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 미술평론가
슬라보예 지젝은 실재계를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 나점수는 자신의 조각이 선험적 실재로부터 온다고 했다. 작가는 그렇게 이미, 저절로, 주어진 실재를 찾아서 불모의 사막을 헤맨다. 작가의 조각에서는 그런, 사막의 맛이 난다. 건조한. 까칠한. 소금기가 묻어나는. 작가의 조각은 사막 식물의 최소한의 몸통을 닮았고, 사막에 던져진, 전설처럼 아득한 시간을 증명하는, 빛바랜, 알 수 없는 사물을 닮았다. 사막 유목민이 흙벽돌로 지어 회칠한 벽의 색감을 닮았고, 회칠이 벗겨진 흙벽의 속살을 닮았다.
그렇게 사막에서 유래한 작가의 조각은 그렇다면 과연 실재인가. 실재의 흔적인가. 실재의 표상인가. 그 실재는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산 것과 죽은 것 사이를 너무 오랫동안 떠돌다가 이름도 얻지 못한 무명의 존재인가. 한때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부재 하는 것들의 흔적인가. 말과 말 사이에 시가 있다고 한다면,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가 시작된다고 한다면, 그런 시를, 시적 존재 아니면 시적 상태를 형용한 것인가(작가는 자신의 조각을 조형시라고 부른다).
불모라고는 했지만, 그런 사막에도 식물은 산다. 선인장이다. 작가의 조각은 수분의 증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수분을 저장하기 위해 최적화된 선인장의 몸통을 닮았다. 여기서 수분은 정신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작가의 조각은 휘발하는 정신의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더 많은 정신을 내장하기 위해 최적화된 몸 그러므로 형태의 꼴을 하고 있다. 선인장의 생존에 수분이 필수적인 만큼 작가에게 정신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작가가 조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인장의 금욕적인 몸통을 닮은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사막 같은 세상(실재계)에서 정신의 표상을 짓는 일이고, 모래바람 이는 세상의 끝에 정신의 푯대를 세우는 일이다.
정신의 푯대라고 했다. 정신의 표상이라고 했다. 작가는 그 표상을 식물적 사유라고 부르고, 식물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사막 그러므로 사막 같은 세상에서 물질에 해당하는 것들, 건조한 바람과 짧은 비, 그리고 세상을 온통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를 정신으로 전환(응축)해 생명을 보존하는 사막 식물의 생존전략을 의미할 것이다. 불모의 한가운데서 생명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사막 식물의 생리(의지)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 생리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처음에 작가는 사막 흙 그러므로 소금기를 머금은 흙을 톱밥에 버무려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이후 점차 그 질감 그대로 나무를 조각한다. 작가의 조각에서 단연 인상적인 부분으로 치자면 질감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그건 단순한 형식논리와 방법론의 소산이기보다는 이처럼 사막의 질감에서 온 것이다. 흔히 그렇듯 나무의 횡단면을 톱으로 켜면 매끈한 단면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나무의 종단면을 톱으로 썰어 속을 파내는 방법으로 골을 만들고 형태를 만든다. 그 질감은 말하자면 톱을 손놀림이 좋은 조각칼처럼 사용하는 것에서 온다. 그렇게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건너온 것 같은, 빛바랜, 바싹 마른, 물질을 정신(혹은 사유)으로 승화한 미라를 보는 것 같은, 금욕주의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성주의를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를 얻는다. 사막의 모래처럼 거친, 터실터실한, 자연에 피부가 있다면 꼭 그렇지 않을까 싶은, 비정형의 질감을 얻는다.
피부 그러므로 질감이 그렇고 구조 또한 그렇다. 작가의 조각에서는 수직과 수평이 강조되는데, 수직은 자연의 섭리를, 수평은 자연의 포용력을 상징한다. 사람의 논리로 치자면 각 정신을, 그리고 무한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자연의 구조(지향)를 닮았고, 자연의 성정을 닮았다. 최소한의 물질과 최대치의 정신으로 무장한, 낡고 해진, 빛바랜 갑옷을 입고 있는 것도 같은 사막 식물의 성정을 닮았다.
세상의 변방에 사막이 있다면, 나무에도 변방은 있고 사막이 있다. 틈새가 그렇다. 나무를 보면 갈라진 틈이 있는데, 보통의 조각가라면 못 쓸 나무고 버려질 나무다. 그런데, 그 틈이 작가의 눈에 들어왔다. 뽀얀 속살을 가진 나무지만, 갈라진 틈새는 마치 자신의 상처를 숨겨놓고 있기라도 하듯 어둡고 깊다. 아마도 실재를 찾아 사막을 떠돈 작가가 보기에 또 다른 실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다움을 실현한 순간을 존재의 현현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존재가 현현하는 순간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어쩌면 조각에 대한 평소 태도로 보아 당연하게도 작가는 틈새를 위한 조각을 만든다. 틈새는 나무가 생육한 형편에 따라서 균일하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우연과 필연이 합작해 만든 것도 같은, 자연이 스스로 생리에 따라 만든 것도 같은, 틈새를 위한 집을 짓는다. 유례가 없는 조각이고 발상이다. 불필요한 살을 발라내 틈새 주변으로 얇은 벽을 세우는, 그렇게 자연처럼 유기적이고 우연한 형태를 만드는 조각이다. 작가의 조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톱을 섬세한 조각칼처럼 놀려 나무 속을 파내는 조각의 최초 발상이 그 자체 또 다른 실재라고 해도 좋을, 이런 틈새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자연(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생리를 따라 조각한다는 발상이 결정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조각의 확장(조각의 내부로의 확장 그러므로 심화)과 함께, 생태학의 관점에서 볼 여지도 있다.
그리고 조형물과 관련해서 주목해볼 부분이 파수꾼이다. 정작 작가는 정신의 위치라고 부르는, 꼿꼿하게 서서 망원경으로 저기 먼 곳을 조망하는 사람 형상을 소재로 한 조형물이다. 또 다른 한 버전으로, 한 손을 치켜들고 있는, 속이 빈 탓에 부력으로 물에 뜰 수 있는, 형상을 최소한의 기호로 축약한, 이모티콘 형태의 조형물이 있다. 파도에 흔들리는 부표처럼 물속에서 이리저리 손을 흔들면서 시대에 경고 메시지를 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은 육지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은 바다에서 시대를 감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라면, 정신을 감시한다고 했을 것이다. 칠흑 같은 밤에 홉뜬 눈으로 새벽을 지키는, 이성(작가의 경우에는 정신)을 지키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한 작가의 화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막 같은 세상(실재계)에서, 저마다 상처(틈새)를 움켜 안고 사는 존재의 형편을 살펴 조각한다. 그러면서 틈새(정신의 거소)가 훼손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시대를 감시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에 대해서는 일종의 상징적 행동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