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흘러 내리는 정원

   

이선영(미술평론가)

   

결혼 후 2013년 네덜란드로 이주해서 한국을 오가며 활동을 이어온 박유진의 작품은 원색을 넘어 야광이 감도는 화려한 색의 향연이 특징이다. 예쁜 색일수록 아껴 써야 하지만 그러한 금기는 위반된다. 한도를 초과하는 색은 억압의 사슬을 풀고 폭주하지만 혼란은 없다. 작년 8월 귀국한 그는 이번 전시 작품의 반 정도는 한국에서 반은 네덜란드에서 작업했다. 한국의 화창한 날씨와 대조되는 네덜란드 기후는 그의 풍경과 다르다. 단지 기후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맞딱뜨여야 했던 타지에서의 타자적 상황이 음울한 기운을 더했을 것이다. 그가 유토피아적 풍경으로 그려낸 치유적 장면은 그만큼 반작용의 힘이 컸다. [블레이드 러너]를 비롯한 SF 영화에서 디스토피아 분위기를 강조할 때, 주구장창 비가 내리거나 짙은 안개에 잠긴 미래도시가 자주 나타나는 점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는 학창 시절 교환학생으로 갔던 햇살 좋은 프랑스에서의 작업 환경을 떠올리며 노란색 꽃만 봐도 감동했던 경험을 말한다. 




It's a fluid sunny day, acrylic on canvas, 420x 170cm, 2025



삼십대 중반이 되어 새로이 뿌리내려야 했던 네덜란드의 연중 기후를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받는 인상과 비교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긴 겨울과 잦은 비, 절제된 색감의 풍경은 초기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두운 하늘과 짧은 낮은 화면의 분위기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붓을 놀렸다. 그림 그릴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가다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의 작업은 치열했다. 씨름 선수처럼 상대의 힘을 이용한 전술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겁지는 않았다. 삶의 중력이 자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만큼 비상(飛翔)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이미지가 빛을 품은 비다. 식물이 자리하는 아래로 내리꽂히는 묵직한 빗줄기에서 불현듯 빛의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때 색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작가는 색을 ‘감정을 회복하는 도구로 인식하게’ 되었다. 박유진의 색은 빛을 품고 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빛을 선택했다. 유동적 형태와 색으로 발광(發光)하는 화면에서 광기(發狂)까지도 느껴지는 것은 색의 물결과 식물의 조합이 가지는 하위문화(subculture)적 특성 때문이다. 마이클 조던의 [초록덮개]에 의하면, 옛날부터 샤먼들은 특정 식물을 이용해 무아지경에 이르곤 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천상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었고, 비의적인 지식 덕택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과 예지력을 지니게 됐다’(마이클 조던). 박유진이 ‘플루이드 선샤인(Fluid Sunshine)’이라 명명한 개념에는 ‘비처럼 흐르지만 햇빛의 색을 머금은 빛의 이미지, 노랑과 분홍, 파랑으로 반짝이는 물방울은 우울한 기후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환상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박유진의 작품은 무아지경은 아니며, ‘건강을 위해 행복해지기로 결정’했던 볼떼르의 이성적 거리감을 유지한다. 계몽주의(Enlightenment) 사상가 볼떼르의 교훈은 ‘빛’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물론 박유진의 작품에서 빛이 펼쳐지는 방식은 계몽주의와 달리 자유분방하다. 그의 작품은 원초적이거나 현대적이며, 그 둘이기도 하다. 원시와 현대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 한가운데서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해 애썼던 20세기 중후반의 문화혁명은 억압된 것을 풀어헤치고, 유토피아를 추구하려는 모든 욕망에서 다시 싹트고 꽃핀다. 그것이 단지 정신의 확장이나 중독을 넘어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문화를 뛰어넘는 예술적 차원이 필요하다. 그래도 기저에 흐르는 욕망은 비슷하다. 포장이 되지 않은 질척한 길을 무겁게 걸었을 농부의 낡은 신발을 그리기도 했던 반 고흐가 만들어 낸 찬란한 해바라기나 태양, 별빛 또한 그가 처한 상황에의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Everything will grow here again, 130x160cm, arcylic on canvas,2025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에서 본격 모더니즘의 경전적 작품 중의 하나인 반 고흐의 [농사꾼의 신발]을 매개로 근대미술의 유토피아적 동기를 설득력있게 묘사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가난한 농부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낡은 신발은 가장 잔인하며 험악하며 원시적이고 주변화된 상태로 전락한 세계로 파악된다. 하지만 반 고흐는 시골 마을의 상투적 사물들을 환각적인 표면색으로 폭발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우중충한 농촌의 대상 세계를 의도적이고 격렬한 변형에 의해 유화물감의 순수 색으로 찬란하게 구체화한 것은 유토피아적 태도로 이해되어야’(프레드릭 제임슨)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 논문에서 농부의 신발과 앤디 와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을 비교하면서 자본주의(모더니즘)과 후기자본주의문화(포스트모더니즘)를 비교했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칙칙하고 우울한 주변을 극적으로 변신시켰던 박유진의 미적 태도는 모더니즘적이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반고흐의 구두가 대지와 밀착한 묵직한 존재론적 차원을 가진다면, 21세기 화가의 유토피아적 몸짓은 존재론적 뿌리를 내리고는 싶은, 요컨대 아직은 아닌 또는 영원히 아닌 욕망의 흐름이 강조된다. 박유진의 최근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나리는 중간대목을 잘라 나누어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나무와도 같은 수목 모델이 아니라 리좀같은 모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미나리의 뿌리는 깊지 않아도 재생산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반고흐와 비교된) 앤디 와홀처럼, 상품 세계에 고착된 물신적 자세 대신에 자연에 눈을 돌린다. 물론 원초적 자연은 아니다. 네덜란드에 가기 전 한국에서 발표된 작품처럼 야생(숲)과 인공(밭)의 중간인 정원에 가깝다. 작품 [Is spring coming?](2023)은 우울한 사각형 안의 집과 그 집에서 꿈꾸었을 화창함을 그림 안의 그림같은 구조로 표현한다. 난색과 한색, 명도의 차이는 두 공간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말해준다. 


하지만 바깥의 환한 기운은 그늘진 영역을 사정없이 관통하고 있으며, 지상에 넘실대는 빛의 물결은 묵직한 사각형을 바닥으로부터 떼어내 둥 띄운다. ‘매일 내리는 비를 원망하기보다, 나는 스스로 흐르는 햇빛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는 작가에게 작업은 그자체로 긍정적 변화의 시작을 말한다. 나무 줄기는 춤을 추듯 풍요로운 환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만, 실루엣으로만 표현되어 있어 작가의 요구가 투사된 상상의 장면임을 말한다. 화면 구성에서도 상반되는 두 방향이 공존한다. 아래를 향하는 비와 위로 열린 깔대기 모양의 조합이 그것이다. 상승의 기운을 품은 깔대기는 풍요롭되 넘치지는 말아야 할 순환의 장치다. 나무와 풀이 빛을 향해 가지를 힘껏 펼치듯이 깔대기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식물처럼 수직적으로 배치된다. 조르주 나타프는 [상징 기호 표지]에서 수직성의 이미지는 인간의 올라서기, 즉 초월의 꿈에 직접 연관되며, 더 나아가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영적 비상으로 연장된다고 하면서, 창세기의 야곱의 환상에 나오는 사다리의 예를 들기도 한다. 



Is spring coming?, 60x45cm, acrylic on canvas, 2023



식물은 비상하고자 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땅에 뿌리를 내린다. 식물과 깔대기는 서로를 반향한다. 작품 [Everything will grow here again](2025)에 여기저기 배치된 깔대기는 하강과 상승의 기운이 낳는 사랑의 결실이 있다. 용수철처럼 꼬불꼬불한 형상들 또한 접혀있던 만큼 펼쳐질 힘을 나타낸다. 작품 속 하트나 주름이 많이 잡힌 부드러운 형상들에는 무엇인가로 펼쳐질 수 있는 잠재 에너지다. 성체로 자라날 씨앗이나 배아처럼 작업의 발상 또한 접혀지고 펼쳐지기를 반복한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유토피아적 동기는 한갓된 가상이나 기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가지는 치유적 역할을 본인에게나 네덜란드의 관객에게나 어느 정도 ‘입증’된 상황이어서 작가는 이번 귀국전에서 자신감 있게 색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네덜란드 전시에서의 프로젝트인 [roots between us]에서 그는 방문 관객에게 미나리의 마디를 분양했다. 전시 기간 중 117명이 (심을 수 있는 형태의)미나리를 가져갔다.


그것은 박유진이 파독 광부에게 분양받아 키워낸 미나리와 같은 맥락에 있다. 타지에서 뿌리내리려는 타자들 간의 연대가 그것이다. 스스로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 그린 그림이 타인들과 연결된 점이 더 큰 기쁨이자 치유였다. 한국에서의 전시에서도 미나리 뿌리를 나누어 주는 프로젝트가 실행됐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 여성들에게 건네지는 미나리는 고향에서 떠나온 그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바란다. 미나리 프로젝트는 ‘개인적 치유에서 출발해 타인과 연결되며, 함께 뿌리내리는 가능성을 제안한다’ 머무르지 않고 이 땅 위에 단단히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물론 맛있는 채소 중의 하나인 미나리는 먹을 수도 있다. 치유의 메시지는 단지 이성적이지 않고 몸에 호소한다.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몸이며, 영혼은 몸과 밀접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은 이 근본적인 진실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 빛을 품은 비의 세례를 받은 식물들은 충만한 기운을 받는다. 


미나리와 나무 등의 식물은 빛과 물이 있어야 뿌리내리고 자라며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을 비롯한 다른 생물들에게 풍요로운 생태계를 제공할 수 있다. 이전부터 식물이나 정원을 작품에 표현해 왔던 박유진은 스스로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이주민이 되자, 식물에 성공적인 정착에 대한 의식을 투사하게 됐다. 그의 작품 곳곳에 심어져 있는 미나리가 대표적이다. 나무 또한 마찬가지 맥락이지만, 그림 속 나무는 대개 화면 가장자리에서 기둥처럼 화면을 받쳐주고, 풀은 대지와 밀착하여 양분과 수분의 복합체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작품 속 식물에 대한 작가의 상상은 임신 후 고국의 나물이 먹고 싶었던 일차적 욕구와 관련된다. 지천에 흔하던 것과 단절된 작가에게 ‘그밥에 그나물’이라는 한국식 반찬 투정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을까. 그것은 사회적 요구와 정신적 욕망 이전의 생물학적이고 원초적 단계에 뿌리내린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덮개]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꽃가루의 예를 들면서 인간이 식물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죽은 자의 재생을 기원하며 꽃을 놓은 것이다. 약초도 고갈된 심신을 회복시킨다. 마이클 조던은 인류는 특정한 식물들이 우리를 육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 체력을 크게 증가시키는 능력,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초창기부터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에서 생명과 출산을 담당한 신, 즉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자 하늘의 여왕이 신성한 나무로 상징된다. 그 신화는 고대인들이 겨울과 긴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 일어나는 자연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초기 사회들이 땅으로 내리꽂히는 비를 받아들임으로서 거룩한 임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고, 초목의 신이 폭풍과 천둥의 신이기도 한 사례를 보여준다. 


자크 브로스가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말하듯이 생명의 에너지는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온다. 빛을 잡아내는 존재가 바로 식물이다. ‘광합성 작용 덕택에 창조의 모든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자크 브로스) 식물적 소재나 기상적 이미지는 신화나 생리심리적 변화과정에 의거한 종교나 유사종교적인 충만의 차원으로 확장되지만, 그리기라는 구체적 과정에도 내재한다. 가령 물감을 묻힌 붓 자체가 빛(색)과 물의 결합 아닌가. ‘풍경처럼 나타나는 그의 작품 속 식물들은 아름답게 나타나지만, 관상용은 아니다. 미나리는 겉으로만 보면 잡초와 다를 바가 없다. 농사꾼에게 벼 사이의 미나리는 잡초로 간주된다. 미나리라는 소재에는 네덜란드로 가기 전 한국에서의 전시에서 엉겅퀴같은 ‘잡초’에 가까운 꽃에서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본 것과 같은 역설적 조합이 발견된다. 나무 또한 신단수같은 위용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화면 속 그 위치도 중심은 아니다. 빛과 비 그리고 식물의 조합은 대지를 풍요롭게 적시는 고영양 물질(빛과 물이 생장에 필수라는 의미에서)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같은 인류학적 상상과 만난다.


이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감성이 투사된 것이라 생각된다. 전시의 일부로 미나리를 분양하는 자신을 미나리 엄마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의 작품 또한 키운다. 식물들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심어지고 가꾸어진다. 발색을 위해서 밑색부터 여러 겹 칠해져야 하는 과정은 손이 많이 가는 정원술의 노력과 비교됐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경건한 식목은 자연과 시간이 보다 나은 것을 위해 힘을 결합하는 두 가지 규칙의 활동이라고 평가하면서, 정적이면서도 정적이지 않은 나무는 영상의 무한성이 솟아나게 한다고 말한다. ‘나무와 정신은 무한정 자라난다. 중심과 뿌리로 자신들을 튼튼하게 한다’(로베르 뒤마).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풍경화는 아니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의 풍경이나 유럽의 풍경이 합쳐져 미지의 시공간이 열린다. 대개 한국에서는 유럽이 유럽에서는 한국이 그립다. 풍토가 다른 여기와 저기를 넘나들며 사는 삶이 스며든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차분한 풍경 위에 더해진 밝고 환상적인 색채는 기억 속 한국의 산과 억새, 굽이진 길과 겹쳐지며 또 하나의 새로운 자연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빛과 물이 그렇듯이 원소적 표현이 나타난다. 하늘에 해당되는 영역은 푸른 공기의 입자들의 배치로 빼곡하다. 원소적 차원의 표현은 순발력 있는 변환을 위한 전제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를 포함하는 변모(metamorphosis)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아닌 과정이 되어야 한다. 정확한 재현으로 귀결될 물질은 변환을 기대하기에 너무 무겁다. 작품 [Everything will grow here again]에서 푸른 하늘을 채우는 원소들 내부에는 빛-비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 박유진이 ‘플루이드 선샤인(Fluid Sunshine)’이라 명명한 개념에는 어둠을 밝게, 무거움을 유동적으로 딱딱함을 부드럽게 하려는 지향이 있으며, ‘부드러운 것이 세상을 강하게 하듯이’라는 이번 전시 부제에 집약돼 있다. 


출전; GALLERY THE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