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성의 발현과 공존의 미학

윤진섭 | 미술평론가


 아마도 미술계에서 떠도는 속설 중 하나는 한국에는 기하학적 추상이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근‧현대 한국미술사를 되돌아볼 때, 1960-70년대에 기하학적 추상이 뚜렷한 양식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사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집단적 양상이란 전제가 붙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오랜 농경사회적 전통을 들 수 있다. 자연을 벗하며 살다 보니 기하학적 추상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고 기껏해야 한옥의 창호나 건축물, 조각보 등의 민예품에서 기하학적 추상의 모습을 스치듯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한국미술사에서 기하학적 추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소위 ‘근대화’와 관련된 양상이라고. 건축가 이상(李箱) 김해경의 도안이 상징하듯, 일제강점기의 기하학적 디자인과 실내장식은 ‘모던’ 현상과 관련이 깊으며, 60년대 후반 화단에서 유행한 단청의 기하학적 변주는 근대화 이후의 전통찾기와 직결된 문제였다고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은 이 분야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기하학적 추상과 관련하여 최근 두 작가의 전시가 눈에 띄었다. 현대화랑의 ‘유희영’전과 갤러리 바톤의 ‘정은모’전이 그것이다. 먼저 유희영의 [생동하는 색의 대칭]전을 보자. 이 전시를 스치듯 보면 20년 전에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개인전(2003. 3. 12-23)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겉만 보고 판단한 피상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는 것은 단색화의 특징인 ‘색의 우려냄’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희영은 단색화 작가가 아니면서도 색면추상과 단색화의 경계를 즐기듯 아슬아슬하게 거닌 관록이 유명세와 함께 긴 화력(畵歷)을 뒷받침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미국 색면추상의 대표작가인 바넷트 뉴먼(Barnett Newman) 식의 ‘숭고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전혀 다른 맛을 풍긴다. 숭고미는 거대한 산을 접할 때처럼 일단 작품의 크기가 커야 나타나는 미적 현상인데, 이번에 출품한 유희영의 작품은 대체로 그다지 크지 않았다. 2003년의 갤러리 현대 전시에는 가로 길이가 3미터가 넘는 대작들이 다수 출품됐었다. 그때 그 작품들을 보고 숭고미를 느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바네트 뉴먼이야 땅이 광대한 미국에서 산 작가니까 그 영향으로 거대한 화면에 숭고미를 느낄 정도의 에너지를 퍼부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희영은 어떤가? 한국의 땅이 그처럼 거대한가? 수십 년간 색면추상의 외길을 걸으면서 그가 집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색의 우려냄이 아니었을까? 

 유희영이 물감이 빨리 마르는 아크릴 칼라를 택하지 않고 유채를 고집하는 것도 이 우려냄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연이 아닐까? 이미 수십 년 전에 충북 옥천의 시골 산속에 작업실을 짓고 그림을 그려온 그다. 그렇다면 그의 화면에서 느껴지는 맑고 청아한 색의 느낌은 다름 아닌 자연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색이란 참으로 묘해서 약간의 차이에도 달리 느껴지는 법이다. 그렇다고 볼 때 유희영의 색은 시골에 살면서 자연에서 받은 감흥과 자연관찰에서 얻은 색의 미묘한 느낌을 유성물감을 통해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려보면 이 문제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화가란 어찌 보면 평생을 바쳐도 제대로 된 색 하나 내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유희영의 그림은 색이라고 하는 화두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화두가 결정된 이상 형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기하학적인 형태와 패턴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유이다. 그것을 변화가 없다고 보는 것 역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평생을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나무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유희영의 그림에서 색은 변화가 있는가? 그렇다. 그의 색은 같은 물감을 여러 번 칠하는 데서 오는 우려냄의 결과이다. 그것은 오직 보는 자의 눈이 느낄 뿐 언어를 초월한다. 색은 전수(傳受)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화의 영역에 속하는 까닭이다. 
  
 반면에, 갤러리 바톤에서 열린 정은모 개인전은 오랜 기간 색면추상을 천착해 온 유희영보다 기하추상의 본질에 더 다가간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색이 주를 이룬 유희영과 형태의 변주에 집중한 정은모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그렇다면 정은모의 작품 전체에서 느끼는 감흥은 무엇인가? 풍경이 아닌가?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선, 색, 면의 조화를 꾀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이 도시가 됐든 아니면 거주공간이 됐든, 안에서 밖을 본 것이든, 거꾸로 밖에서 안을 본 것이든, 하나의 풍경으로 내면의 정서가 외면화되는 것이다. 

 정은모의 기하학적 추상화에서 계절의 느낌을 받은 것도 각별한 경험이었다. 특히 짙은 청색이 주는 여름의 정서와 감이 익는 가을의 정취가 잘 드러나 있다. 그것들은 도시의 빌딩 사이에 둥두렷이 떠오른 달이나 사각의 건물 속에 들어온 해처럼 기하학의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60년대에 조국을 떠나 세계 각지를 여행하거나 살면서 문득 떠오른 망향의 정서랄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이 파스텔 톤의 색채에 짙게 배어있다. 

 정은모의 작품에 나타난 기하학적 도형들은 존재의 단단한 지반인 땅이 됐든, 단아한 형태의 집들이 거주하는 초원이 됐든 원소로 환원된 기호들이다. 그것들은 가령 도형 A(집)와 도형 B(초원)의 공존을 통해 하나의 풍경을 드러낸다. 여기서 평면적으로 처리된 배경은 그 자체 하나의 도형이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도(figure)와 지(ground)의 형태심리학에서처럼 어떤 그림은 배경이 도(figure)가 되면서 또한 지이기도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건축적이며 구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 존재의 지반인 땅에 대한 든든한 믿음의 정서, 시리도록 푸른 밤의 서정이 비록 도시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도시의 삭막함을 벗어나 자연으로 향하는 작가의 의도를 통해 화면 속으로 스며든다. 무엇을 통해서? 색을 통해서. 
 그러나 정은모의 색은 유희영의 색과 다르다. 유희영의 색이 넓은 색역(色域)을 통해 깊이 스며드는 색인 반면, 정은모의 그것은 깊이감과는 무관하게 색들의 공존에 더 무게가 실린 것처럼 보인다. 
 만일 정은모가 유희영처럼 도형이나 바탕(지) 하나하나에 색의 우림을 위해 집중했다면 기호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아우성치리라. 정은모의 그림이 진출과 후퇴색의 사용을 통해 다소 복잡한 구조를 지니지만, 사각형, 원, 반원, 호(弧) 등등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의 기호들과 어울려 공존의 미학을 드러낸 배경에는 작가의 뛰어난 조형 감각이 있다. 
 
 여기서 왜 유희영의 그림이 넓은 색역(색의 땅)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지 이해가 된다. 또한 왜 같은 기하학적 형태가 반복되는지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땅이 넓어야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이치와 맞닿는다. 색을 듬뿍 머금은 넓은 평붓이 지나가는 통로인 캔버스 바탕은 마치 쟁기가 지나가는 밭처럼 반복적인 붓질에 의해 갈아엎어지고 넘쳐흐르며 종국에는 서로 뒤엉켜 땅의 아래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이 바라보는 화면은 오랜 시간 숙성되고 발효된 물감의 외피인 것이다.   

 ‘단순과 복잡’은 기하학적 추상의 본질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키워드들이다. 어떤 기하학적 추상이든 이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은 괘종시계의 진자처럼 단순과 복잡 사이를 왕복한다. 작고한 미술평론가 이일은 ‘환원과 확산’이란 독자적인 비평언어로 현대미술의 양상을 해석했는데, 이를 빗대 적용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나 유희영의 색면추상을 ‘단순’의 항목에, 정은모의 기하추상을 ‘복잡’의 항목에 적용하면 이 두 예술세계는 ‘기하추상’으로 수렴된다. 다같이 기하추상이되, 유희영은 색이 주가 되는 회화요, 정은모는 색과 형태가 등가적 관계를 갖는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유희영은 색을 통해 정신성의 발현이 두드러진 반면, 정은모의 경우에 있어서 색은 자연을 환기시키는 환유의 색에 가까워보인다.   


1차 게재: 아트인컬처 202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