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탑달리기2>, 2025, 장지에 연필, 아크릴, 162×130cm 
바벨탑 같은 구조 안팎을 달리는 비슷한 외양의 사람들은 각자의 시야가 있지만, 
나아가야 할 정확한 좌표가 확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AI가 인간이 하던 일을 점차 대체하는 추세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어느 시대보다 불확실해졌다. 업무로부터 쇼핑에 이르기까지 하루에도 여러 길목에서 몇번씩 AI에게 나를 인증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근대 이래로 계몽의 밝은 빛은 투명 사회를 열었고 인간 또한 그 주체이자 대상이 되었다. 미디어의 역사는 지식을 시공간에 효과적으로 집적하여 소통시켜 왔는데, 이는 인간 지식의 진보임과 동시에 이익을 낳는 사업이기도 했다. 그 어느 때고 이익이 행동의 주요 원인이었지만, 정보화를 통해 초연결사회가 되자 이해관계에 대한 판단 또한 빨라진다. 하지만 신속하게 판단하게 하는 정보 만능주의는 정보의 접근권과 마찬가지로 고르지 않게 작동한다. 투명하지 않은 정보에 대한 대응은 정보 기반 권력을 누수 시키는 것이다. 가령 국가 간 이익의 갈등 때문에 막힌 해로의 봉쇄망을 뚫은 기발한 방법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끈 운항이라고 알려졌다. 

대지는 물론 드넓은 바다와 하늘도 촘촘하게 경계가 나눠지고 관리되는 상황에서, 탈주의 방식은 정보망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깜깜이 전략이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정보혁명은 서퍼나 조타수를 정보의 바다를 자유롭게 횡단하는 비유로 사용하곤 한다. 모든 것이 연결됐다고 말해지는 투명 사회는 그 길이 막히는 순간에야 불투명해진다. 합리화가 예측되는 결과로의 빠른 길이라면 지식의 도구화는 필연이다. AI는 구독료에 따라 정보제공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예술이나 예술에 대한 지식은 어디에 쓸모 있는 것인가. 물신적 체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투입에 비해 많은 이익을 끌어내는 것인가. 문예사조에서 앎에 대한 태도로 크게 대별되는 것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다. 정보를 통해서 타자를 통제하려는 측은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결정적 지점을 자신하며, 이로부터 탈주하려는 측은 완전한 앎에 대한 허구성과 불순함에 반대하여 미지의 영역을 추구한다. 

앎을 통한 지배와 소유라는 고전주의적 관점은 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더 경쟁력 있다. 예술은 미지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유파와 상관없이 낭만적이다. 앎이 정보로 환원되고 기술을 통해 편재하자 그 지배력은 강화됐다. 정보화의 한 방식인 유전공학의 예를 들어보자.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에서 2001년 인간 게놈지도가 완성된 이래 인간의 유전자가 완전히 인간 소유가 아닌 것들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만능시대가 가고 복잡함으로 회귀함을 말한다. 가령 같은 유전자가 서로 다른 종에서 발견되고 완전히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예는 유전자가 세포 내부의 환경에 따라 다른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신이 놓인 상황에 따라 그 수용성을 활성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코드로 환원하려 한다. 

인간이 코드로 환원되면 그를 유전자 프로필로 단정 짓는 SF영화 같은 미래가 올 수 있다. 유전자 프로필은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사람의 사회적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생명의 지도라고 평가되는 유전자조차도 순수하지 않고 원래의 계획대로 재현되는 것도 아니다.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환경이 중요하다. 지배 권력은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불확정성을 두려워하지만, 예술은 바로 그러한 속성을 전제한다. 현실은 주요한 결정에 인간이 빠지고, 결정되는 자들은 AI가 급격하게 변화시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무한정 준비하고 대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술도 체계화되어 갖출 것이 너무 많아져 주객이 전도된 지 오래다. 예술을 말하는 자와 예술가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지식이나 정보, 또는 그것의 소통과 유통을 독점하는 자리가 예술을 보증하는가. 미리 알았다면 가기 힘들었을 예술의 길은 모르는 게 악일까, 약일까, 예술은 선전되는 가짜 새로움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명확히 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