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희/ 어느 한낮 오후 햇볕 따뜻한 계단에 앉아있던 기억,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움


고충환 | 미술평론가


         
벽 위쪽으로 반쯤 열린 쪽창이 보이는.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출처로부터 유래한 햇빛이 건물 내부에 어슷한 기하학적 형태의 밝은 면을 만드는. 햇빛이 건물의 각진 부분에 음영을 만드는. 그렇게 벽 위에 던져진 햇빛과 그림자가 대비되는. 짙은 음영을 길게 드리운 계단실과 계단실 안쪽으로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계단이 보이는. 기하학적 패턴을 만드는 터실터실한 석벽의 이음새가 보이는. 서 있거나 누워있는 사다리가 보이는. 누운 의자와 기우뚱한 책상의 그림자가 보이는. 그리고 여기에 뭔가를 움켜쥔 손 같기도 하고 웅크리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한 종이접기가 만든 형태가 보이는. 

이 그림들은, 이미지들은, 사물들은 다 무엇인가. 분명한 것도 없고 바로 그것이라고 정색하고 지시할 만한 대상도 없다. 비록 알만한 형태를 찾아 지목해보았지만, 사실은 저마다 다른 무언가를 본다 해도 무방한 그림이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는 열린 그림이다(움베르토 에코는 예술작품의 특수성을 열린 의미에서 찾고 열린 그림에서 찾는다). 종이접기도 마찬가지. 작가가 왜 종이접기에 생각이 가닿았는지 작가에게 종이접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작가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형태며 의미가 오리무중을 헤매기 쉽다. 그리고 알다시피 사람들은 작가의 친절한 설명 없이 그림을 본다. 그림 자체를 본다. 아마도 작가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작가의 주문이 그럴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인식과 실재 사이를 넘나드는, 인식과 실재의 차이를 해체하고 재정의하는 경계 위의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이면에서 밀어 올린 내면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분명한 것은 그 자체 촉각적이라고 해도 좋을 따뜻한 햇볕과 짙은 음영이 대비되면서 부드럽게 아롱거리는 햇빛의 질감을 부각하는 분위기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분위기라고 했다. 분위기가 뭔가. 발터 벤야민은 분위기 그러므로 아우라를 원래는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지척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했다. 숭고한 것, 신적인 존재에 해당하는 것, 존재의 근원에 해당하는 것,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감정 같은 것, 비현실적인 것, 몽환적인 것, 아롱거리는 것들의 존재 방식을 의미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유령의 존재 방식을 의미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다움을 실현한 순간을 존재의 현현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존재가 현현하는 순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아롱거리는, 유령 같은, 존재가 현현하는 순간을 포착해 보여주는 사이의 풍경, (탈)경계 위의 풍경을 통해 지금도 여전한 햇빛을, 잡히지 않는 햇빛을, 부드러운 도착을, 떠도는 침묵을, 희미한 시간을, 거의 청명한 대기를, 완전한 고요를,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친밀감을 감촉한다(벤야민의 아우라가 꼭 그렇지 않은가). 바로 햇빛을 감촉하고, 햇빛의 기억을 감촉하는 것. 현재의 햇빛을 감촉하면서 과거 햇빛의 질감을 기억으로 되불러오는 것. 그렇게 현재의 햇빛과 과거의 햇빛이 하나의 결로 포개지는 것.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근작에서는 더욱이 과거를 향수하고 소환하기 위한 계기로서 작동한다. 

전설처럼 아득하면서 지금처럼 생생한 과거 언젠가 한낮 오후에 작가는 홀로 계단에 앉아있었다. 빛을 받아 하얗게 발광하는, 털실에서 떨어져 나온 보풀처럼 아롱거리는, 피아노의 흰 건반 같은 계단을 어루만지는 햇빛의 질감이 중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가벼웠고, 나른했고, 따뜻했고, 부드러웠고, 감미로웠고, 평화로웠다. 다만 떠도는 침묵이, 거의 청명한 대기가, 완전한 고요가 함께 했을 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 누군가가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하게 고독했다. 고독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아마도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나 혼자만이라는 지극한 고독과 자존감이 작가를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기억해보면 햇빛 때문이었다. 그 햇빛이 그립고, 그 햇빛의 질감이 그립고, 그 한낮 오후의 내가 그립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를 깨물 때 나는 향기와 소리를 통해 과거로 되돌려진다. 어떤 사람은 향기를 매개로, 어떤 사람은 소리를 계기로,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풍경이나 사건이나 장면을 통해 과거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시간을 거스르게 해주는 현재 속 계기를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른다. 작가에게 그 현실 속 계기는 햇빛이었고, 햇빛의 질감이었다. 그렇게 햇빛의 기억을 매개로 작가의 현재는 과거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처럼 과거와 함께 사는 현재는 결국 잃어버린 자기, 원형적인 자기를 되찾는 것이므로 작가의 작업에는 자기반성적인 부분이 있다. 종이접기도 마찬가지. 작가는 무심결에 종이를 접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를 만든다는 의식도 없이 종이를 접으면서 무심결에 유년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쩌면 햇빛의 기억보다 더 먼 과거를 떠올렸을 것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어디에든 있다(편재하는 것), 이라고 부른다. 근작의 주제다. 밖에도 안에도, 외면에도 내면에도, 가시적인 층위에도 비가시적인 층위에도, 감각적인 층위에도 비감각적인 층위에도 있다는 말이다. 그게 뭔가. 루시앙 골드만은 <숨은 신>에서 그것을 신이라고 불렀다. 숨어있으면서 편재한 신이라고 불렀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했고, 하이데거는 존재의 현현이라고 했다. 작가는 햇빛이라고 했고, 햇빛의 질감이라고 했고, 햇빛의 기억(그리움이라고 해도 좋을)이라고 했다. 감각적인 기억 그러므로 감각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그 햇빛은 지금도 여전히 있고 그대로 있다. 아마도 작가의 현재를 위로하고 위안하는 현실 속 계기로서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전설처럼 아득한, 아련한, 먼 어느 한낮 오후 햇볕 따뜻한 계단에 앉아있는 저마다의 자기와 만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