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 새벽 드로잉, 오전 작업, 오후 집일, 오후 농사.”

원주의 한 작업실에서 발견한 이젤에 붙은 메모 앞에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김진열의 작품은 그 메모 속 삶만큼이나 거칠고 투박하다. 검게 응고된 화면과 긁히고 덧대어진 물질들, 무너질 듯 서 있는 거친 형상은 때로 삶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은 부담을 관람객에게 전이시키기도 한다. 그의 작업 앞에서 먼저 조명되어야 할 것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삶과 그에 따른 인식이다. 그것은 정형화된 예술가에게 기대되는, 창작에 몰두하며 영감에 목말라하는 고립된 창조자의 것과는 다르다. 그의 삶은 노동과 생활, 공동체와 자연의 시간 속에 스스로를 깊숙이 위치시키는 지속적인 몸짓에 가깝다.

그는 농촌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리듬 속에서 살아간다. 계절에 따라 밭을 가꾸는 일을 큰 축으로 삼아, 생활의 현장에서 폐자재를 모으고 그것을 다시 고치고 이어 붙이며, 그 와중에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몸을 그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감각, 다시 말해 생태학적 감수성을 시각화한다는 사실이다. 김진열이 사용하는 재료와 작업 방식은 이러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 작품의 지지체가 되는 폐목과 녹슨 철은 누군가의 노동과 생존의 서사를 거쳐온 물질이다. 〈풀꽃지기〉(2014)에서 작가는 거친 한지를 그 위에 켜켜이 배접하여 구축한 둔중한 물성과 깊게 침잠한 청색 바탕층을 교차시킴으로써 자신의 예술 안에서 삶의 서사와 일상에서 체화된 자연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



김진열, <풀꽃지기>, 2014, 혼합재료, 80×122cm


인간의 실존적 비극 앞에서 낡고 변형된 어두운 형상이라는 지점에서, 김진열의 작업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검은 회화(Pinturas Negras)>(1819-23) 연작과도 접점을 지닌다. 고야의 말년에 그려진 이 연작 속 인물들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뒤엉켜 있고, 축 처진 몸과 침잠한 표정은 인간 존재의 불안과 폭력의 시대를 드러낸다. 두 작가는 공통적으로 우아한 미감 대신 결핍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형상을 통해 인간과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비극미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나 고야가 근대의 폭력성과 비극의 심연에서 인간의 광기와 고립을 발견했다면, 김진열은 그 비극적 무게를 견뎌내는 평범한 존재들의 연대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는 점이 다르다.

김진열의 작업은 ‘형상성’과 ‘민중’이라는 한국미술사의 개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작업 세계는 지역의 삶 안에 축적된 또 다른 형태의 지성과 감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농촌의 노동은 단순한 생계 활동이 아니라 계절과 날씨, 재료와 시간의 변화를 읽어내는 몸의 지식이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관계의 기술이다. 김진열은 이러한 삶의 구조를 예술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예술을 살아내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두 노인〉, 1819-1823경, 146×66cm, 회벽 유채의 캔버스 이전, 스페인국립프라도미술관 소장



오늘날 ‘생태적’이라는 말은 종종 자연주의적 감상이나 소박한 농촌 이미지로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김진열의 작업은 그러한 피상적 향토주의와 거리를 둔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풍경 자체보다 관계의 구조이며, 미감보다는 존재방식에 더 가깝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과 자연, 노동과 기억을 분리된 영역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인간과 자연, 노동과 예술, 물질과 기억은 서로 얽힌다. 김진열의 작업이 바로 그 얽힘의 감각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드러낸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이나 자연을 낭만화하지 않으며, 이러한 인식을 거대한 선언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간다는 것, 서로를 떠받치고 보듬으며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과 작업으로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