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려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1984년 벽두에 한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well)>이란 위성쇼를 통해 지구촌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상상치 못 했던 이 사건을 접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의 공영방송인 WNET의 뉴욕 스튜디오와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연결한 이 위성쇼를 통해 말로만 듣던 로리 앤더슨, 머스 커닝햄, 요셉 보이스 등의 공연 모습을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었다. 이 거사 이후 백남준은 말 그대로 ‘세계적인 작가’로 등극했으니, 예술가에게 실험과 모험, 그리고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백남준의 이름이 한국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이 생중계 위성쇼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이어진 백남준의 34년 만의 귀국과 KBS T.V와의 대담, 그리고 거기서 터져나온 “예술은 사기!”라는 일성이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불세출의 천재 백남준은 선사(禪師)와도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몰라서 그렇지 천재들의 머릿속은 여러 개의 섬광과도 같은 아이디어들과 영감들이 번뜩이며 뒤섞여 천지창조 때의 혼돈과도 같은 상태에 빠질 때가 많다. 이 무렵 백남준이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을 만나러 문화부 청사를 방문했을 때, 허름한 행색의 백남준을 노숙자로 착각한 수위가 출입을 불허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물론 사실을 파악한 수위가 나중에 정중히 모시긴 했지만, 이 웃지 못할 일화는 대중 일반의 통상적인 가치 기준이 천재에겐 한낱 동전 한 잎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준다. 

Ⅱ.
 시간을 거슬러 60년대로 올라가 보자. 편집자가 청탁한 대로 6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자면 무엇보다 [한국쳥년작가연립전]을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가장 큰 것을 꼽자면, 이른바 평면에서 일상, 곧 오브제(objet), 설치, 해프닝으로의 이행을 들 수 있다. 1967년 12월 11일부터 16일까지 국립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이 전시회는 <무>, <신전>, <오리진> 등 3개 그룹의 연립전 1) 형식으로 치러졌는데, 거기서 한국 최초의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이다. 해프닝을 주도한 것은 <무>동인이었다.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하던 <오리진> 동인들이 불참한 가운데 <가두시위>(12.11)와 <비닐우산과 춧불이 있는 해프닝>(12.14)이 잇달아 벌어졌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지닌 미술사적 의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전후 앵포르멜(Informel)의 평면 추상으로부터의 이탈, 즉 예술이 일상으로 침투해 들어간 ‘사건’을 가리킨다. 예술이 일상으로 들어간 세계미술사적 사건을 꼽자면, 20세기 초 다다(DADA) 시절에 자신의 아파트 공간을 일상적 사물로 채운 쿠르트 쉬비터스(Kurt Schwitters)의 ‘메르츠바우(Merzbau)’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1917)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이에 비해 훨씬 늦은 60년대 후반에 그 첫 징후가 나타났으니, 문화적 낙후가 매우 심한 편이다. 

 그러나 일대 반전이 일어났다. 1987년 창립한 ‘뮤지엄’ 그룹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불, 최정화, 고낙범, 정승(샌정), 홍성민, 명혜경, 노경애 등이 창립한 이 그룹은 신세대 미술의 원조로 받아들여지고 있거니와, 오늘날 세계미술계와 수평적 관점에서 교류하게 되는 첫 징후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그 동인은 IT에서 왔다. 뮤지엄 그룹을 둘러싼 이 문화적 반전에 대해 일찍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이후에 한동안 모더니즘을 떠받들었던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서 부상하기 시작한 이 ‘사적인 내러티브’에의 관심은 예술이 진보라든가 혁명과 같은 거창한 이념에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예술가의 소박한 꿈과 상상력을 담는 ‘그릇’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 현대미술을 통시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미적 담론은 80년대를 점유했던 ‘민중미술’의 힘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이던 80년대 후반 <뮤지엄>(1987년 창립)의 등장 이후에 본격화된다. 신세대 미술의 원조격인 이 집단의 멤버들은 이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분명히 선언했던 것이다. 그 이후 약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급속히 이행해 갔다.”(졸고, <메르츠의 방>-미로를 지나며, [Merz’s Room/메르츠의 방],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2006, 도록 서문 중에서)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컴퓨터 사용자의 숫자가 세계적 선두를 달리며 IT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나날이 갱신해 가는 후기 자본주의의 징후를 열거했다. 인터넷, 모바일 폰, PDP, 디지털 카메라, 게임산업 등이 강세를 보이는 전자산업의 메카 한국에 대해서다. 아다시피 한국은 그 이후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선두 그룹에 진입하게 된다. 

 오늘날 김수자, 이불, 서도호, 양혜규, 최정화 등등 동시대 국제적인 명성으로 세계미술계에서 한국을 빛내고 있는 작가들의 활동은 따지고 보면 이처럼 진일보한 한국 경제에 힘입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K-POP과 한류라고 하는 거대한 문화 사조가 커다란 방파제처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첨언하고 싶은 것은 “어느 구름에 비올지 모론다”는 속담이다. 긴 텀으로 보면 빛은 고르게 세상을 비추는 법이다. 가령, 요즈음 매스컴에서 가장 ‘핫’한 뉴스로 떠오르고 있는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의 준말)‘을 보자. 언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퀘퀘한 호랑이와 까치 이야기며,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귀신‘이 부상되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한국화 전공의 작가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오늘날 한국화의 침체 현상은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1970년대 한옥에서 아파트로 주거환경이 바뀌면서 족자, 현판, 편액과 같은 전통적 형식과 산수, 화조화는 기하학적 현대 건축 디자인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수출 위주의 산업 드라이브 경제정책은 급격한 부를 가져와 전국적인 도시화, 산업화를 측진시켰다. 십 수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한국화 폐과 현상은 이러한 총체적인 난맥상의 결과인 것이다. 2017년 무렵 ’한국화의 날‘ 제정, ’한국화진흥회‘의 창립 등 한국화 분야에서 자구책 마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형식과 내용의 혁신적인 내부의 의식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자구책은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동안 한국화 분야도 의미있는 시도가 있었다. 80년대의 ’수묵화 운동‘을 비롯하여 2천년대 초반의 ’동풍(東風)‘ 등은 매우 의미있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인상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이후 한국화의 침체는 긴 동면에 든 느낌이다. 

 그러나 최근에 김홍도미술관에서 열린 [우미미 연비비(雨微微 煙霏霏)]전(2025.7.8.-9.7)은 한국화 분야의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김지안, 김장은 학예연구사가 기획한 이 전시는 동시대 한국화의 회화,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를 망라하여 30-50대의 정예 작가들-김용원, 문이원, 박제성, 성민우, 수무‧녹음, 유태근, 홍지윤-의 정선된 작품을 통해 오랜 기간 침체된 한국화의 긴 잠을 깨운 ’케데헌‘ 시대의 대표적인 전시로 기억될 것이다. 

 인류사상 문화 진화의 획기적인 계기를 불의 발명, 원근법의 발명, 인쇄술의 발달, 티브이와 비디오의 발명, 인터넷의 발명과 SNS 매체의 발달, 로봇산업, 그리고 최근의 NFT, I.A와 ChatGPT 등등 각종 인공지능과 관련된 문명의 이기들로 꼽을 때, 거기에 부응하고 적응하려는 한국화 작가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가 성공의 관건인 것이다. 


1차 게재: 퍼블릭아트 2025.10
  
  
          
1) 3개 그룹의 동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무> 동인: 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신전> 동인: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오리진> 동인 :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