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으로 도약하기 위한 수많은 우연들

 

이선영(미술평론가)

  


한 배(胚)에서 태어난 수많은 알 중에서 어느 것이 성체가 되어 자신이 떠나온 강으로 알을 낳으러 되돌아올지는 우연이다. 하지만 개체의 유전자를 후대에 잇기 위해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고 지구의 자기장을 이용하여 자신이 자라난 바다를 다시 떠나 강으로 귀향하는 연어의 여정은 필연이다. 자연에는 필연으로 도약하기 위한 수많은 우연들로 가득하다. 자연의 보편적 원리는 예술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연적 필연’이라는 개념으로 작업해왔던 이경희는 이번 전시의 작품을 보면서 자연을 떠올렸던 것은 유체적 움직임과 화려한 색깔, 그리고 성공률을 보장하지 못하는 수많은 실험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억과 공(空), 그리고 잔여(residual)로 가지치기 되는 시리즈를 출품했다. 이번 전시는 2024년부터 올해까지 한 작품들로 채워졌으며, 2016년 이후 2년마다 신작을 발표해 온 연장선 상에 있다. 정작 전시 한 달 전후에는 쉰다는 그의 패턴은 강도 높은 작업에서 삶을 어느 정도 보호하려는 태도로 여겨진다. 



우연적 필연24114-void(111-73.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4


그의 작품에는 몇가지 층위가 정교하게 결합 돼 있다. 목판화, 그리고 종이에서 풀어헤쳐진 먹과 물감의 흐름이 그것이며, 마치 필름이 편집되는 영화처럼 모두 다른 평면에서 온 것들이 한 화면에서 만난다. 서로 다른 층위의 시공간이 우연과 필연의 모든 수를 동원해 만났을 때의 효과다. 우연적 필연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리기보다는 꼴라주가 더 적당하다. 그려졌다기보다는 만들어진 이경희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경이로움이 있다.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지주인 앙드레 브르통은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읽고 깨어있는 상태의 빈약함을 꿈의 풍요로움과 대치시켰다.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일종의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는 브르통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가능과 전달불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이다. 


이경희는 거기에다 생성과 소멸, 또는 창조와 파괴를 덧붙였다. 그의 ‘우연적 필연’에는 꼴라주의 방식을 포함한다. 그 또한 초현실주의의 주요 발명이다. 그 전에 입체파의 실험이 있었지만, 입체파의 꼴라주는 궁극적으로 추상을 향한 화면 내의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와는 다른 경로로 현대미술에 기여한다. 이경희에게 형식은 무엇을 더 효과적으로 말하기 위한 것이지 형식적 자율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팽팽한 캔버스를 볼 때의 불편함, 그림을 꼭 그려야만 하나하는 문제의식이 낳은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먹의 번짐과 우드엔그레이빙, 그리고 에브루 마블링의 화려한 색감이 만난다. 밀도는 있지만 작은 화면이 한계인 목판을 현대회화로 만들기 위해 엔그레이빙을 커팅해서 전체 화면 속에 꼴라주한다. 91년부터 독학으로 체득한 목판은 뷰런이나 니들로 파낸 볼록판을 잉크로 찍는다. 



우연적 필연24115-void(108-7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4



우연적 필연24116-void(100.5-72)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4


‘조각칼 끝으로 석고덩이를 깎아 형태를 드러내듯, 나는 먹이 번져 있는 넓은 장지 위를 커터 칼 끝으로 조각하듯 형상을 드러낸다. 먹 번진 한지에서 원하는 이미지의 형상이 드러내면 그 위로 에브루 색이 스며든다...먹 번짐은 내면의 불안과 감정의 흐름을 드러내고, 화려한 색채와 꽃의 이미지는 외부로 표출되는 욕망을 상징한다. 또한 우드인그레이빙의 섬세한 선은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견고하게 지탱하며 화면 전체에 긴장과 균형을 부여한다’고 각 작업의 의미를 설명한다. 먹번짐에서 색마블링 그리고 목판화는 우연적 필연을 통해 연결된다. 목판화에서 먹번짐 쪽으로 갈수록 엔트로피는 높아진다. 풀리고 조이고, 펼치고 접혀지는 역학이 정지된 매체에 잠재적 움직임을 준다. 작품에 내재된 동감은 작품 간에도 해당되는데, 그것은 작품 크기와 비율이 같은 경우에 더욱 그렇다. 요컨대 평면들을 나란히 두고 보면 동영상같은 효과가 있다. 


움직임은 또한 서사이다. 여러 이질적인 것들을 한데 모은 풍경같은 분위기가 있지만, 동양화나 산수화는 아니다. 그는 종이에 번지는 먹의 물성만을 선택한다. 하지만 동양적 세계관은 공유한다. ‘나의 작업은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욕망, 미와 추, 가벼움과 무거움과 같은 상반된 구조를 이분법적 시각이 아닌 연기법에 기반을 둔 동양적 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가 가진 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공(空)의 세계를 추구한다...’ 종이에 고착된 먹의 흐름을 선택하는 것은 의식이다.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번짐에서 이미지를 발굴하는 것이 시작이다. 번진 부분을 살려 커팅하기 위해 예민한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붙이기 작업만 며칠이 걸리며 집중하지 않으면 선이 틀어지기에 오차가 나지 않으려면 감각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려 붙이기가 아닌 쳐내며 뜯어내듯 하는 작업은 무의식을 들어내는 것과 같다. 



우연적 필연24120-void(60-50)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4



우연적 필연25130-void, (106-72)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5


무의식과 우연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작업의 모든 과정에 섬세함과 예민함이 필수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우연과 우연을 만나게 하고 거기에서 해석으로 이어질 형상을 만드는 과정이 필연이다. 작업은 의식과 무의식, 우연과 필연의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에 머물며 그것들을 관조하고, 기억의 조각들을 즉흥적이고 해학적이며 은유적인 형상으로 풀어낸다...’ 그렇게 해서 산등성이의 나무 실루엣과 맞닿은 하늘같은 풍경이 건져진다. 자연은 이미 환상적으로 번진 듯한 형태를 사실주의로 품고 있다. 경계에서 활성화되는 그의 작품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이질적인 부분이 공존한다. 아무리 정교하게 합성해도 풀과 칼은 붓보다 간극을 더 노출시킨다. 여백으로 간주되는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선들 조차 그려진 것이 아니다. 언뜻 전체를 그렸다고 생각할 만큼 이음매가 감쪽같다. 그릴 수도 있을 것은 붙이는 것은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의 장을 열어놓기 위해서다. 


다른 층위의 평면이 결합될 때 선적 인과론이 단절되고 도약하며, 그 간극에서 무의식적 과정이 활성화된다. 그것은 제작뿐 아니라 해석적 차원에서도 그렇다. 기법을 달리하는 여러 형식의 조형적 언어들이 접합되는 장은 유희적이다. 작가는 사각형 종이에 펼쳐놓고 (그리기가 아닌) 만들기를 통해 그 안에서 논다고 말한다. ‘꽃이 됐다가 산이됐다가, 그안에서 뛰어 논다...’ 그의 유희는 그만의 노하우가 쌓인 정교한 기법이 동원되는 깊은 몰입의 장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진입장벽이 있지만, 어느 부분은 작가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작품이 자기 스스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작품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작가지만 그 과정에 많은 변수가 있으며, 작가는 이 변수를 임의성이 아닌 다양함으로 승화하기 위한 여러겹의 장치를 마련한다. 우연적 필연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의 공존은 나의 역설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대변되는 근대적 이념은 사고와 존재의 연결이 그다지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해 도전받는다, 


나는 자명한 듯 하지만 그 또한 발견되어야 하는 미지의 영역이며, 예술은 이 양자의 가치가 충돌하고 만나는 장(場)이다. 이경희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밀로의 비너스의 원재료인 대리석은 입자적 차원으로 분해되었지만, 대개 실루엣은 유지되면서 입자가 움직이는 기준이 된다. 후세에 발굴된 비너스 상은 완벽한 형태가 아니어서 잃어버린 부분에 대한 미완의 서사가 잠재해 있다. 그래도 워낙 유명한 도상이기에 입시용 모형에 전형적인 특정 상징으로 고착된다. 그의 작품은 이 기준을 여러 식으로 위반하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작품 속 비너스는 여러 자세를 하고 있으며, 실루엣 내부는 청량한 바람부터 매캐한 연기까지 여러 계열로 해석되는 유동적 원소로 가득하다. 브라운 운동을 하며 퍼지는 기체의 입자들은 미의 상징을 녹여내며 그 잔여물들은 구물구물 다른 차원으로 변형되는 중이다. 직선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 작품에서 부드러운 첨단은 무엇으로도 바뀔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 



우연적 필연25140-void(50-50)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5


존재는 되기로, 상징은 그 중심을 잃고 끝없는 해석의 과정으로 변화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욕망을 상징해온 비너스 상은 어디서 시작돼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연기같은 물질로 채워진다.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불쑥 다시 나타나며 이어지는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은 욕망을 닮아있다. 욕망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 조건이다. 그의 작품에서 욕망의 주체나 원인, 목적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한 작품 내에서, 그리고 여러 작품들 사이에서 욕망이 끝없이 변신하면서 이동하는 것은 확실하다. 욕망은 이른바 유목을 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외디푸스]에서 욕망이란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욕망은 자기가 합류하는 온갖 성질의 진동들과 흐름들을 대상으로 한다. 욕망은 항상 유목하며 이동한다...과정의 강제된 정지, 혹은 과정의 공전의 계속 혹은 과정이 억지로 목적으로 여겨지는 방식은 거부된다’(들뢰즈와 가타리). 


이경희의 작품에서 욕망의 흐름은 끝없는 물욕으로도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도 나타난다. 파괴로도 창조로도 나타난다. 붙잡을 수 없지만 존재를 가득 채우며 그 형상을 규정하는 강력한 흐름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된 결과다. 물과 먹이 만나 종이에 고착된 무작위적인 형상을 선택하고 칼로 떠내어 적절한 위치에 붙이는 작업은 미의식과 손의 기술이 총동원된 의식적 작업이다. ‘1mm의 흔들림도 허락되지 않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세필로 명암을 얹고 손의 마무리가 더해질 때, 잘려지고 겹쳐진 시간과 감각은 하나의 화면으로 조용히 필연으로 완결된다...나에게 드로잉은 그리는 행위가 아니다....선을 긋는 대신, 형태와 형태 사이의 경계를 드러낸다.,,’ 최근 작업은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면서 폭격기나 명품 등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도상을 삽입하여 의미의 방향타를 제시한다. 심리테스트 얼룩처럼 무작위적인 얼룩이 선택된 조형적 요소는 여러 상상으로 가지를 친다. 



우연적 필연25131-void, (109-78.6)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5



우연적 필연25141-void(154-10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5, 


하지만 무한이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개방은 죽음이자 무의미이고 우연 그자체에 불과하다. 그가 선택한 이런저런 얼룩들은 무의미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의미있는 형태가 되기 위해 움직인다. 덩굴식물의 여린 순이 그때그때 직면하는 벽을 타고 더듬더듬하면서 나아갈 길을 찾듯이 말이다. 명확한 대상이 나타나는 경우 욕망의 문제가 개인이 아닌 집단에도 관통되고 정치집단이나 시장의 지배적 논리에도 작동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남이 원하지 않으면 나도 원하지 않는 원리가 물신주의를 떠받치며 이는 풍요 속의 결핍을 야기하여 경쟁과 전쟁을 추동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미를 상징해온 전통적 도상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크고 작은 욕망에 얼룩져 기괴하게 변신한다. 하지만 비너스는 작가에게 여전한 수호신으로 어떤 변신이냐에 따라 다양한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우연적 필연-void]라는 제목은 연기처럼 출몰하며 변모되는 이미지의 속성을 표현한다. 


비너스 형상 안팎의 여백같은 빈 공간은 움직임의 자리가 된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처럼 우연과 빈 공간은 서로를 지탱하며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인 전경의 배경이 없음은 재현의 체계를 취약하게 한다. 외발로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모습의 비너스가 등장하는 [우연적 필연25141-void]은 전쟁의 폐허를 드러낸다. 이 시리즈에서 비너스의 움직임은 다양하다.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도 하고 몸 가득히 피어오른 욕망의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기도 하며, 바닥으로 스러져 가기도 한다. 꼴라주 특유의 일회적 만남은 명확하든 아니든 화면의 축(좌표)을 요구한다.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비너스 상을 그러한 축으로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작품 [우연적 필연24116-void]에서 머리 부분의 밀도가 높고 하체 부분에 무게 중심을 주는 것은 인체라는 기준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변신의 바탕이 되는 비너스는 여성의 몸을 입고 있으며, 그 몸은 대상이 아닌 풍경(bodyscape)을 이루고, 다형적 성(polymorphous sexuality)을 가진다. 



우연적 필연25142-void(154-10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5, 



우연적 필연26150-조각난 기억들(110-79)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남성이라는 하나의 성을 기준으로 여성은 부재나 상처로 정의한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문화 담론은 여성의 성에 가해진 부정적 해석을 긍정으로 전환한다. 여성은 이원항의 반쪽이 아니며 하나와 둘을 넘어 다중심을 향한다. 여성의 몸 안팎에서 펼쳐지는 정처 없는 선들의 유희는 새로이 정립되는 여성성과 관련된다. 작품 [우연적 필연24120-void]에서 몸속 기관들은 그보다 하부구조로 표현되고 미시세계를 이루는 세포나 체액의 움직임이 전면화된다. 가느다란 신경망들을 들어내는 외과의사같은 관점은 유기체적인 몸과 기관들을 분리시킨다, 유기적 구조를 파열하는 이 움직임은 욕망에 의해 추동되며 극도의 쾌락인 희열부터 죽음에 이르는 광폭의 정동(情動)을 포함한다. 비너스 뒤편의 검은 얼룩은 미시세계와 동일한 구조를 가졌을 우주(거시세계)일 것이다. 여러 차원의 소통을 해 필요한 것은 인체라는 기준이다. 먹과 물감의 배치는 해당 기관 활성화의 지표가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는 유일의 주체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욕망 자체라고 말한다. ‘이 욕망은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을 작동시키고 연결들과 점유들을 따라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의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의하여 채취하고 절단하며 한 신체로부터 다른 한 신체로 옮아간다. 그리고 이때 연결들과 점유들은 소유자 혹은 점유자인 자아의 가짜 통일을 언제나 파괴하는 것이다.,,욕망하는 기계들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바로 이 힘에 의하여 그것들은 많은 구조들을 동시에 횡단하고 지배하는 기계가 된다. 기계는 연속체의 힘으로 어떤 부품이 다른 부품을 연결시킨다. 다른 하나는 방향의 급변이다.’(들뢰즈와 가타리) 여러 층위가 꼴라주 되는 이경희의 작품이 작동 방식은 욕망처럼 예기치 못한 연결망들로 이어진다. 먹과 물감, 목판의 일부는 다른 밀도와 강도를 가지지만 상호보완적으로 욕망의 향방을 나타낸다.



우연적 필연26153-조각난 기억들(170-140)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우연적 필연26154-residual (89-6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작품 [우연적 필연25140-void]에서 비너스는 관객에게 입을 벌리고 말을 거는 듯하다. 말하는 존재가 바로 욕망의 존재이며 주체는 이 말의 조건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마단 사럽은 [알기 쉬운 자끄 라캉]에서 전통적으로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로 간주되어 왔으며 주체가 말을 할 때 자신이 행하는 바를 완전히 인식하는 그 주체에 의해 터득된다고 생각되어져 왔지만, 라캉의 언어관은 말하는 주체의 통어력의 결여에 중심을 둔다고 지적한다. ‘주체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전유한다. 라캉은 의사소통이란 정신에서 정신으로의 개념의 이동이라는 생각, 즉 개념에 의미를 이미 분명하게 낙인찍은 징표의 교환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마단 사럽) 현대 언어학에서는 주체보다 언어가 앞서며, 언어는 지시대상과 기호, 기표와 기의로 분열되어 있다. 구조적 사고는 인간중심주의를 상대화한다. 이는 인류학부터 정신분석학에 이르기까지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대부분의 영역에 공통적이다. 


작가가 정한 구조적 단위의 이런저런 조합적 실험을 통해 우연적 만남을 주선하는 이경희의 작품은 개인을 표현하거나 대상을 재현하는 식의 이전 미학의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이전의 미학은 의미의 필연성을 확신한다. 욕망은 이러한 확신을 교란한다. 이성과 의식이 욕망과 무의식으로 중심이 이동할 때 우연의 역할은 커진다. 말을 하는 자와 말이 향하는 자를 규정하는 것은 욕망이다. 하고 싶은 말만하고 듣고싶은 말만 듣는 소통의 불완전성을 정신분석-언어적 이론이 아닌 일상에서도 체험한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스마트 기기의 사용이 더 길어질수록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되는 현대문화는 그만큼 유아론을 부추킨다. 확실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입돼 있다. 이경희의 작품에서 비너스의 얼굴 부분과 달리, 가슴 부분은 목판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이미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적 존재에게 선명한 머리와 가슴 사이의 분열이다. 



우연적 필연26155-residual  (89-6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우연적 필연26156-residual (89-6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작품 [우연적 필연26154-residual]에서 비너스라는 약정적 기준은 거의 사라지고 잔여물만 있으며 폭발적인 움직임 만이 화면을 종횡으로 가로지른다. 같은 시리즈의 작품에서 머리 부분을 차지하던 색의 흐름이 이탈하면서 비너스의 목은 사라진다. 작품 [우연적 필연26156-residual]에서 얼룩의 흐름 안에 치마를 입은 듯한 소녀의 실루엣은 안팎이 뒤집힌 모습 아닐까. 욕망은 그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기 마련이다. 전투기나 명품 등이 등장하는 작품은 욕망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보다 구체화한다. 작가는 폭력도 욕망이라고 본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특징이다. ‘돈과 권력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상하 구조, 가정 폭력, 전쟁 등...이러한 폭력은 인간의 내면을 억압하며 불안, 두려움, 공포를 야기한다...’ 폭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실제의 전쟁은 분명 공포지만, 공포만큼이나 실체가 불분명한 일상의 불안 또한 크다. 


정신분석학은 명확한 대상이 없는 공포를 불안이라고 정의한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실체 없는 불안이다. 현대 소비사회는 개인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강박적 행동을 소비로 몰아간다. 국가간 전쟁은 종교나 민족 등 여러 핑곗거리로 꾸며져 있지만, 생산력의 경쟁으로부터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파괴는 승자에게 경제적 도약의 기회를 준다. 작품 [우연적 필연24114-void]에서 비너스 머리 부분의 색채는 미의식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듯하다. 몸 내부에 기기묘묘한 산수를 품고 있는 미의 여신을 향하는 전투기들이 불안감을 자아낸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선제적 폭력을 낳는다. 보기 싫은 상대를 싹 쓸어버리려는 독재자의 의지 또한 나름의 심미적 충동이 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얼치기 화가였던 히틀러였다. 전쟁은 국민 다수를 설득시켜야 하며 그때 작동되는 이데올로기는 집단 이기주의에 편승하고 강화한다. 



우연적 필연26157-residual (89-65)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우연적 필연26158-residual (91-62)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작품 [우연적 필연25130-void]에서 폭격기는 유기체적 형상을 공격하는 구조화된 힘이다. 환희가 아니라 죽음으로 파열되는 몸의 경계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중첩된다. 동양화는 아니지만 그 기본 매체인 장지와 먹을 활용하는 그의 작업은 순환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순환은 단선적 사고의 종말적 비전과 달리 보다 유연하다. 순환이기에 굳이 하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단순한 낙관도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품는 호환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면 비극이 더 많은 현실에 위안과 치유가 가능하다. 폐허에도 희망은 있다. 작가는 고통 속에 희망을 생각한다. 작품 [우연적 필연24115-void]에서 이미 한번 이상은 폭격당한 듯 허리춤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죽음의 연기는 찬란한 삶의 색을 재의 색으로 만든다. 작품 [우연적 필연25131-void]에서 비너스의 복부는 검은 연기가 가득하다. 비너스 머리의 붉은 색감은 소리없는 매체인 평면 작품에서 굉음과 비명을 메아리치게 한다. 


작가는 이전에는 내면의 탐구에 집중했다면 점차 기억이나 현실로 눈을 옮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즘 작품에는 전쟁과 상품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특정 상표명을 노출시킨 작품 [우연적 필연26157-residual]은 작가가 막연한 욕망이 아닌 소비사회의 욕망을 포함함을 알려준다. 이 시리즈에서 명품은 무한한 욕망을 담아내고 뿜어내는 마술의 램프이다. 이른바 명품백을 들고 있는 [우연적 필연26158-residual]에서 비너스의 사라져 버린 한쪽 팔은 누군가에게 이익(돈, 만족)을 주는 확실한 무엇을 움켜쥘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작가는 ‘끝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물질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극되지만,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못한 채 내면에 갈증과 불안으로 축적된다’고 말한다. 경쟁은 전쟁과 논리적으로는 연결되지만, 그 사이에 많은 우회로가 있다. 이에 대한 여러 철학적 예술적 해석이 있다. 르네 지라르는 폭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철학자로 마찬가지로 폭력이라는 키워드가 있는 이경희의 작품 해석에 참조점을 제공한다.



우연적 필연26159-residual (60-50)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우연적 필연26160-residual (60-50)cm,우드인그레이빙 먹 콜라주 장지,2026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모든 욕망들 속에는 대상과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3항, 즉 경쟁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경쟁자가 대상을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주체는 그 대상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다. 인류사에 만연했던 폭력의 종교적 기원까지 파고드는 르네 지라르는 현대적 사고가 ‘사회의 기원을 이성, 양식, 상호적 호의, 양해된 이해관계 등에 근거하는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인 사회계약으로’보면서, 폭력의 존재를 무시하지만, 그런만큼 폭력은 횡행한다. 조용한 일상의 전쟁부터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까지 말이다. 르네 지라르가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광란의 경쟁 관계, 즉 같은 가족이나 같은 사회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극단적인 투쟁’은 ‘차이의 소멸 때문에 일어난다’. ‘위기는 인간들을 그들로부터 모든 변별적인 특성, 모든 동질성을 빼앗아버리는 영원한 시련 속으로 던져 넣는다.’(르네 지라르) 


차이의 종말이 낳는 폭력은 ‘변별적 편차들의 체계인 구조’(르네 지라르)에 주목하게 한다. 물론 르네 지라르는 구조 만능주의, 즉 구조로 환원되어 가는 이론에 회의적이지만, 우연과 필연의 관계처럼 구조와 구조 이후는 보완이나 대안의 관계를 가진다. 이경희에게 작품이라는 놀이터는 바로 차이들의 유희에 의해 가능하다. 물론 시장도 차이를 추구한다. 하지만 예술은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다. 차이는 고무되며 억압되지 않는다. 시장은 욕망이라는 불확정적인 실체를 그들이 원하는 이익의 회로 안으로 유입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비너스상에 들러붙었던 물신적 아름다움은 이제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이동되어야 한다. 예술은 불확정적이지만 상품은 확정적이다, 예술에 가까운 상품일수록 기능은 모호해지며 상품에 가까운 예술일수록 시세가 명확하다. 이경희의 작품은 예술 또한 억압할 지배적 질서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필연을 향한 우연의 도약을 실행한다. 


출전; 황창배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