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셔널갤러리 신관 입구 상상도 ⓒ Kin Creatives
현재 영국 공공 미술계는 기이한 ‘이중 경제(Dual Economy)’의 덫에 빠져 있다. 한편에서는 수조 원대 규모의 야심 찬 신축 프로젝트가 강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운영 예산 부족으로 숙련된 내부 인력이 현장을 떠나는 ‘인적 파산’의 위기가 공존한다. 최근 런던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가 발표한 미래 발전 전략은 이러한 공공 미술계의 고질적인 구조적 불균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국 미술계에는 기부자가 지정한 용도 외에는 자금을 전용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지정기부금(Restricted Fund)’ 제도가 있다. 미술관의 유연한 대처를 가로막는 이 법적 장벽은 17세기 초(1601년) 제정된 ‘자선 목적 이용법(Charitable Uses Act)’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부자의 의사를 일종의 ‘성스러운 신탁(Sacred Trust)’으로 규정하는 이 법안 체제 아래 미술관은 심각한 운영난을 겪고 있더라도 특정 건축물 건립을 위해 기탁된 자금을 인건비와 같은 운영비로 전용할 수 없다. 이른바 ‘과거의 유령(Dead Hand)’에 비유되는 수백 년 전의 기부 서약이 21세기 미술관의 실질적인 생존 전략을 옥죄고 있는 셈이다. 2022년 영국 정부는 기관이 후원금의 일부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선법(Charities Act 2022)을 일부 개정했으나 법의 적용 범위를 재정 위기에 직면한 기관으로 국한해 그 행정적 문턱이 여전히 높다.
‘도마니(Domani-내일)’의 역설: 미래를 위한 오늘의 희생
최근 내셔널갤러리는 현대 미술의 중심인 테이트미술관의 영역 침범 논란을 감수해가며,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로의 외연 확장을 골자로 한 ‘프로젝트 도마니(Project Domani)’를 발표했다. 총 7억 5,000만 파운드(약 1조 3,000억 원) 규모의 본 프로젝트는 2020 도쿄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쿠마 켄고(KUMA Kengo)가 설계를 맡아 화제를 모았다. 1조원이 넘는 기부금을 확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현재 약 820만 파운드(약 143억 원) 가량 적자이다. 현행 자선법상, 막대한 규모의 지정기부금은 재정 적자를 해결하는 데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술관은 향후 운영 적자를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 ‘적립 기금(Endowment Fund)’ 조성을 계획 중이나 이는 또 다른 구조적 모순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법령 아래서 운영비 전용 승인을 받기 위해 미술관은 스스로 얼마나 심각한 재정 위기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국 내셔널갤러리는 재정 건전성 입증과 기부자의 신뢰 확보라는 명분 하에 숙련된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명예퇴직(Voluntary Exit Scheme)을 시행하고 있다. 미래의 인적 자원을 지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의 핵심 인적 자원을 먼저 감축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에 봉착한 것이다.
외형 성장에 가려진 내부 시스템의 붕괴
이러한 현상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서도 확인된다. 거액의 기부금을 통한 전시 공간의 리노베이션은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정작 유물을 관리하고 감시할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는 소홀했다. 이는 수석 큐레이터가 소장품 2,000여 점을 유출한 전대미문의 도난 사건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물리적 인프라에만 치중된 자금 운용이 박물관 운영의 핵심인 보안과 관리 체계의 공백을 불러온 결과다.
공공 미술관의 본질은 화려한 외형이 아닌, 그 안에서 작품을 연구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전문가들의 역량에 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인건비를 단순한 소모성 비용이 아닌 ‘미래를 위한 핵심 자산’으로 재정의하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기금 조성 시 인력 감축을 재정 건전성의 지표로 삼지 않도록 인적자본의 보존원칙을 제도화하고, 대규모 건축 기부금의 일정 비율을 인력 유지비로 의무화 하는 운영비 할당제(Operational Surcharge) 도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