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혁의 회화/ 몸 그림, 몸 풍경, 존재를 증명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무질서한 듯, 정돈된 듯한 자연(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의 몸(신체)을 연상하게 된다. 이런 자연의 이미지들은 나에게 확장된 점, 선, 면이 된다...나의 회화는 몸에서 출발해 자연으로 확장되고, 자연에서 다시 몸으로 돌아오는 순환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언어 이전의 언어이며, 음악의 멜로디처럼 반복과 변주를 품고 있고, 생명의 떨림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이 흔들림, 이 미완의 리듬 속에서 몸의 에너지와 자연의 시간을 이어 적어보고자 한다. 

- 작가 노트


20세기 초 추상미술의 등장을 예고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하면 조형예술의 최소 단위원소는 점으로 환원된다(칸딘스키의 저작 <점, 선, 면> 참조). 모든 형상과 이미지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비롯했다. 그렇게 하나의 점에서 확장된 선과 면의 조합으로 하나의 형상이 형성되고 이미지가 구성된다. 서양 사람들의 분석적인 논리에 부합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생각의 결이 좀 다른, 수묵화의 전통이 깊은 동양적인 관점이 대비된다. 조형예술의 최소 단위원소는 얼룩이다. 모든 형상과 이미지는 하나의 얼룩으로부터 비롯했다. 이런 얼룩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 하나의 형상을 만들고 이미지를 만든다. 얼룩도 결국 점이라고도 하겠지만, 엄밀하게 점과 얼룩은 다르다. 점이 결정적이라고 한다면, 얼룩은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이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래서 생리적으로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이고,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자연의 생명력을 따라 그리기에 적절한 부분이 있다. 


작가는 원래 한국화를 전공했고, 어릴 때 서예를 공부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이런 얼룩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을 체득할 수 있었고, 그 생명력 그대로 서체 그러므로 캘리그래피의 변주와 변용에 바탕 한 지금의 그림을 위한 자양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생명력이 흔들린다고 했다. 미완이라고도 했다. 왜 흔들리는가. 아마도 자연의 흐르는 기운을, 순환하는 기운을, 파동 하는 기운을 의미할 것이다. 왜 미완인가. 아마도 밑도 끝도 없이 흐르고 순환하고 파동 하면서 지금 막 생성하는 자연의 생리를 의미할 것이다. 최소한 그런 자연(비결정적인 자연, 열린 자연)의 무한 지경을 지향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막 생성하고 있는 자연의 꼴(운동성)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을 일종의 생성회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풍경이라고 부른다. 시간 풍경(아마도 일상적 시간을 표상하는 일간지를 콜라주 한 전작에 붙여진) 같은. 존재 풍경(아마도 전작에서 검은 화면 뒤로 드러나 보이는 얼굴 그림에 붙여진) 같은. 그리고 몸 풍경(아마도 근작과 관련해서) 같은. 풍경은 자연과 다르다. 그 자체로 자족적인 자연에는 인간의 인식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이처럼 인식할 수 없는 자연을 개념화한 것이 풍경이다. 풍경은 원래 인식 밖에 있는 자연을 인식의 대상으로 객체화한 인문학적 배경이고 개념적 장치다(메를로 퐁티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세계와 주체를 주체와 객체로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풍경의 관계에는 자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은 예술의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자연에서 건너오는 것이 있고,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것이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하나로 만나고 포개지는 지점에서 풍경이 열린다. 다시 말해, 내가 본 자연, 내가 읽은 자연, 내가 투사된 자연, 내가 반영된 자연, 나에게 의미 있는 자연, 그래서 반쯤은 이미 나 자신에게 속한 자연, 다름 아닌 나 자신인 자연이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는 풍경을 매개로 시간을 그리고, 존재(얼굴 그러므로 얼의 꼴)를 그리고, 몸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그린다. 이처럼 외양은 다르지만 실제로는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므로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는 자기반성적인 그림이라고 해도 좋고, 존재를 증명하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중 근작과도 관련되는 몸 풍경에 대해서는 다르게는 몸 그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런 몸 그림이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표현주의가 감정(감정의 질 그러므로 감정의 강도)을 그린다면, 추상표현주의는 감각을 그리는 것이 다르다. 몸의 경험(체화된 감각)을 그리고, 몸의 행위(행위의 흔적)를 그리는 것이 다르다. 세계와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몸 아니면 그 자체 이미 세계의 일부인 몸을 그리는 것이 다르다. 거칠게는 작가의 근작이 바탕하고 있는 캘리그래피를 추상표현주의의 동양적 버전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어서 작가의 그림에는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융합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몸이 지나간 풍경(The Landscape After the Body)이라고 부른다. 근작의 주제다. 몸 이후의 풍경, 몸이 그린 풍경, 몸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풍경, 그러므로 부재 하는 몸을 증명하는 풍경, 몸의 흔적, 몸의 자국, 몸 그러므로 존재의 흔적, 존재의 자국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의 풍경을 넘어, 존재의 풍경을 넘어, 몸 풍경을 그린다. 몸이 지나간 풍경(시간)을 그리고, 몸이 머물다 간 풍경(장소)을 그리고, 몸(감각)으로 체화된 자기 자신(존재)을 그린다. 몸 그러므로 존재를 증명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몸을 매개로 존재를 증명하는 작가의 몸 그림에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버전의 그림이 있다. 중첩된 붓질이 강조되는 경우, 분방한 드로잉이 강조되는 경우, 그리고 분위기가 강조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중 중첩된 붓질과 드로잉이 강조되는 버전의 경우를 보면, 서로 구별되기보다는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면서 상대적으로 붓질이, 그리고 드로잉이 강조되면서 구분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 대략적인 제작 과정을 보면 작가는 먼저 파스텔로 밑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 위에 붓질이 중첩되기도 하고 드로잉이 부가되거나 하면서 밑그림을 덮어서 가리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드러내 보이거나 한다. 하나의 화면 속에 파스텔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색감(그리고 질감)이, 정적이고 격렬한(그러므로 어쩌면 정중동에 비유할 만한, 이성과 감성의 합일 혹은 조율에 바탕 한) 붓질이, 리드미컬한 드로잉이 중첩된다. 그렇게 파스텔이, 붓질이, 드로잉이 하나의 결로 포개지면서 서로 드러내거나 지운다. 드러내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드러낸다.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그린다. 지우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덮어서 가리지만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는다. 흔적으로 남고, 자국으로 남는다. 흔적과 자국. 바로 작가가 그리고 싶은 그림일 것이다. 몸이 지나간 자국, 부재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흔적이 아마도 작가가 붙잡고 싶은 지점일 것이다. 


이처럼 존재를 증명하는 그림과 관련해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이 시사해주는 지점이 있다. 옛날 종이가 귀했던 시절 양피지로 종이를 대신했는데, 쓰고, 지우고, 고쳐 쓰고, 다시 지우기를 거듭한 나머지 마침내 양피지가 너덜너덜해진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한 장의 양피지 속에 쓰고, 지우고, 고쳐 쓰고, 다시 지운 흔적이 고스란하다. 긍정과 부정을, 예와 아니오를 넘나들었을 번민하는 존재가 오롯하다. 그러므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는 쓰고 지우고 고쳐 쓰고 다시 지운 총체로서의 나를, 긍정과 부정의 합으로서의 나를,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포함하는(인정하는) 전체로서의 나를 증명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화가는 그리면서 쓴다. 화가에게 그림은 곧 텍스트에 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부드럽고 우호적인 파스텔은 밑그림에 해당하는 만큼 존재의 내면을, 격렬하고 정적인 붓질은 존재의 파토스를, 그리고 분방한 드로잉은 존재의 생명(력)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내면에, 파토스에, 생명력에 색감과 질감을 부여해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양가적인, 때로 이율배반적인, 그리고 다성적인(미하일 바흐친은 내 속에 다른 목소리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덧붙이자면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도 했다)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 그림들과 그 결이 사뭇 다른 그림이 있다. 바로 분위기가 강조되는 버전의 경우가 그렇다. 얼핏 보면 뭘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그림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개 자욱한 먼 산을 보는 것도 같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산의 음영이 다르게 보이는 그림이다. 산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그림이다. 산이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는 그림이다. 다만 그렇게 추정해볼 수 있을 뿐, 꼭 산이라고도 풍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림이다. 일종의 내면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이 그림을 위해 작가는 먼저 바탕화면으로 은색을 칠했다. 그리고 그 위에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흰색 물감 원액을 덧발라 마티엘(질감)이 여실한 터치를 중첩했다. 그 과정에서 은색과 흰색이 부분적으로 섞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은회색 조의 무채색 톤의 화면을 부각한다. 산이든 풍경이든 내면이든 대상을 특정해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몽환적인, 비현실적인, 아득한, 먼, 분위기로 와닿는 그림이다. 그 분위기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은색이다. 주지하다시피 은색은 스스로 빛을 내는 자기 발광성 안료다. 스스로 빛을 머금고 있으면서 외부의 빛 환경에도 반응하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산처럼도 보이고 풍경처럼도 보이고 내면 풍경처럼도 보인 것이다.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 것이다. 


이 그림은 비록 소재는 다르지만 전작에서의 얼굴 그림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때는 은색 대신 흑연을 재료로 한 것인데, 흑연 역시 은색처럼 외부의 빛 환경에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무 그림도 안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그림 속에 숨은 얼굴이 보인다. 그림 속 얼굴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 것이다. 여기에는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 즉 분위기를 원래는 먼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 경험이라고 했다. 원래는 먼 것? 감각적 층위로 드러나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존재성을 의미할 것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자(개별자)가 아니라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작가의 다른 그림도 얼추 그런 면이 있지만, 그렇게 작가의 흑연 초상도 은회색 풍경도 이런, 그 자체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 자체를, 그리고 풍경 자체를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