 빈 공간을 남겨두기도 한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2020)는 같은 크기의 캔버스로 연결된 한 작품으로, 화면의 구조적 배열 자체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가령 배경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그런 만큼 인간의 실루엣은 분명해진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어둠 또한 극복했을 것이기에 어둠 속 인간의 부각은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앉아 있는 옆모습을 간략하게 표현한 이미지와 그를 향해 다가오는 듯한 원시 동굴벽화 인체의 이미지가 만난다. 머리 부분과 연결된 여러 기호들은 원시인과 시대를 달리하는 현대적 인물임을 말한다. 인간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를 열었던 여러 유물같은 형태들이 집합되어 있다. 도구를 쓰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사유 또한 활성화됐고, 그 역도 사실이다.
호모 파베르라는 인류학적 개념이 있듯이, 각 시대의 대표적 도구는 인간의 뇌리에 깊이 박힌다. 벽화 속 인물 또한 그의 도구를 손에 들고 걸어온다. 대지로부터 자유로와진 인간의 앞발은 손에 든 도구를 통해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했다.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나게 하는 그의 마술적 화면은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와 연결된다. 하지만 여러 화면에 그리고 한 화면의 여러 부분에 배열된 이미지들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미지는 문자와 달리 공시적이다. 여러 도상 중 어느 것을 먼저 보는가에 따라 서사는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문자도 산문과 운문에 따라 대상과 의미가 맺는 관계는 다르다. 손부남이 제시한 여려 요소들를 어떤 순서로 꿰어서 서사를 만들지는 불확정적이다. 맨 왼쪽 화면은 많이 지워진 상태이다. 그 부분은 요즘 작품의 ‘덮기’와 유사하다. 이전 작품의 일부에 요즘 작품의 씨앗이 있다. ‘연결’은 그의 작품 사이에서도 빈번하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고, 현실이 잠재적인 것으로 가라앉는 과정이다.
작품에 따라 잠재성과 현실이 부침(浮沈) 하는 정도는 다르다. 244×980cm로 이어진 합판에 그려진 작품(2020)은 나무라는 자연적 재료를 평평하게 가공한 화면에 그려진 것으로, 매끄럽고 단단한 평면은 작가가 화면에 쟁여놓은 미세한 층들을 잘 드러낸다. 상형문자처럼 기호 안에 대상의 형태가 함축되곤 하는 작품에 대해 작가는 ‘나는 오랫동안 화면 위에 수많은 기호와 형상을 쌓아 왔다. 새, 인물, 집, 나비와 같은 생명의 이미지들은 서로 얽히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 그것들은 설명되지 않는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고 하면서 ‘기호와 형상이 겹치며 세계의 총합을 이루려 했다’고 말한다. 기호의 망을 짜는 존재인 인간이지만 그 또한 짜여지는 자다. 짜면서 짜여지는 관계는 작가와 작품 사이에 내재한다. 작품은 제작자의 일방적인 산물이 아니라 그 제작자를 변모시킬 수 있다. 만약 예술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 제작자는 번짓수를 잘못짚은 것이다. 더욱이 AI 등을 통해 자동 재현되는 기술이 편재하는 상황에서 예술이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데 한정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Mixed media on canvas, 60×200cm, 2025
손부남의 작품이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중층적 작업이라는 점은 수행적 측면을 말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도상적 원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수다스럽지 않다. 침묵 수행하는 수도자적인 면모가 있다. ‘나는 화면 속에서 하나의 존재를 세우기 시작했다. 인물이나 새의 형상은 거대한 장(場) 속에 놓인 존재의 축처럼 등장했다’ 이 존재는 마치 기호의 망을 짜는 바늘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 작업에서는 이러한 형상들이 점차 화면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호와 이미지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표면의 질감과 구조 속에 미세한 흔적으로 남는다.’ 덮고 그 위에 그려지고 또 덮고 하는 것은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궤적과도 같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 종들의 기적같은 이어짐, 그것이 지금 살아움직이는 모든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어짐과 사라짐은 서로를 규정한다. 유전자처럼 직접 전달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 또한 흔적들이 이어진 결과이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는 하나의 요인이 아니라 중층적으로 결정되는 생물학적, 문화적 생태계를 말한다. 검은색으로 그려져 다른 층들을 배경으로 만드는 기호적 인간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동굴벽화에 그려졌음직한 원시인은 지금으로부터도 먼 과거인데 그 또한 먼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 무엇인가가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통시적이면서도 공시적으로 짜여진 환경의 그물망을 잘 타고 있다는 증거다. 우연과 필연이 함께 작동하며 짜여지는 생명의 그물망은 예술의 모델이다. 손부남의 화면은 기호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여러 계가 중첩된 자연 또한 그렇다. 비어있는 듯해도 거기에는 미생물이 가득할 것이다. 누군가 쓰러진 자리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배경을 가득 채운 형태들은 흙빛의 광대한 배경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러한 사라짐 속에서 생겨남도 가능하다. 보다 밝은 색감의 형상들이 몇 개일지 알 수 없을 화면들 위에 꾸물거린다.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잠재적인 형상들이다.
명확했을 기호는 시간의 흐름을 거치며 흐릿해진다. 옆의 네 발 달린 동물과 비교되듯, 서서 걸어감은 인간의 특징이다. 수평으로 펼쳐진 대지 위에 수직으로 서서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다. 대지로부터 앞발이 자유로워진 인간은 그 불안한 균형을 새로운 도전과 일치시킨다. 도구를 손에 쥔 인간의 족적은 매우 컸다. 물에서 나온 이래 또 하나의 중대한 도약이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2025)은 흙먼지가 덮여있는 듯한 화면으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얼룩으로 하는 심리테스트처럼, 관객마다 자신에게 덮여있던 또는 덮고자 한 무엇이 떠오를 수 있다. 손부남의 ‘보이지 않는 끈’은 작품과 관객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작품은 어느 날 작가에게서 생산된 것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돌아다닐 때 어떤 만남이 이어질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바람에 닳은 흙벽에 새겨진 수수께끼같은 미지의 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보는 이의 몫이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Mixed media on canvas, 60×200cm, 2025
충북 모처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사방으로 뚫린 자연 풍경을 볼 수 있는 이상적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찬하는 멋진 풍경화가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추상에 대한 심리적인 가설 중에는 감정이입이 될 만큼 환경과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재현주의가 발생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추상적인 경향이 나온다는 학설도 있지 않은가. 보링거의 관념론적 미학은 사회에서 점차 소외되어 가던 근대미술가와 추상적 경향을 연결시킨다. 손부남은 늘상 대하는 목전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괄호를 친다. 실제의 지형지물은 눈덮인 장면처럼 흔적으로만 남는다. 사진찍기를 포함한 그의 정확한 관찰은 눈의 종류와 색에 대한 감수성도 키웠다. 눈과 막연한 상상보다 관찰이 더 풍부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관념적 발상의 추상미술이 한계를 가지는 이유이다. 그다음에 추상화가들이 하는 일은 장인처럼 화면을 가다듬는 일이다. 현대미술이 재현적 대상만큼이나 피하고자 했던 장식성이 뒷문으로 들어온다. 개념이라는 미명 하에 (배제됐던) 관념적 서사도 들어온다.
손부남의 작품이 눈덮인 풍경은 아니다. 굳이 눈이 있다면 그 눈은 화면과 평행하게 깔린다. 그의 작품에 영감을 준 모든 것을 덮어 평등하게 만드는 눈은 따스한 느낌을 준다. 물론 덮기와 드러나기에는 비극적인 서사도 있을 것이다, 가령 화산재에 묻힌 고대도시, 수몰된 마을 등등. 지구에서 생겨난 모든 유기체는 종국에는 흙으로 덮인다. 덮거나 드러나는 현상은 시간의 층과 관련되며 작가 또한 그러한 자연적 과정을 따른다. 그러한 층이 지질학적 시간대까지 확장되면 화석 연료같은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고, 역사적 시간대라면 고고학적 발굴 현장처럼 한켜 한켜 쓸어담듯이 층을 벗겨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곤 한다. 쌓인만큼 걷어내는 것이다. 덮임과 드러남의 과정은 연속적이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는 빈칸이 많기에 해석학적 상상력이 발휘된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했으되 그것을 재현하지 않는 것은 연속보다 불연속성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추상화처럼 지시대상과의 단절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불연속성은 연속의 부정이 아니라, 보다 겸허한 자세일 수 있다. 자신만이 진리의 대변자처럼 목소리 높이는 세상과의 거리두기이다. 모든 것이 정보화되어 소통되고 유통되는 시대 인간은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특히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렇다. 자연에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역사도 그 시간의 폭을 확대하면 자연사에 속한다. 바탕 면이 합판이라는 것을 잘 모를 정도로 물감으로 덮여진 최근 작품(2026)은 집 근처의 설경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의 말과 가장 연결된다. 그는 소복하게 덮인 눈풍경에 대해 말했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덮음은 드러냄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눈덮인 그 대지를 이동했을 이름모를 동물들, 바람이 지나간 자리, 때로는 눈을 치운 자리까지 여러 흔적들이 중첩된 가운데 나무처럼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감지된다. 눈 풍경을 바라보는 자 또한 그 내부의 흐름에 속해있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Mixed media on poly wood, 244×980cm, 2020
흐름으로 가득한 공간은 여러 만남을 주선할 것이다. 우연적이거나 필연적인 만남은 이어짐의 의미를 이어갈 것이다. 캔버스 작품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2025)는 어둠 속 그림자처럼 배치된 형상들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져 있다. 세로 높이에 비해 긴 가로 길이는 한눈에 포착되기 보다는 두루마리처럼 가면서 읽게 되어있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열심히 작업했지만, 큰 전시장에 작품 몇 개만 띄엄띄엄 걸어놓았다. 무언가 읽기 위해서는 간격이 있어야 한다. 붙여쓴 글자를 읽기는 힘들다. 그의 작품은 낯선 문자를 떠올린다. 자연은 누가 만든지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언어로 씌여진 텍스트들이다. 지금의 지배적인 언어는 수많은 언어들 중의 하나로 상대화된다. 순간을 고정시켜 절대화시키려는 권력 또한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분절되고 꺽이고 점처럼 찍힌 형상들은 차이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언어나 문자의 특징이다.
세계를 텍스트로 간주할 때 연결이 되는 것이다. 텍스트는 그것이 지양하려 했던 주체나 대상보다 연결부위가 많다. 텍스트 자체가 상호텍스트다. 유전자가 그렇듯이 조건에 따라 표현형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작업에서는 작가가 꾸준히 만들어온 맥락에 따라 같은 기호도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 작가가 강조하는 ‘연결’은 그의 풍경을 기호학적으로 만든다. 연결이란 다름 아닌 깨달음이다. 이어서 걸은 같은 크기(60×200cm)의 캔버스 작품(2025)은 새벽녘이나 저녁 무렵의 짙푸름에서 한밤중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다. 빛의 변화는 그자체가 시간의 공간화이다. 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암순응이 끝나고 나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생겨난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 그것은 실재일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는 시각이 아니라 촉각이 중요하다. 촉각은 가장 먼저 켜지고 가장 나중에 꺼지는 원초적인 감각으로 알려져 있다. 혼합매체를 쓰며 여러 겹으로 칠해지거나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은 촉각적이다. 작업이란 촉수를 최대한 뻗는 일이기도 하다.
형상이 있는 경우, 그가 구사하는 반쯤 기호적인 특성은 구조의 일부를 이룬다. 좀 더 추상적인 작품군의 경우 작가는 화면 자체를 구조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 구조의 중심은 없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구조에 중심을 주고자 하는 의도, 그것을 한 현전의 지점에, 고정된 기원에 관계시키려는 의도에 의해서, 이 중심의 기능은 구조에 방향을 부여하고 균형을 잡아서 구조를 조직하는 것으로, 변화라는 유희를 억제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중심에선 요소들의 치환이나 변형은 금지’되기 때문에 데리다가 비판하는 ‘중심에 맞추어진 구조의 개념’은 계속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둔 손부남의 작품과 거리가 있다. 어디를 잘라도 그림이 될 것 같은 긴 화면은 끝없이 펼쳐진 풍경처럼 계속되는 유희처럼 이어진다. 그는 ‘반복되던 기호는 점차 침전되고, 화면은 설명이 아닌 구조로 남는다. 이번 작업들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기록이다. 보이지 않는 끈은 더 이상 화면 위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질감과 공간 사이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구조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Mixed media on poly wood, 60×244cm, 2026
‘점과 선, 면과 질감은 더 이상 형태를 구성하는 조형 요소가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행위가 남긴 흔적이며, 그 흔적들이 서로 관계를 이루며 하나의 구조로 전환된다.’ 화면은 ‘시간이 응고된 구조’로 변화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화면을 구성하기보다 구조가 스스로 발생하는 순간을 따라간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개입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입을 멈추는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회회는 스스로 서게 된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결과라기보다 상태이며, 완성이라기보다 시간 속에서 잠시 드러난 균형에 가깝다.’ 작가는 구조가 생성되고 사라지는 흐름에 주목함으로서 재현적이거나 표현적인 의미가 아닌 존재로서의 회화를 추구한다. 그것은 의미를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의미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손부남의 작품은 의도된 생산물보다는 유물과 사물과 자연 그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구조에 바탕하는 그의 최근 작품은 눈이 내렸다가도 녹듯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구조를 내장한다.
출전; 충북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