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가. 이대로 살다 죽으면 억울 할것도 같고 좀, 영광을 누리다 죽어야겠는데 그 영광을 도모지 모르겠거든. 여보소, 철학자! 좀 가르쳐주어요.”

젊은 철학자 조요한(1926-2002)에게 보내진 김환기(1913-74)의 편지(1964.2.16) 속에는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63.9.28-12.22) 이후 거주지를 뉴욕으로 옮기면서 당시 김환기가 느끼고 있던 기대와 불안, 그리움이 담겨있다. 김환기는 어떤 이유로 그를 애정하였을까. “편리한 것을 찾고 편리하게 살자면 예술도 편리한 생산방법이 있겠는데, 미국에 요새 청년 예술가들은 모두가 이것을 연구 중에 있나봐. 연구해낸 청년들도 있고. 나도 자칫하다간 타락하겠어.” 그가 이어서 보낸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세상의 흐름 속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자신 내면의 경계음과 공명할 상대로 조요한을 떠올린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조요한, 『예술철학』, 1973, 법문사, 23×16cm, 346쪽


지난 3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2026)가 타계했다. 그의 비보가 전해지자마자 국내외 언론은 그의 삶과 학문을 기리는 분석들을 쏟아내었다. 한 철학자의 죽음이 이토록 뜨거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가 평생을 두고 고뇌하며 내놓았던 ‘철학적 사유’가 인공지능과 자본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2026년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토론하여 공적 의견을 형성하는 민주주의의 공간, 공론장(Public Sphere)의 회복을 주창했다. 그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한 확장과 대중매체의 상업화, 그리고 교묘해진 정치·경제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오늘날의 토론은 ‘소비와 홍보’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버마스가 마지막까지 강조했던 것은 이 흐름을 타개하기 위한 ‘이성적 대화’였다. 그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비판적 사유가 오가는 공론장에서 찾았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사유가 정치와 경제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 그 공론장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는 무엇인가. 그 답은 개인의 ‘양심’일 것이다.

한국 미학·미술사에서 이러한 사유의 모범을 몸소 보인 대표 인물은 앞서 언급한 조요한 선생이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미학과 예술철학을 강의하며 수많은 예술가에게 사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조요한은 단순히 상아탑에 갇힌 이론가가 아니었다. 1980년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리며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던 그의 결단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학자로서 평생을 다듬어온 ‘정직한 사유’의 필연적 결과였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자가 외부의 부조리를 묵과할 수 없다는, 미학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의 학문적 성취를 상징하는 저서 『예술철학』(1973)은 한국 미학의 불모지를 일궈낸 기념비적인 이정표다. 선생은 이 책에서 서구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기술 미학을 폭 넓게 다루면서도, ‘한국 조형미의 성격’을 별도의 장으로 구성하여 우리 미의 특수성을 정립하려 분투했다. 그는 생전 마지막 저서인 『한국미의 조명』(1999)을 통해서는 한국미를‘비균제성’과 ‘자연순응성’으로 정의했다. 그러면서도 후학들이 비교문화 연구 방식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이어가길 당부하였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는 《조요한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5.7-6.26)을 기획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생애를 회고하는 자리가 아니다. 조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가 표상했던 시대정신과 학문의 궤적을 아우르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논의할 수 있는 사유의 장을 열고자 함이다. 그가 동참했던 1980년의 시국선언문은 전쟁이라는 힘의 논리가 가시화된 세상 속에서‘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확신해야 할 것들에 대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늘의 난국은 국민의 자발적 합의와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만 극복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이 정당한 요구가 외면되고 강권정치가 계속 자행된다면 과도정권은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