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처 포커스/ 포스트 휴머니즘, 인간 너머의 세계
조안 조나스. 백남준아트센터. 2025.11.20.-2026.3.29.
최재은. 서울시립미술관. 2025.12.23.-2026.4.5.
고충환 | 미술평론가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중에서도 대타자에 해당하는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여기서 대타자란 인간이 스스로 대상화한 타자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여전히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본 타자의 범주 안에 있다. 최근에 이런 인간 중심의 타자론을 넘어서 자연 자체의 관점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논리와 논의가 활발하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 자연이 생태 담론을 열었다면, 자연의 관점에서 본 자연이 후기 생태 담론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인식을 위한 자리가 없는 만큼 인식을 내려놓는, 인식 밖에 인간을 놓는, 스스로 무지한 자리에 자기를 놓는 실천 논리(현상학적 에포케)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관점이기 때문이다. 대상에서 주체로 자리바꿈이 선행돼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타자가 아닌데 어떻게 타자가 되는가(질 들뢰즈의 타자 되기), 내가 자연이 아닌데 어떻게 자연이 될 수 있는가(자연 되기), 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 이런 후기 생태 담론의 문제의식과 실천 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는 전시가 있어서 주목된다. 최재은의 <약속>과 조안 조나스의 <인간 너머의 세계>, 두 전시이다. 여기서 약속은 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이전의, 원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인간 너머의 세계는 좀 더 급진적인 경우로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내려놓고 스스로 타자 되기, 자연 되기, 비인간 되기의 실천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최재은은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바나(일본 전통 꽃꽂이)를 전수하는 소게츠 센터에 수학한 것이 이후 작가적 삶을 위한 토양이 되었다. 일본에서 꽃꽂이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묻는 예술의 한 분과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계기로 자연 미술을 바탕으로 설치미술과 대지예술로 자신의 작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돼주었다.
전시는 루시, 경종, 소우주, 미명, 자연 국가, 5개의 소주제로 구성된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약 320만 년 전 화석의 이름으로, 작가는 당시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던 루시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골반 형태를 모티브로 유기적 추상 조각을 만들었다. 최초의 인간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해도 좋고, 인류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종에서는 해수 온도의 상승으로 인해 오염지수가 높아지면서 백화된 산호초와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그 위에다 전 지구 바다에서 계량된 해수 온도를 시시각각 보여준다. 넓고 깊어 인간의 시선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바다(대답 없는 지평)로부터 지구의 종말이 죽은 산호처럼 조용히 예비 되고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작업이다.
그리고 소우주(땅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1986년 경주 토함산 자락에서 시작해 일본,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땅속에 종이를 묻어두었다가 짧게는 3년, 길게는 15년이 지난 뒤에 종이를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땅이 겪었을 일과 사연을 기록한다. 자연이 그린, 시간이 그린, 대지가 그린 그림이라 해도 좋을 만한 작업이다. 이와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우는 돌에서는 자연이 대상에서 주체로 자리바꿈하는 발상의 전환이 느껴진다. 작가의 이런 자연과의 동류의식이 미명(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서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들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주고 불러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름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 이름이 무색하고 무의미한 실정이다. 그런 만큼 존재의 잃어버린 이름을 낱낱이 호명하고 소환하는, 그러므로 존재를 존재로서 새삼 등록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자연 국가와 관련해서 작가는 2014년부터 DMZ 프로젝트 작가로 참여해왔고, 2016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본전시에 초청을 받아 DMZ 프로젝트_대지의 꿈 전시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이번 소 주제전은 이 일련의 전시의 연장선에 있다.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종자 볼 프로젝트다. 종자(씨앗)를 흙으로 뭉쳐 볼 형태로 만든 뒤에 이 볼을 지뢰밭을 피해 드론으로 살포하는 작업이다. 아직은 실현 가능한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상상력이고 실천 논리를 세우는 일일 것이다. 정치적 공간을 생태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기념비적 기획으로 평가된다.
앞서 언급했듯 조안 조나스는 좀 더 급진적인 형태를 띤다. 아예 인간 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연 되기, 동물 되기, 타자 되기, 사물 되기, 비인간 되기의 실천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인간 이후의 포스트 휴머니즘을 예비하고 예시한다.
2009년 제정된 백남준 예술상의 2024년(제8회) 수상 작가이기도 한 조나스는 백남준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1960년대 비디오아트를 실천한 선구적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백남준이 매체 실험에 치중했다면, 조나스는 자기만의 서사적 비디오에 집중한 것이 다른 점이다. 매체 실험이 있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서사를 담아낼 수도 있음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형식으로든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크게 실험_급진적인 순간들, 여행_자연의 정령 동물 조력자, 공생_되살림과 변주, 총 3개의 소주제로 구성돼 있다. 그중 1960, 70년대를 중심으로 한 실험_급진적인 순간들에서는 바람(1968)과 오개닉 허니의 비주얼 텔레파시(1972)가 대표적이다. 바람에 맞서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을 타는 것 같기도 한 사람들의 몸짓이 바람의 조력자 혹은 바람 되기라고 칭해도 좋을 작업이다. 오개닉 허니의 비주얼 텔레파시에서는 가면을 쓴 사람의 얼굴과 민얼굴의 작가를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대변되는, 가면 주체와 가면에 가려진 주체(억압된 주체)로 대변되는 이중 주체를, 다중주체를, 분열된 주체를, 미끄러지는 주체를 예시해주고 있다. 가면으로 대변되는 변신과 위장 자아를 통해 여성적 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을 시도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으며, 비결정적인 성적 정체성을 겨냥한 작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_자연의 정령 동물 조력자에서는 아름다운 개(2014), 시내, 강, 비행, 패턴(2016/2017)이 주목된다. 작가의 반려견 오즈의 목에 소형 카메라를 부착한 뒤에 내달리면서 보는, 흔들리면서 보는, 아래위가 전복된 상태로 보는, 종잡을 수 없는 개의 시선이 반영된, 동물의 시선으로 보기를 유도하는 작업이다. 후자의 작업에서도 역시 가면을 쓴 두 사람(어른과 아이)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다른 작업에 등장한 가면이 그런 것처럼 시내 되기(사물 되기), 강 되기(자연 되기), 새 되기(비행하는 눈으로 보기), 동물 되기와 같은 비인간의 실천 논리를 예시해준다. 공생_되살림과 변주에서는 소리 만지기(2014)와 빈방(2025)이 주목된다. 영상에 나타난 향유고래를 작가가 더듬어 만지는 작업인데. 이는 고래가 숨을 쉬면서 내는 소리를 만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향유고래는 수면 중에도 숨을 쉬기 위해 한 번씩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는 만큼 가수면(램수면) 상태로 잠을 잔다. 고래는 어떻게 꿈을 꾸는가, 라는 부제에서 보듯 작가는 향유고래가 자다가 한 번씩 수면 위로 내뿜는 숨소리를 고래가 꾸는 꿈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빈방에 종이로 만든 빈집들이 매달려 있는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주변에 죽은 사람들이 빈방 하나씩을 남겨놓고 간다는 생각에 착안했다고 한다. 사라진 존재와 흔적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사라짐에 대한, 인간 이후, 따라서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서사를 담았다고도 볼 수 있고,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정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의 빈방이, 따뜻한 질감이 은근한 빈집이 희망을 예감하는 종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화두를 던져놓고 있는 것도 같다.
이렇듯 행위예술을 연출하고 기록한 비디오와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자연을 모방하고, 모방을 통해 자연에 공감한다. 예컨대 물속에서 유영하는 오징어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에서는 자연에서 춤사위를 빌려온 현대무용이 연상되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대상에 대한 공감이 읽히는데, 영상 속에서 움직이는 동물들을 더듬어 만지는 것도 그렇고(마치 대화하는 것도 같은), 그렇게 움직이는 선을 따라 드로잉 하는 것도 그렇고, 그 움직임 그러므로 생리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죽은 토끼에게 예술을 설명하는 요셉 보이스를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요셉 보이스가 말하는 예술가적 무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초기 실험적 비디오에서는 초현실주의에서 시도된 실험영화의 흔적을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는가 하면, 사람이 바람을 흉내 내는 바람 되기에서는 사물극과 사물 인격체를 보는 것도 같다. 생각의 창조자로서의 바다(바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바다가 생각을 창조한다)에서는 시적 착상(혹은 발상)마저 느껴진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렇듯 행위, 연극, 연출, 기록, 영상, 그림, 소리, 침묵, 시, 무용이 있다. 예술의 기원과 발생 시점으로 되돌아가 보면, 원래 예술은 종합예술이었고, 최초의 예술가는 무당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술은 이미 기원에서부터 탈경계와 같은 현대의 탈(脫)의 논리를 선취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는 예술의 기원과 현대가 하나로 만나고 있었다.
1차 게재 아트인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