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큰 별이 지다
윤진섭 | 미술평론가
며칠 전, 92세를 일기로 작고한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1931-2023)은 일평생 작업, 교육, 미술행정에 매진해 온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다. 박 화백은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어려서 안성으로 이사했다.
6.25 전쟁이 나던 해에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입학해 동양화를 전공했다. 처음에는 동양화과에 입학했지만,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 등 동양화과 교수들이 당시 부산에 있는 전시(戰時)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김환기, 이종우가 교수로 있는 서양화과로 전과를 했다. 그때가 1952년, 박서보는 2학년 학생이었다.
1954년에 박서보는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수헌 등 동기들과 함께 광주에 소재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한다. 거기서 중요한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훗날 앵포르멜의 이론적 지지자 역할을 하게 되는 방근택(1929-1992) 이다.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방근택은 육군보병학교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광주에 있는 USIS(미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을 연 경력이 있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방근택의 회고에 의하면, 이들은 교관과 생도의 신분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박서보는 1956년 홍대 교수인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를 안국동에서 운영했는데, 마침 이 무렵에 대위 계급을 끝으로 군에서 제대한 방근택과 재회하게 된다. 이봉상회화연구소에는 훗날 <60년미협>의 주체세력인 윤명노, 김봉태, 김종학 등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앵포르멜의 분위기가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박서보의 인생에서 이 1956년은 매우 중요한 해이다.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4인전>을 결성, 동방문화회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반(反)국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전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권위가 큰 만큼 국전을 둘러싼 잡음과 비리 또한 컸기 때문에,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젊은 청년작가들은 이에 분노하여 저항한 것이다. 이 도전과 저항의 정신은 이후 박서보의 삶과 예술을 관류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1957년에 김영환, 이철, 문우식, 조동훈, 김종휘, 조용민, 김청관, 하인두, 장성순, 김충선, 나병재, 김서봉, 김창열 등이 모여 결성한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에 박서보는 지나치게 개성이 강해 초대받지 못하고 이듬해에 합류, <현대전>에 1960년 마지막 회까지 참가하게 된다. 박서보가 <현대미술가협회>에 뒤늦게 참여함으로써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등 <4인전> 멤버 전원이 <현대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비정형 회화(앵포르멜)가 지닌 미술사적 의의는 전통적인 소재에 사실주의 내지는 인상파풍이 주류인 국전의 고답적인 분위기에 반발, 6.25가 잉태한 처절한 전쟁 체험을 내면화해 강한 마티엘과 도전적인 제스처로 화면에 담았다는 데 있다. 이때는 마침 유럽에서 불어온 앵포르멜과 미국에서 들어온 추상표현주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때였다.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들은 미군부대의 P.X에서 흘러나온 ‘LIFE’나 ‘TIME’지를 통해 이러한 사조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58년 화신화랑에서의 3회 <현대전>에서 본격적 앵포르멜 회화는 박서보가 선도하였다. 그 뒤를 김청권과 나병재가 따랐고, 김창렬은 반쯤 형태가 부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중략)...어느 날 서보화실에 들렀더니 오백 호 남짓한 화포를 바닥에 깔고 에나멜 통에 빗자루 붓을 담그면서 마구잡이로 ‘격정의 대결’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섬짓한 폭력적 회화 파괴의 몸짓은 가히 박서보의 진면목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는 은연중 그러나 여세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하인두, <애증의 벗, 그와 30년>, <<선미술>>, 1985년 겨울호 29쪽
이때가 바로 방근택이 드디어 본격적인 앵포르멜 회화가 나타났다고 쓴 1958년도이며, “놀라운 힘의 집단, 놀라운 미의 잔학행위,.....그것은 일체의 권위를 일단 부정하고 0에서 새로이 출발하려는 그들의 순수한 심적 동기와 청년의 용기의 소산인 것이다.”(<미의 전투부대>, 연합신문, 1958년 12월 8일자)라고 쓴 미술평론가 이경성의 전평이 나타난 때였다.
미술행정가로서 박서보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1970년대 였다. 박서보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 국제분과 담당 부이사장을,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이사장 겸 예총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 70년대는 한국미술의 국제화와 더불어 지역미술의 현대화라는 과제에 집중되던 시절이었다. 그 역할을 박서보가 도맡아 했다. 1970년부터 80년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박서보는 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과 이사장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이용하여 한국미술의 국제화 과제를 풀어나갔다. 저돌적이며 추진력이 강한 박서보의 개성 때문에 실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박서보는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 해외의 유명한 국제전은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기 때문에, 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이었던 박서보는 참여작가 선정을 위한 합리적인 장치로 1972년에 [앙데팡당]전을 창설, 당시 모노파의 이론가로 한창 떠오르던 재일작가 이우환에게 심사를 맡겼다. 이때 선정된 작가가 바로 20대의 신예 이동엽과 허황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작가는 설치와 오브제, 퍼포먼스가 주류를 이룬 파리비엔날레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비엔날레 본부로부터 거부를 당했고, 미협은 이들을 뒤늦게 카뉴국제회화제 참여작가로 선정, 비로소 국가상을 받게 된다.
지역미술의 현대화는 1975년에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드서울]을 창설한 박서보가 서울에 이어 지역미술에 눈을 돌리면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1973년에 [서울현대미술제]를 연다고 신문 보도까지 되었지만 불발되고, 이듬해에 이강소, 김기동, 김영진, 최병소, 황현욱 등 대구의 청년작가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대구현대미술제]가 현대미술제의 첫 봉화를 올렸다. 미협의 막강한 조직을 이용한 현대미술제가 부산, 광주, 전주, 강원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에꼴드서울](1975)의 창설은 박서보의 필생의 업적인 단색화와 관련이 깊다. 커미셔너 제도를 둬 작가선정에 객관성을 기도한 이 전시는 대부분 단색화 작가들이 초대를 받았는데, 화단사적으로 볼 때, 이는 1950년대의 비정형 회화, 즉 6.25 전쟁 세대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복귀는 [청년작가연립전]을 비롯하여 [AG], [ST], [신체제] 등 이른바 ‘4.19세대’와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위미술 운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재야 세력(4.19세대)과 한국미술협회라는 제도권 세력(6.25세대)과의 대격돌을 상징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75년 [AG]의 해체전과 [에꼴드서울]의 창립전이다. 같은 해에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이 두 전시회는 파워게임에서 전쟁세대에 대한 4.19세대의 투항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전쟁용어에서 차용한 ‘전위(avant-garde)’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고지전이었던 셈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주류에 맞서는 선구자’ 등등 오늘날 박서보에 따라붙는 별칭은 많다. 피카소를 연상시키는 부리부리한 눈의 소유자 박서보. 상대의 기를 제압하는 위압적인 제스처, 한 자리에서 일곱 시간을 떠들어도 지치지 않는 정렬과 화제의 풍부함, 그런가 하면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평생 작업에 몰두한 집중력과 끈기, 그리고 저력. 타고난 유머 감각과 순발력, 발빠른 상황 대처 능력과 판단력의 소유자 박서보. 그는 과연 누구였는가? 70년대에 <묘법(Ecriture)>이라는 이름의 단색화 화법을 개발, 이후 50여 년에 걸쳐 완성, 국제적인 작가로 우뚝 자리매김한 박서보 화백. 우군이 많은 만큼 적도 많았던 젊은 시절 전위의 선봉장 박서보. 그는 과연 누구였는가? 신이었는가, 인간이었는가, 아니면 괴물이었는가?
백수(白壽)를 누리면서 멋진 단색화의 세계를 열어갈 것 같았던 박 화백도 이제 이 땅에 없다. 평소 강한 듯 보이면서도 여린 구석이 있고, 온몸에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로 위압적인 듯 보이면서도 내면에 따뜻한 인간애도 겸비했던 큰 스승 박서보. 이 불세출의 대가를 보내며 나는 나직이 읊조린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이젠 좀 편히 쉬세요. 그동안 너무 고단하지 않으셨어요?”라고.
6.25 전쟁이 나던 해에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입학해 동양화를 전공했다. 처음에는 동양화과에 입학했지만,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 등 동양화과 교수들이 당시 부산에 있는 전시(戰時)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김환기, 이종우가 교수로 있는 서양화과로 전과를 했다. 그때가 1952년, 박서보는 2학년 학생이었다.
1954년에 박서보는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수헌 등 동기들과 함께 광주에 소재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한다. 거기서 중요한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훗날 앵포르멜의 이론적 지지자 역할을 하게 되는 방근택(1929-1992) 이다.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방근택은 육군보병학교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광주에 있는 USIS(미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을 연 경력이 있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방근택의 회고에 의하면, 이들은 교관과 생도의 신분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박서보는 1956년 홍대 교수인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를 안국동에서 운영했는데, 마침 이 무렵에 대위 계급을 끝으로 군에서 제대한 방근택과 재회하게 된다. 이봉상회화연구소에는 훗날 <60년미협>의 주체세력인 윤명노, 김봉태, 김종학 등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앵포르멜의 분위기가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박서보의 인생에서 이 1956년은 매우 중요한 해이다.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4인전>을 결성, 동방문화회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반(反)국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전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권위가 큰 만큼 국전을 둘러싼 잡음과 비리 또한 컸기 때문에,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젊은 청년작가들은 이에 분노하여 저항한 것이다. 이 도전과 저항의 정신은 이후 박서보의 삶과 예술을 관류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1957년에 김영환, 이철, 문우식, 조동훈, 김종휘, 조용민, 김청관, 하인두, 장성순, 김충선, 나병재, 김서봉, 김창열 등이 모여 결성한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에 박서보는 지나치게 개성이 강해 초대받지 못하고 이듬해에 합류, <현대전>에 1960년 마지막 회까지 참가하게 된다. 박서보가 <현대미술가협회>에 뒤늦게 참여함으로써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등 <4인전> 멤버 전원이 <현대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비정형 회화(앵포르멜)가 지닌 미술사적 의의는 전통적인 소재에 사실주의 내지는 인상파풍이 주류인 국전의 고답적인 분위기에 반발, 6.25가 잉태한 처절한 전쟁 체험을 내면화해 강한 마티엘과 도전적인 제스처로 화면에 담았다는 데 있다. 이때는 마침 유럽에서 불어온 앵포르멜과 미국에서 들어온 추상표현주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때였다.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들은 미군부대의 P.X에서 흘러나온 ‘LIFE’나 ‘TIME’지를 통해 이러한 사조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58년 화신화랑에서의 3회 <현대전>에서 본격적 앵포르멜 회화는 박서보가 선도하였다. 그 뒤를 김청권과 나병재가 따랐고, 김창렬은 반쯤 형태가 부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중략)...어느 날 서보화실에 들렀더니 오백 호 남짓한 화포를 바닥에 깔고 에나멜 통에 빗자루 붓을 담그면서 마구잡이로 ‘격정의 대결’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섬짓한 폭력적 회화 파괴의 몸짓은 가히 박서보의 진면목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는 은연중 그러나 여세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하인두, <애증의 벗, 그와 30년>, <<선미술>>, 1985년 겨울호 29쪽
이때가 바로 방근택이 드디어 본격적인 앵포르멜 회화가 나타났다고 쓴 1958년도이며, “놀라운 힘의 집단, 놀라운 미의 잔학행위,.....그것은 일체의 권위를 일단 부정하고 0에서 새로이 출발하려는 그들의 순수한 심적 동기와 청년의 용기의 소산인 것이다.”(<미의 전투부대>, 연합신문, 1958년 12월 8일자)라고 쓴 미술평론가 이경성의 전평이 나타난 때였다.
미술행정가로서 박서보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1970년대 였다. 박서보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 국제분과 담당 부이사장을,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이사장 겸 예총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 70년대는 한국미술의 국제화와 더불어 지역미술의 현대화라는 과제에 집중되던 시절이었다. 그 역할을 박서보가 도맡아 했다. 1970년부터 80년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박서보는 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과 이사장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이용하여 한국미술의 국제화 과제를 풀어나갔다. 저돌적이며 추진력이 강한 박서보의 개성 때문에 실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박서보는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 해외의 유명한 국제전은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기 때문에, 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이었던 박서보는 참여작가 선정을 위한 합리적인 장치로 1972년에 [앙데팡당]전을 창설, 당시 모노파의 이론가로 한창 떠오르던 재일작가 이우환에게 심사를 맡겼다. 이때 선정된 작가가 바로 20대의 신예 이동엽과 허황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작가는 설치와 오브제, 퍼포먼스가 주류를 이룬 파리비엔날레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비엔날레 본부로부터 거부를 당했고, 미협은 이들을 뒤늦게 카뉴국제회화제 참여작가로 선정, 비로소 국가상을 받게 된다.
지역미술의 현대화는 1975년에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드서울]을 창설한 박서보가 서울에 이어 지역미술에 눈을 돌리면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1973년에 [서울현대미술제]를 연다고 신문 보도까지 되었지만 불발되고, 이듬해에 이강소, 김기동, 김영진, 최병소, 황현욱 등 대구의 청년작가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대구현대미술제]가 현대미술제의 첫 봉화를 올렸다. 미협의 막강한 조직을 이용한 현대미술제가 부산, 광주, 전주, 강원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에꼴드서울](1975)의 창설은 박서보의 필생의 업적인 단색화와 관련이 깊다. 커미셔너 제도를 둬 작가선정에 객관성을 기도한 이 전시는 대부분 단색화 작가들이 초대를 받았는데, 화단사적으로 볼 때, 이는 1950년대의 비정형 회화, 즉 6.25 전쟁 세대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복귀는 [청년작가연립전]을 비롯하여 [AG], [ST], [신체제] 등 이른바 ‘4.19세대’와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위미술 운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재야 세력(4.19세대)과 한국미술협회라는 제도권 세력(6.25세대)과의 대격돌을 상징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75년 [AG]의 해체전과 [에꼴드서울]의 창립전이다. 같은 해에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이 두 전시회는 파워게임에서 전쟁세대에 대한 4.19세대의 투항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전쟁용어에서 차용한 ‘전위(avant-garde)’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고지전이었던 셈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주류에 맞서는 선구자’ 등등 오늘날 박서보에 따라붙는 별칭은 많다. 피카소를 연상시키는 부리부리한 눈의 소유자 박서보. 상대의 기를 제압하는 위압적인 제스처, 한 자리에서 일곱 시간을 떠들어도 지치지 않는 정렬과 화제의 풍부함, 그런가 하면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평생 작업에 몰두한 집중력과 끈기, 그리고 저력. 타고난 유머 감각과 순발력, 발빠른 상황 대처 능력과 판단력의 소유자 박서보. 그는 과연 누구였는가? 70년대에 <묘법(Ecriture)>이라는 이름의 단색화 화법을 개발, 이후 50여 년에 걸쳐 완성, 국제적인 작가로 우뚝 자리매김한 박서보 화백. 우군이 많은 만큼 적도 많았던 젊은 시절 전위의 선봉장 박서보. 그는 과연 누구였는가? 신이었는가, 인간이었는가, 아니면 괴물이었는가?
백수(白壽)를 누리면서 멋진 단색화의 세계를 열어갈 것 같았던 박 화백도 이제 이 땅에 없다. 평소 강한 듯 보이면서도 여린 구석이 있고, 온몸에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로 위압적인 듯 보이면서도 내면에 따뜻한 인간애도 겸비했던 큰 스승 박서보. 이 불세출의 대가를 보내며 나는 나직이 읊조린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이젠 좀 편히 쉬세요. 그동안 너무 고단하지 않으셨어요?”라고.
- 1차 게재: 월간미술, 202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