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투(Yatoo)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한국미술사상, ‘몸’을 이용하여 순수하게 자연에 접근해 들어간 최초의 미술단체 <야투(野投/Yatoo)>가 내년이면 어느덧 창립 45주년을 맞이한다. 매우 뜻깊은 해이다. 전 세계 미술의 역사를 봐도 <사계절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야투와 같은 자연미술 운동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강이나 산, 들, 바다로 나가 자연에 몸을 맡긴 야투의 회원들은 이제 총 168회에 해당하는 <사계절연구회>의 기나긴 역사를 맞이하였다.
<야투>는 1981년 공주에서 결성된 자연미술 단체다. 공주와 대전에 거주하는 젊고 패기에 넘치는 20-30대 스무 명의 작가들이 자연을 주제로 모여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창립회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희순, 곽문상, 고승현, 김영철, 김지숙, 나경자, 박수용, 신현태, 이동구, 이순구, 이응우, 임동식, 조충연,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함상호, 허 강, 허진권, 홍오봉(가나다 順)
1981년 8월 14일 이 일단의 젊은이들이 공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 철교 아래 백사장에 모였다. 야투의 ‘역사적’ 출범이다. 1961년생부터 1945년생에 이르는 이들은 19일까지 5박 6일간 야외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작업하였다. 1)
당시 이들이 자연에서 행한 작업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도록에 기술된 작업내용 중에서 일부를 골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승현: 폭 4m, 길이 7m의 비닐에 1m 정방의 네모난 틀을 만들어 씌우고 이것을 여러 개 사장에 설치한다. 강바람의 변화에 의해 네모난 틀에 씌워진 비닐은 팽창과 수축을 계속하며 각양의 동태와 소리를 낸다.
⁕김영철: 금강에 와서 야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 자택 출발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구상,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현장에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물과 그늘을 찾아 심호흡을 하고, 산책도 하며 완전 휴식을 취하다 상경하는 무작위한 상태를 보인다.
⁕김지숙: 금강의 게를 여러 마리 잡아서 오색의 풍선에 매단다. 게의 움직임에 따라 풍선의 바람에 의한 진동에 따라 금강 변은 경관을 이룬다.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물에 띄울 때 물속의 게의 움직임에 따라 풍선도 아이들도 함께 움직인다.
⁕정봉숙: 강의 제방쪽 풀숲에 다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한다.
⁕신현태: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아 살게 한다.
⁕이동구: 휘어지는 가느다란 나무로 사장에 생존하는 풀포기 하나를 중심으로 원으로 울타리를 설치한다.
⁕이응우: 금강물 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어 물에서 모래로 돌다리를 놓아가며 나온다.
⁕허 강: 나무배 50여 개에 촛불을 켜 야간에 강에 띄운다.
⁕허진권: 완전 탈의한 나신이 되어 물에 뛰어든다. 한동안 수영도 하며 소리도 지르다가 모래로 나와 모래로 전신을 덮은 다음 뒹구는 동작으로 물에 잠긴다.
이상의 내용은 당시의 현장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기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야투> 창립 회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우선 눈여겨봐야 할 공통적인 사실은 예시된 문장 전체에서 주어가 생략됐다는 점이다. 2)
그러면서도 말이 통하는데 ‘3표론’을 주창한 철학자 박동환에 의하면, “주어의 자리에 어떤 정체성도 결정하지 않고 미지의 사태로 남겨두고 기다리는 태도가 지배하는 한국어는, 인간중심주의의 철학체계를 만들어내기 이전의 사유가 화석으로 남아있는 언어라는 것” 3)이다.
이를 참고삼아 정리하면, 야투 작가들의 작업 기술(記述) 방식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목적어+술어 예)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아 살게 한다.(주어의 생략)
이러한 문장구조는 주어가 생략되면 비문(非文)이 되는 영미권 언어의 서술방식과 대조적이다.
예) met him(x)
I met him(o)
말하자면 주체(I)가 생략되면 곧 비문이 되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명령문의 경우이다.
예) Go. Eat, etc.
그런데 앞에 든 예문에서 도대체 누가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인가? ‘나’인가, 영수인가, 아니면 순희인가?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정봉숙의 문장을 예로 들면, “(순희는) 강의 제방쪽 풀숲에 다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한다.”는 문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작가 정봉숙이 순희에게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지만, 도록에 수록되는 야투의 텍스트 기술 관행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문장 기술에서 주어(나)가 생략돼도 (그 일을 수행하는) ‘나’의 현실과 일치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에서 주어인 ‘I’를 소거하면, 명령형이 되거나(think), 비문(非文)이 된다(therefore am). 그러나 한국어는 다르다. ‘야투’의 경우 주어가 생략돼도 비문이 되지 않으며,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가 유지되고, 자연 속에 녹아든다.
이번에는 훗날 행해진 사계절연구회 회원의 경우를 보자. “여러 곳의 나뭇가지에 먹물이 묻은 붓을 줄로 매달에 놓고 바닥에는 흰 종이를 설치한 다음에 바람결에 맡긴다(강희준)”는 기술(記述)이 있다 4). 여기서 먹물이 묻은 붓을 줄에 매단 주체는 분명 작가 자신이지만, 문장에는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문장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종이에 붓질을 하는 주체도 작가인가? 아니다. 바람인 것이다. 작가(강희준)는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줌으로써(최소한의 개입), 자연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하도록 ‘맡긴’ 것이다.
행위에서 주어가 생략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은 언어 이전의 자연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시원적 몸짓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임동식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자연을 바라볼 때 마음을 비우고 나갔죠. 무엇을 하려는 목적으로 나가기보다는 준비없는 마음으로, 비우는 마음으로 현장에 나가 일깨움 비슷한 것이 일어나면서 좋은 작업이 나오는 그런 방향을 선택했죠. 즉 무소유적 마음으로 바라본 거죠.” 5)
이는 이 글의 서두에 길게 인용한 작가노트에서 김영철이 한 말, 즉 “금강에 와서 야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 자택 출발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구상,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현장에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물과 그늘을 찾아 심호흡을 하고, 산책도 하며 완전 휴식을 취하다 상경하는 무작위한 상태를 보인다.”는 대목과도 통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야투 회원들의 작업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놀이정신의 발현이다. 김지숙의 풍선놀이처럼 관객참여를 동반한 것이든, 혼자서 하는 것이든(강희순, 곽문상, 나경자, 박수용, 이동구, 이순구, 조충연) 작업의 근간에는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모든 문화현상의 기원을 놀이로 본 ‘놀이정신’이 깔려 있다(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 그런 까닭에 이들이 하는 작업은 자연과 나누는 대화(고승현, 김영철, 신현태, 이응우, 임동식,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홍오봉)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독백(함상호, 허강, 허진권)이기도 하고, 근원적으로는 고향(자연)을 향한 회귀의 몸짓인 것이다.
1981년 야투 창립 이후 지금까지 총 168회에 걸쳐 이루어진 사계절연구회 회원들의 자연미술 워크숍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위는 이른바 최소한의 몸짓이다. 이는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주는 행위(최소한의 개입)를 비롯하여 무위를 지향하는 태도, 놀이정신의 발현, 고향(자연)을 향한 회귀의 몸짓 등과 더불어 국내외의 자연미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업태도이자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과 소통을 시도한다. ‘야투(野投)라는 말 그대로 들(野)에 (몸을) 던짐으로써 인간중심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상징되는 근원으로의 회귀를 실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의 소통의 근본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1981년, 한국의 충남 공주에서 혈기왕성한 20대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발원한 ‘야투(野投/Yatoo)’의 근본정신은 자연 동화(同化)에 있다. 기억하건대, 80년대 초반이면 ‘생수’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산이나 숲에서 흐르는 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탈이 없던 시대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인 시대, 즉 자연과 인간이 동화(同和)된 시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의 자연관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정복이 낳은 인간과 자연과의 불화가 아니라, 화합을 이루고 친연(親緣)을 유지하는 동화(同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이 낳은 자연에 대한 저항의 발길질은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성(modernity)의 개념이 발생한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연정복과 자연 경시의 풍조가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반면에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존중과 동화(同化)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자연관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동양의 전통 산수화이다.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는 동양의 산수화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이 작게 표현돼 있는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겸손한 태도가 잘 드러난 사례이다.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니 ‘안분지족(安分知足)’과 같은 도교적 삶의 태도들은 다 같이 청빈을 삶의 실천윤리로 삼으면서 자연과의 동화(同和)를 꾀한 사례들이다.
인간을 우주 속에 내던져진 티끌처럼 작은 요소로 파악한 이러한 세계관에서 자연이란 ‘태초의 대지’인 동시에 ‘만물의 요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대지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부턴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근래 들어 그 징후가 뚜렷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의 ‘팬데믹(Pandemic)’ 상황이었다.
Ⅱ.
졸졸 흐르는 옹달샘의 물이 작은 시내를 이루고, 시내는 다시 다른 지류들의 물과 합쳐 강이 되고, 강은 이제 ‘세계’라는 바다를 향해 멀고도 긴 항해를 하는 중이다 6). 거선(巨船)의 이름은 ‘야투호(野投號)’이다.
세계미술사에 유례가 없는 야투의 행보를 놓고 첫 시발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세계사의 지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팬데믹 상황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자연과 생태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던 청년작가들의 활동은 매우 중대한 의의(意義)를 지니기 때문이다.
야투의 회원들이 산이나 들로 나가 활동을 하던 시기는 산업화시대를 연 70년대에 이어서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향해 질주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사람들이 그 폐해를 피부로 느낄 만큼 환경과 산업재해가 심각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당시 야투 회원들의 활동이 화단에서 제대로 인식, 평가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Ⅲ.
현재 (사)한국자연미술가협회-野投로 돼 있는 단체의 명칭은 첫 창립전이 열린 1981년에는 ‘야투 야외현장미술연구회’였다. 이 명칭으로 전시가 끝난 뒤 창립전의 도록이 발간되었다. 1981년 여름에 열린 창립전 도록에 다음과 같은 야투의 선언문이 실렸다. 7)
“야투는 자연과의 신선한 접촉을 통하여 야외미술을 연구하는 모임으로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두께, 그 가운데의 모든 생명력을 예찬한다. 순수한 자연과 동행하는 투명한 예술의 본격연구모임 야투는 사계절을 통하여 연구회를 갖고 작품집을 발간하여 의식의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방법론을 개진한다.
야투는 자연공간에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사람들의 열화같은 의욕과 폭발적인 정열에 힘입어 연구회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계속 야외공간에서 들에 핀 야생화와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연구됨으로써 좋은 작품들이 산탄총을 쏘아대듯이 발표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들이 자기를 내어주고 있고 들에서 크고 사는 자들의 꿈 또한 넓고 깨끗함으로 야투는 폭넓고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발상임을 믿는다.
우리는 풀포기의 떨림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무결에 스치는 바람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여름의 열기, 가을의 드맑고 높은 하늘, 겨울의 차디찬 기온은 물론 인간이 갖는 모든 동작과 응시, 심리적 문제, 다각적 면에서 생생하게 부딪치는 모든 현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작업의 대상임을 밝히며 위의 제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설치하고 행동함은 우리가 희구하는 바 선과 진실, 아름다움, 순수성에의 접근, 사변감각적 탐닉에 속한 눈, 미술이라는 기존방법론에 묶인 두뇌, 실내공간적 차원에 닫혀진 생명의 원음 등을 풀고 되찾아 열기 위함이며, 동서남북이 확 열려진 커다란 공간과 변화되는 시간을 사계절의 선에서 바라보는 야투의 율동 속에서는 자연처럼 강하고 선하며 깨끗하고 맑은 의식을 얻을 것이라는 바램이 그 이유이다.”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
“Yatoo” Outdoor Fine Arts Study Association
자연을 찬미하고 동경하는 <야투>는 열린 단체이다. 언제든지 입‧탈퇴가 가능한 느슨한 조직이기 때문에 1981년 가을 창립이후 전시가 거듭되면서 적잖은 회원변동이 있었다. 초창기 신입회원의 추이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2회 1981년 가을(11.6-7, 공주산성공원): 강정헌, 고현희, 안치인, 유병호, 이계길, 이두한, 이종협, 전희도, 정길호, 정영진, 정장직, 홍상문
제4회 1982년 봄(연기군 나성리 금강백사장): 홍명섭 등
제5회 1982년 여름(8.9-13, 공주 청벽 금강백사장): 신남철, 유동조, 이기방, 전원길
제6회 1982년 가을(공주산성공원): 김명식, 김원희
제8회 1983년 봄(4.30-5.1, 계룡산국립공원): 이경우, 이정훈, 유병호, 히로시 사토
제11회 1984년 겨울(1.23-24, 공주금강백사장), 김세현, 방효성, 이성재
제13회 1984년 여름(8.6-10, 서해안 안면도): 복종순, 한정례
제22회 1986년 가을(11.8-9, 공주산성공원): 김해심
제24회 1987년 봄(4.25-26, 공주산성공원): 유현걸, 백준기 등
<야투>는 그렇게 해서 점차 영역을 넓혀나갔다. 처음에는 공주와 금강 주변에서 시작하여 충청도를 거쳐 전국을 대상으로 나아갔으며, 마침내 아시아를 거쳐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세월이 무려 45년에 이른다. 초창기 20-30대의 청춘들이 이젠 60-80대의 장‧노년에 이르렀다. 이른바 몽(蒙)의 괘이다.
45년에 걸친 야투의 역사에서 야투는 대략 다섯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1991 금강국제자연미술제의 창설, 두 번째는 2004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창설, 세 번째는 2010년 야투국제레지던스프로그램의 창설, 네 번째는 2011년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Yatoo-i)의 창설, 다섯 번째는 2014년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GNAP)의 창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야투의 자연미술운동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고 의의가 큰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사계절연구회이다. 사계절연구회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야투의 회원들이 자연속으로 직접 들어가(野投) 자연의 일부가 돼 미술활동을 벌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다.
사계절연구회8) 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의 기후조건에 착안, 자연의 변화에 따라 작품의 내용 또한 변하는 워크숍을 벌인다. 봄에는 봄의 자연적 특성이 있는데, 이는 나머지 계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봄에는 여름과 같은 성숙기의 나뭇잎을 이용할 수 없고 겨울에는 가을의 단풍을 구하기 어려우니, 제철 음식처럼 그때그때의 사물이 제격이다. 이것이 바로 야투 회원들이 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순응’과, 자연과 인간의 마음과의 ‘감응’은 생태적 ‘소통’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따라서 사계절연구회(야투)의 활동은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이 낳은 계몽사상의 핵심인 자연정복과는 상반되는 자연과의 상생이 목적이며, 자연이 인간적 삶의 토대이자 거역할 수 없는 모태임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연에 나아감에 있어서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임하며, 행위 후에는 행위의 흔적인 작품을 자연에 맡기고 돌아오는 것이다.
야투 회원들의 이러한 자연친화적 행위에는 노자가 말한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도는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연을 본받는다.”는 의미의 이 도법자연은 노자의 도덕경 제25장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는 이를 풀이하여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다. 여기서 보이는 사람(人)-땅(地)-하늘(天)-도(道)의 관계는 다시 도-사람-땅-하늘로 이어져 끝없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사계절연구회가 활동의 배경으로 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 또한 순환의 원리가 생명이다. 겨울에 꽃이 피고 여름에 눈이 오면 사계절이라 할 수 없다. 봄이면 파종을 해야 하는데 땅이 꽁꽁 얼어있으면 씨를 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수십 년간 지구상에서 벌어진 이상기후는 자연의 이법이 헝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 우리가 실감하듯이, 봄과 가을이 옛날에 비해 극히 짧고 한국의 기후가 점차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어 가는 현실은 이러한 현상과 무관치 않다.
산업혁명 이후 석탄 연료 중심의 산업구조는 필연적으로 환경의 파괴를 불러왔다. 여기에 덧붙여 석유산업은 비닐을 비롯하여 각종 합성수지 등 산업제품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문제를 낳았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은 메탄가스의 남용과 함께 오존층의 파괴를 가져왔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는 남북극의 빙하는 물론 히말라야 등 고산지대의 만년설 등 빙하기 때부터 존재해 온 얼음이 녹아 지구상의 해수면을 높이는 대재앙을 초래했다. 9)
. 전 세계 국가들이 화석연료 사용의 비중을 높이자 북극은 다른 지역보다 온난화가 2-3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두께가 3km에 달하는 그린란드의 얼음을 포함, 지구 전체의 빙하가 녹으면 지구 해수면의 높이가 약 7미터 상승하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10)
Ⅳ.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야투’의 회원들이 벌이는 행위가 세계사적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행위의 대부분이 자연에 대한 외경심의 표현이며, 그 표현은 신체(몸)를 통한 ‘최소한의 개입’이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다다(Dada) 이후 퍼포먼스의 역사를 관류해 온 기존의 다양한 퍼포먼스들과 다른 점이다. 그것도 약속이나 한 듯이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서로 닮는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의 약속인데, 야투, 즉 사계절연구회 회원들이 그동안 벌여온 행위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자연미술 11) 가들은 자연을 매개로 자연에 동화되는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는 가운데(자연존중사상) 각자 개성이 있는 예술적 행위를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공통적 특징을 보인다. 첫째, 서사(narrative)와 스토리의 배제(반(反)연극성(anti-theatricality), 둘째, 자연물을 통한 간단한 상징과 기호의 제시 및 이를 통한 소통의 의지표출, 셋째, 문명적 물질의 거부(반(反)문명), 넷째, 몸을 통한 행위의 원초성 표출, 다섯째, 주거지에로의 회귀 의지, 여섯째, 자연물을 이용한 최소한의 행위지향, 일곱째, 가공되지 않은 생짜의 자연물 사용과 무작위성(無作爲性:애써 꾸미지 않음) 표출 등이다.” 12) 이를 다시 뭉뚱그려 요약하자면 ‘신체(몸)를 통한 최소한의 개입’이란 말로 환원된다. 이 경우, 신체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자연에 ‘신체’를 빌려주는 것이 아닐까? 빌려주되, 주체인 ‘나’가 소거된 상태에서 ‘겸손’하게 빌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음의 진술들을 보자.
⁕정길호: 떨어진 낙엽을 주워 나무에 매달아 준다.
⁕허진권: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주변의 낙엽을 긁어모아 놓는다. ⁕박수용: 태양빛에 나무를 비추어 흰 종이 뒷면에 그림자 상을 나타내 본다.
⁕정장직: 산성에 떨어진 단풍잎을 주어 손바닥에 펼쳐 그 앞에 대어본다.
이상은 1981년 가을 공주산성공원에서 열린 제2회 <야투(野投>전 도록에 수록된 작품계획서중에서 뽑은 것이다. 그 어떤 것에서도 인공적이거나 작위적인 느낌을 찾아볼 수 없다. 들과 산, 강, 호수, 바다 등등 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과 더불어 최소한의 행위를 하는 자연미술가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다음은 오직 신체만을 사용하여 자연의 산물을 이용,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작업에 옮긴 사례들이다.
⁕킴 라트나우(Kim Rathnau/독일), 자연에 서식하는 민달팽이들을 나체의 몸에 붙이고 누워있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FranceⅢ‧GermanyⅢ‧MogoliaⅡ‧China‧KoreaⅤ.
⁕카렌 마처 네스타(Karen Macher Nesta)/페루), 바닷가 개펄에 누운 상태에서 긴 머리카락에 해조류를 연결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FranceⅢ‧GermanyⅢ‧MogoliaⅡ‧China‧KoreaⅤ.
⁕김가빈: 숲속에서 나뭇잎 하나를 따 손바닥 위에 놓고 길거나 둥근 잎의 형태에 맞춰 그 위에 작은 붉은 열매들을 일렬 혹은 원형으로 배열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FranceⅢ‧GermanyⅢ‧MogoliaⅡ‧China‧KoreaⅤ.
⁕허샘이나: Y자 형의 굵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V자의 가지 사이로 손만 내밀어 나무를 타고 오르는 넝쿨식물과 접촉하는 동작을 취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0-FranceⅡ‧Mogolia‧KoreaⅣ.
⁕고요한: 숲속에서 아카시아 잎 하나를 손에 쥐고 태양을 향해 뻗어 그 그림자가 팔뚝에 드리우게 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0-FranceⅡ‧Mogolia‧KoreaⅣ.
⁕친조릭 렌친-오치르(Chinzorig Ryenchin-Ochir): 몸골 초원에서 나체로 풀위에 누운 상태에서 국부에 네모난 뗏장을 떠 올려놓은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0-FranceⅡ‧Mogolia‧KoreaⅣ.
⁕전원길: 아람드리 나무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데 오른 팔은 나무 위에 있고 왼팔은 흰색으로 그리는 행위/공주산성공원, 1986.
이상 살펴본 것처럼, 자연미술가들은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줌으로써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이룬다. 이때 비로소 만믈의 요람이자 존재의 지반인 자연은 인간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된다.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두께, 그 가운데의 모든 생명력을 예찬”하는 야투(野投)의 창립선언문의 한 귀절이 자연예술가들의 행위에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미술가들은 작업을 마친 뒤 작품을 자연에 맡긴 채 돌아온다. 자연의 일부인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작품들은 팔 수 없다. 아니, 팔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연미술가들이 취하는 이 반(反)상업적‧반(反)자본주의적 태도는 각종 오염으로 신음하는 지구의 종말에 대한 일종의 ‘우려(Sorge/Martin Heidegger)’ 이다.
Ⅴ.
자연미술 그룹 야투(Yatoo)가 2014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는 현장 미술의 성격이 강한 행사다. 사실 야투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뻗어나간 것은 2011년의 야투 아이(Yatoo-i/Yatoo International Project)와 2013년에 공주대학교에서 열린 세계자연미술기획자대회에서 국제적인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의견을 수렴하고 이듬해에 출범한 GNAP를 통해서였다.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는 자연미술(Jayeonmisul/Nature Art)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사유한 결과물을 한자리에 모아 발표한다. 아울러 이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 잡은 이 행사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몽골, 중국, 리투아니아, 남아공화국 등지에서 자연미술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아래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의 한 예를 소개하자면, 2020년도의 행사가 있다. 멀리 프랑스에서 온 올리비에 위에(Olivier Huet)와 마그릿 노이엔도르프(Margrit Neuendorf)를 포함, 고승현, 고요한, 김가빈, 문수빈, 박주영, 오더, 임혜옥, 정지연, 최용선, 허강, 허진권, 홍지희 등 14명의 참여작가들은 3박 4일간에 걸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일행은 공주의 금강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증도, 김제의 새만금 등지를 순회하며 자연의 품에 안겨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에 몸을 던지고(野投) 자연과 함께 하는 이 자연동화의 순간이야말로 세계 구원의 첫 발자국임을 몸소 깨닫게 된 것이다. 참으로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이 절체절명의 팬데믹 위기에 대응하는 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순수한 행위에서는 오늘날 위기의 주범인 문명을 찬양하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문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류 발생의 시원인 자연의 소중함을 인류에게 일깨우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자연의 품에 안기려는 이유이다.
지난 45년 동안 야투의 회원들이 보여준 행위는 자연의 야생성을 환기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원초적 행위는 초기에는 너무 일러 사람들이 그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의 저널은 이들의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변방에서 시작한 이 자연미술 운동은 이제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동을 거는 중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지구촌을 둘러싼 환경도 한몫을 했다.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날로 악화되는 지구촌 환경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함은 물론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야투 회원들의 활동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다소 길지만 그 의의를 상기시키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다.
“생태계의 위기가 운위되는 지금 미술계에서 야투의 활동만큼 그 의미가 부각된 행사도 드물다. 생수라는 단어조차 없던 80년대 초반에 시작하여 이제 생수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인류는 살고 있다. '야투'는 그 시기를 고스란히 겪어왔다. 그리고 이제 시대의 증언자로서 야투는 자연 위기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세계미술사에서 이런 흐름은 이제까지 없었다.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대지미술(Land Art)’이 나타났지만, 작품의 제작을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반면에 야투의 회원들이 즐겨 하는 것은 맨손으로 자연의 품에 안겨 작은 규모의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큰 범주에서 볼 때 자연의 모방에 가깝다. 새가 티끌을 모아 작은 집을 짓듯이, 어떤 작가는 나뭇가지를 모아 작은 집을 만들었다. 파도가 모래밭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는 것처럼, 어떤 작가는 해변에 굴러다니는 통나무를 주워 백사장에 긴 선을 그었다. 나뭇가지를 모아 만든 작은 집이건, 백사장에 남긴 선이건, 언젠가는 파도에 씻겨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연 속에서 작품을 만든 후 현장에 남긴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하나의 퍼포먼스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되며, 후에 전시가 되는 것은 대개 물질, 즉 작품보다는 시각적 자료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금전적 가치보다는 아카이브 형태의 자료적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개념미술이나 일시적 행위에 의존하는 퍼포먼스적 산물에 가깝다.” 13) 사진이나 영상을 비롯한 아카이브 자료만 남긴 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행위는 점차 소멸될 것이다. 아니 시간의 영속성에 비춰보면 사진이나 영상조차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보존과학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원본이 사라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부본(副本)이 지배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행위를 하는 순간의 열기, 흥분, 인간적 체취, 관조적인 느낌과 그것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 등이 묻어있는 행위의 흔적으로서의 작품은 소멸된다.
야투 운동이 시작된 1980년대 초만 해도 완전히 아날로그 시대였으나, 그 후 컴퓨터와 인터넷이 주도한 디지털 문명이 인류를 지배하면서 세계가 한 가족이 되었다. “We are the world.”(1985)라는 유명한 팝 음악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젠 전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된 시대다. 그것을 주도한 것이 바로 인터넷 혁명이며, 얼책(facebook), 인스타그램, 트위터, X와 같은 SNS 매체들이다. 모바일폰을 손에 쥔 지구촌 사람 누구나 이러한 혁명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인류문명의 발전에 빈비례하여 자연은 더욱 황폐해져 갔다. 이제는 지구촌 누구나 기후와 생태의 위기를 염려하는 시대다. 또 하나가 있다. 이른바 ‘A.I(Artificial Intelligence)’ 또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로 대변되는 인공지능의 시대다. 이른바 ‘Chat G.P.T’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기반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의해 심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에게 최후의 보루로 남겨진 마음의 영역이 미래에 과연 인공지능을 탑재한 사이보그의 그것으로 대체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여기 자연이 있다. 그것은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어 인간에게 따뜻한 품이 돼 준다. 그 품은 어머니의 품이다.
야투의 몸짓은 그런 어머니의 품을 지키고자 하는 ‘저항’의 몸짓이자, 자연 환기의 몸짓이다. 다같이 자연을 지키자!
한국미술사상, ‘몸’을 이용하여 순수하게 자연에 접근해 들어간 최초의 미술단체 <야투(野投/Yatoo)>가 내년이면 어느덧 창립 45주년을 맞이한다. 매우 뜻깊은 해이다. 전 세계 미술의 역사를 봐도 <사계절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야투와 같은 자연미술 운동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강이나 산, 들, 바다로 나가 자연에 몸을 맡긴 야투의 회원들은 이제 총 168회에 해당하는 <사계절연구회>의 기나긴 역사를 맞이하였다.
<야투>는 1981년 공주에서 결성된 자연미술 단체다. 공주와 대전에 거주하는 젊고 패기에 넘치는 20-30대 스무 명의 작가들이 자연을 주제로 모여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창립회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희순, 곽문상, 고승현, 김영철, 김지숙, 나경자, 박수용, 신현태, 이동구, 이순구, 이응우, 임동식, 조충연,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함상호, 허 강, 허진권, 홍오봉(가나다 順)
1981년 8월 14일 이 일단의 젊은이들이 공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 철교 아래 백사장에 모였다. 야투의 ‘역사적’ 출범이다. 1961년생부터 1945년생에 이르는 이들은 19일까지 5박 6일간 야외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작업하였다. 1)
당시 이들이 자연에서 행한 작업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도록에 기술된 작업내용 중에서 일부를 골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승현: 폭 4m, 길이 7m의 비닐에 1m 정방의 네모난 틀을 만들어 씌우고 이것을 여러 개 사장에 설치한다. 강바람의 변화에 의해 네모난 틀에 씌워진 비닐은 팽창과 수축을 계속하며 각양의 동태와 소리를 낸다.
⁕김영철: 금강에 와서 야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 자택 출발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구상,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현장에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물과 그늘을 찾아 심호흡을 하고, 산책도 하며 완전 휴식을 취하다 상경하는 무작위한 상태를 보인다.
⁕김지숙: 금강의 게를 여러 마리 잡아서 오색의 풍선에 매단다. 게의 움직임에 따라 풍선의 바람에 의한 진동에 따라 금강 변은 경관을 이룬다.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물에 띄울 때 물속의 게의 움직임에 따라 풍선도 아이들도 함께 움직인다.
⁕정봉숙: 강의 제방쪽 풀숲에 다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한다.
⁕신현태: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아 살게 한다.
⁕이동구: 휘어지는 가느다란 나무로 사장에 생존하는 풀포기 하나를 중심으로 원으로 울타리를 설치한다.
⁕이응우: 금강물 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어 물에서 모래로 돌다리를 놓아가며 나온다.
⁕허 강: 나무배 50여 개에 촛불을 켜 야간에 강에 띄운다.
⁕허진권: 완전 탈의한 나신이 되어 물에 뛰어든다. 한동안 수영도 하며 소리도 지르다가 모래로 나와 모래로 전신을 덮은 다음 뒹구는 동작으로 물에 잠긴다.
이상의 내용은 당시의 현장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기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야투> 창립 회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우선 눈여겨봐야 할 공통적인 사실은 예시된 문장 전체에서 주어가 생략됐다는 점이다. 2)
그러면서도 말이 통하는데 ‘3표론’을 주창한 철학자 박동환에 의하면, “주어의 자리에 어떤 정체성도 결정하지 않고 미지의 사태로 남겨두고 기다리는 태도가 지배하는 한국어는, 인간중심주의의 철학체계를 만들어내기 이전의 사유가 화석으로 남아있는 언어라는 것” 3)이다.
이를 참고삼아 정리하면, 야투 작가들의 작업 기술(記述) 방식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목적어+술어 예)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아 살게 한다.(주어의 생략)
이러한 문장구조는 주어가 생략되면 비문(非文)이 되는 영미권 언어의 서술방식과 대조적이다.
예) met him(x)
I met him(o)
말하자면 주체(I)가 생략되면 곧 비문이 되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명령문의 경우이다.
예) Go. Eat, etc.
그런데 앞에 든 예문에서 도대체 누가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인가? ‘나’인가, 영수인가, 아니면 순희인가?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정봉숙의 문장을 예로 들면, “(순희는) 강의 제방쪽 풀숲에 다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한다.”는 문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작가 정봉숙이 순희에게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지만, 도록에 수록되는 야투의 텍스트 기술 관행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문장 기술에서 주어(나)가 생략돼도 (그 일을 수행하는) ‘나’의 현실과 일치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에서 주어인 ‘I’를 소거하면, 명령형이 되거나(think), 비문(非文)이 된다(therefore am). 그러나 한국어는 다르다. ‘야투’의 경우 주어가 생략돼도 비문이 되지 않으며,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가 유지되고, 자연 속에 녹아든다.
이번에는 훗날 행해진 사계절연구회 회원의 경우를 보자. “여러 곳의 나뭇가지에 먹물이 묻은 붓을 줄로 매달에 놓고 바닥에는 흰 종이를 설치한 다음에 바람결에 맡긴다(강희준)”는 기술(記述)이 있다 4). 여기서 먹물이 묻은 붓을 줄에 매단 주체는 분명 작가 자신이지만, 문장에는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문장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종이에 붓질을 하는 주체도 작가인가? 아니다. 바람인 것이다. 작가(강희준)는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줌으로써(최소한의 개입), 자연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하도록 ‘맡긴’ 것이다.
행위에서 주어가 생략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은 언어 이전의 자연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시원적 몸짓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임동식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자연을 바라볼 때 마음을 비우고 나갔죠. 무엇을 하려는 목적으로 나가기보다는 준비없는 마음으로, 비우는 마음으로 현장에 나가 일깨움 비슷한 것이 일어나면서 좋은 작업이 나오는 그런 방향을 선택했죠. 즉 무소유적 마음으로 바라본 거죠.” 5)
이는 이 글의 서두에 길게 인용한 작가노트에서 김영철이 한 말, 즉 “금강에 와서 야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 자택 출발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구상,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현장에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물과 그늘을 찾아 심호흡을 하고, 산책도 하며 완전 휴식을 취하다 상경하는 무작위한 상태를 보인다.”는 대목과도 통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야투 회원들의 작업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놀이정신의 발현이다. 김지숙의 풍선놀이처럼 관객참여를 동반한 것이든, 혼자서 하는 것이든(강희순, 곽문상, 나경자, 박수용, 이동구, 이순구, 조충연) 작업의 근간에는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모든 문화현상의 기원을 놀이로 본 ‘놀이정신’이 깔려 있다(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 그런 까닭에 이들이 하는 작업은 자연과 나누는 대화(고승현, 김영철, 신현태, 이응우, 임동식,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홍오봉)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독백(함상호, 허강, 허진권)이기도 하고, 근원적으로는 고향(자연)을 향한 회귀의 몸짓인 것이다.
1981년 야투 창립 이후 지금까지 총 168회에 걸쳐 이루어진 사계절연구회 회원들의 자연미술 워크숍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위는 이른바 최소한의 몸짓이다. 이는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주는 행위(최소한의 개입)를 비롯하여 무위를 지향하는 태도, 놀이정신의 발현, 고향(자연)을 향한 회귀의 몸짓 등과 더불어 국내외의 자연미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업태도이자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과 소통을 시도한다. ‘야투(野投)라는 말 그대로 들(野)에 (몸을) 던짐으로써 인간중심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상징되는 근원으로의 회귀를 실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의 소통의 근본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1981년, 한국의 충남 공주에서 혈기왕성한 20대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발원한 ‘야투(野投/Yatoo)’의 근본정신은 자연 동화(同化)에 있다. 기억하건대, 80년대 초반이면 ‘생수’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산이나 숲에서 흐르는 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탈이 없던 시대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인 시대, 즉 자연과 인간이 동화(同和)된 시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의 자연관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정복이 낳은 인간과 자연과의 불화가 아니라, 화합을 이루고 친연(親緣)을 유지하는 동화(同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이 낳은 자연에 대한 저항의 발길질은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성(modernity)의 개념이 발생한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연정복과 자연 경시의 풍조가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반면에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존중과 동화(同化)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자연관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동양의 전통 산수화이다.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는 동양의 산수화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이 작게 표현돼 있는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겸손한 태도가 잘 드러난 사례이다.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니 ‘안분지족(安分知足)’과 같은 도교적 삶의 태도들은 다 같이 청빈을 삶의 실천윤리로 삼으면서 자연과의 동화(同和)를 꾀한 사례들이다.
인간을 우주 속에 내던져진 티끌처럼 작은 요소로 파악한 이러한 세계관에서 자연이란 ‘태초의 대지’인 동시에 ‘만물의 요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대지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부턴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근래 들어 그 징후가 뚜렷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의 ‘팬데믹(Pandemic)’ 상황이었다.
Ⅱ.
졸졸 흐르는 옹달샘의 물이 작은 시내를 이루고, 시내는 다시 다른 지류들의 물과 합쳐 강이 되고, 강은 이제 ‘세계’라는 바다를 향해 멀고도 긴 항해를 하는 중이다 6). 거선(巨船)의 이름은 ‘야투호(野投號)’이다.
세계미술사에 유례가 없는 야투의 행보를 놓고 첫 시발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세계사의 지평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팬데믹 상황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자연과 생태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던 청년작가들의 활동은 매우 중대한 의의(意義)를 지니기 때문이다.
야투의 회원들이 산이나 들로 나가 활동을 하던 시기는 산업화시대를 연 70년대에 이어서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향해 질주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사람들이 그 폐해를 피부로 느낄 만큼 환경과 산업재해가 심각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당시 야투 회원들의 활동이 화단에서 제대로 인식, 평가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Ⅲ.
현재 (사)한국자연미술가협회-野投로 돼 있는 단체의 명칭은 첫 창립전이 열린 1981년에는 ‘야투 야외현장미술연구회’였다. 이 명칭으로 전시가 끝난 뒤 창립전의 도록이 발간되었다. 1981년 여름에 열린 창립전 도록에 다음과 같은 야투의 선언문이 실렸다. 7)
“야투는 자연과의 신선한 접촉을 통하여 야외미술을 연구하는 모임으로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두께, 그 가운데의 모든 생명력을 예찬한다. 순수한 자연과 동행하는 투명한 예술의 본격연구모임 야투는 사계절을 통하여 연구회를 갖고 작품집을 발간하여 의식의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방법론을 개진한다.
야투는 자연공간에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사람들의 열화같은 의욕과 폭발적인 정열에 힘입어 연구회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계속 야외공간에서 들에 핀 야생화와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연구됨으로써 좋은 작품들이 산탄총을 쏘아대듯이 발표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들이 자기를 내어주고 있고 들에서 크고 사는 자들의 꿈 또한 넓고 깨끗함으로 야투는 폭넓고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발상임을 믿는다.
우리는 풀포기의 떨림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무결에 스치는 바람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여름의 열기, 가을의 드맑고 높은 하늘, 겨울의 차디찬 기온은 물론 인간이 갖는 모든 동작과 응시, 심리적 문제, 다각적 면에서 생생하게 부딪치는 모든 현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작업의 대상임을 밝히며 위의 제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설치하고 행동함은 우리가 희구하는 바 선과 진실, 아름다움, 순수성에의 접근, 사변감각적 탐닉에 속한 눈, 미술이라는 기존방법론에 묶인 두뇌, 실내공간적 차원에 닫혀진 생명의 원음 등을 풀고 되찾아 열기 위함이며, 동서남북이 확 열려진 커다란 공간과 변화되는 시간을 사계절의 선에서 바라보는 야투의 율동 속에서는 자연처럼 강하고 선하며 깨끗하고 맑은 의식을 얻을 것이라는 바램이 그 이유이다.”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
“Yatoo” Outdoor Fine Arts Study Association
자연을 찬미하고 동경하는 <야투>는 열린 단체이다. 언제든지 입‧탈퇴가 가능한 느슨한 조직이기 때문에 1981년 가을 창립이후 전시가 거듭되면서 적잖은 회원변동이 있었다. 초창기 신입회원의 추이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2회 1981년 가을(11.6-7, 공주산성공원): 강정헌, 고현희, 안치인, 유병호, 이계길, 이두한, 이종협, 전희도, 정길호, 정영진, 정장직, 홍상문
제4회 1982년 봄(연기군 나성리 금강백사장): 홍명섭 등
제5회 1982년 여름(8.9-13, 공주 청벽 금강백사장): 신남철, 유동조, 이기방, 전원길
제6회 1982년 가을(공주산성공원): 김명식, 김원희
제8회 1983년 봄(4.30-5.1, 계룡산국립공원): 이경우, 이정훈, 유병호, 히로시 사토
제11회 1984년 겨울(1.23-24, 공주금강백사장), 김세현, 방효성, 이성재
제13회 1984년 여름(8.6-10, 서해안 안면도): 복종순, 한정례
제22회 1986년 가을(11.8-9, 공주산성공원): 김해심
제24회 1987년 봄(4.25-26, 공주산성공원): 유현걸, 백준기 등
<야투>는 그렇게 해서 점차 영역을 넓혀나갔다. 처음에는 공주와 금강 주변에서 시작하여 충청도를 거쳐 전국을 대상으로 나아갔으며, 마침내 아시아를 거쳐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세월이 무려 45년에 이른다. 초창기 20-30대의 청춘들이 이젠 60-80대의 장‧노년에 이르렀다. 이른바 몽(蒙)의 괘이다.
45년에 걸친 야투의 역사에서 야투는 대략 다섯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1991 금강국제자연미술제의 창설, 두 번째는 2004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창설, 세 번째는 2010년 야투국제레지던스프로그램의 창설, 네 번째는 2011년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Yatoo-i)의 창설, 다섯 번째는 2014년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GNAP)의 창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야투의 자연미술운동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고 의의가 큰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사계절연구회이다. 사계절연구회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야투의 회원들이 자연속으로 직접 들어가(野投) 자연의 일부가 돼 미술활동을 벌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다.
사계절연구회8) 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의 기후조건에 착안, 자연의 변화에 따라 작품의 내용 또한 변하는 워크숍을 벌인다. 봄에는 봄의 자연적 특성이 있는데, 이는 나머지 계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봄에는 여름과 같은 성숙기의 나뭇잎을 이용할 수 없고 겨울에는 가을의 단풍을 구하기 어려우니, 제철 음식처럼 그때그때의 사물이 제격이다. 이것이 바로 야투 회원들이 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순응’과, 자연과 인간의 마음과의 ‘감응’은 생태적 ‘소통’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따라서 사계절연구회(야투)의 활동은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이 낳은 계몽사상의 핵심인 자연정복과는 상반되는 자연과의 상생이 목적이며, 자연이 인간적 삶의 토대이자 거역할 수 없는 모태임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연에 나아감에 있어서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임하며, 행위 후에는 행위의 흔적인 작품을 자연에 맡기고 돌아오는 것이다.
야투 회원들의 이러한 자연친화적 행위에는 노자가 말한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도는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연을 본받는다.”는 의미의 이 도법자연은 노자의 도덕경 제25장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는 이를 풀이하여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다. 여기서 보이는 사람(人)-땅(地)-하늘(天)-도(道)의 관계는 다시 도-사람-땅-하늘로 이어져 끝없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사계절연구회가 활동의 배경으로 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 또한 순환의 원리가 생명이다. 겨울에 꽃이 피고 여름에 눈이 오면 사계절이라 할 수 없다. 봄이면 파종을 해야 하는데 땅이 꽁꽁 얼어있으면 씨를 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수십 년간 지구상에서 벌어진 이상기후는 자연의 이법이 헝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 우리가 실감하듯이, 봄과 가을이 옛날에 비해 극히 짧고 한국의 기후가 점차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어 가는 현실은 이러한 현상과 무관치 않다.
산업혁명 이후 석탄 연료 중심의 산업구조는 필연적으로 환경의 파괴를 불러왔다. 여기에 덧붙여 석유산업은 비닐을 비롯하여 각종 합성수지 등 산업제품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문제를 낳았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은 메탄가스의 남용과 함께 오존층의 파괴를 가져왔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는 남북극의 빙하는 물론 히말라야 등 고산지대의 만년설 등 빙하기 때부터 존재해 온 얼음이 녹아 지구상의 해수면을 높이는 대재앙을 초래했다. 9)
. 전 세계 국가들이 화석연료 사용의 비중을 높이자 북극은 다른 지역보다 온난화가 2-3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두께가 3km에 달하는 그린란드의 얼음을 포함, 지구 전체의 빙하가 녹으면 지구 해수면의 높이가 약 7미터 상승하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10)
Ⅳ.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야투’의 회원들이 벌이는 행위가 세계사적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행위의 대부분이 자연에 대한 외경심의 표현이며, 그 표현은 신체(몸)를 통한 ‘최소한의 개입’이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다다(Dada) 이후 퍼포먼스의 역사를 관류해 온 기존의 다양한 퍼포먼스들과 다른 점이다. 그것도 약속이나 한 듯이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서로 닮는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의 약속인데, 야투, 즉 사계절연구회 회원들이 그동안 벌여온 행위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자연미술 11) 가들은 자연을 매개로 자연에 동화되는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는 가운데(자연존중사상) 각자 개성이 있는 예술적 행위를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공통적 특징을 보인다. 첫째, 서사(narrative)와 스토리의 배제(반(反)연극성(anti-theatricality), 둘째, 자연물을 통한 간단한 상징과 기호의 제시 및 이를 통한 소통의 의지표출, 셋째, 문명적 물질의 거부(반(反)문명), 넷째, 몸을 통한 행위의 원초성 표출, 다섯째, 주거지에로의 회귀 의지, 여섯째, 자연물을 이용한 최소한의 행위지향, 일곱째, 가공되지 않은 생짜의 자연물 사용과 무작위성(無作爲性:애써 꾸미지 않음) 표출 등이다.” 12) 이를 다시 뭉뚱그려 요약하자면 ‘신체(몸)를 통한 최소한의 개입’이란 말로 환원된다. 이 경우, 신체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자연에 ‘신체’를 빌려주는 것이 아닐까? 빌려주되, 주체인 ‘나’가 소거된 상태에서 ‘겸손’하게 빌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음의 진술들을 보자.
⁕정길호: 떨어진 낙엽을 주워 나무에 매달아 준다.
⁕허진권: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주변의 낙엽을 긁어모아 놓는다. ⁕박수용: 태양빛에 나무를 비추어 흰 종이 뒷면에 그림자 상을 나타내 본다.
⁕정장직: 산성에 떨어진 단풍잎을 주어 손바닥에 펼쳐 그 앞에 대어본다.
이상은 1981년 가을 공주산성공원에서 열린 제2회 <야투(野投>전 도록에 수록된 작품계획서중에서 뽑은 것이다. 그 어떤 것에서도 인공적이거나 작위적인 느낌을 찾아볼 수 없다. 들과 산, 강, 호수, 바다 등등 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과 더불어 최소한의 행위를 하는 자연미술가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다음은 오직 신체만을 사용하여 자연의 산물을 이용,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작업에 옮긴 사례들이다.
⁕킴 라트나우(Kim Rathnau/독일), 자연에 서식하는 민달팽이들을 나체의 몸에 붙이고 누워있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FranceⅢ‧GermanyⅢ‧MogoliaⅡ‧China‧KoreaⅤ.
⁕카렌 마처 네스타(Karen Macher Nesta)/페루), 바닷가 개펄에 누운 상태에서 긴 머리카락에 해조류를 연결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FranceⅢ‧GermanyⅢ‧MogoliaⅡ‧China‧KoreaⅤ.
⁕김가빈: 숲속에서 나뭇잎 하나를 따 손바닥 위에 놓고 길거나 둥근 잎의 형태에 맞춰 그 위에 작은 붉은 열매들을 일렬 혹은 원형으로 배열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FranceⅢ‧GermanyⅢ‧MogoliaⅡ‧China‧KoreaⅤ.
⁕허샘이나: Y자 형의 굵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V자의 가지 사이로 손만 내밀어 나무를 타고 오르는 넝쿨식물과 접촉하는 동작을 취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0-FranceⅡ‧Mogolia‧KoreaⅣ.
⁕고요한: 숲속에서 아카시아 잎 하나를 손에 쥐고 태양을 향해 뻗어 그 그림자가 팔뚝에 드리우게 하는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0-FranceⅡ‧Mogolia‧KoreaⅣ.
⁕친조릭 렌친-오치르(Chinzorig Ryenchin-Ochir): 몸골 초원에서 나체로 풀위에 누운 상태에서 국부에 네모난 뗏장을 떠 올려놓은 행위/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0-FranceⅡ‧Mogolia‧KoreaⅣ.
⁕전원길: 아람드리 나무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데 오른 팔은 나무 위에 있고 왼팔은 흰색으로 그리는 행위/공주산성공원, 1986.
이상 살펴본 것처럼, 자연미술가들은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줌으로써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이룬다. 이때 비로소 만믈의 요람이자 존재의 지반인 자연은 인간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된다.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두께, 그 가운데의 모든 생명력을 예찬”하는 야투(野投)의 창립선언문의 한 귀절이 자연예술가들의 행위에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미술가들은 작업을 마친 뒤 작품을 자연에 맡긴 채 돌아온다. 자연의 일부인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작품들은 팔 수 없다. 아니, 팔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연미술가들이 취하는 이 반(反)상업적‧반(反)자본주의적 태도는 각종 오염으로 신음하는 지구의 종말에 대한 일종의 ‘우려(Sorge/Martin Heidegger)’ 이다.
Ⅴ.
자연미술 그룹 야투(Yatoo)가 2014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는 현장 미술의 성격이 강한 행사다. 사실 야투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뻗어나간 것은 2011년의 야투 아이(Yatoo-i/Yatoo International Project)와 2013년에 공주대학교에서 열린 세계자연미술기획자대회에서 국제적인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의견을 수렴하고 이듬해에 출범한 GNAP를 통해서였다.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는 자연미술(Jayeonmisul/Nature Art)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사유한 결과물을 한자리에 모아 발표한다. 아울러 이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 잡은 이 행사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몽골, 중국, 리투아니아, 남아공화국 등지에서 자연미술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아래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의 한 예를 소개하자면, 2020년도의 행사가 있다. 멀리 프랑스에서 온 올리비에 위에(Olivier Huet)와 마그릿 노이엔도르프(Margrit Neuendorf)를 포함, 고승현, 고요한, 김가빈, 문수빈, 박주영, 오더, 임혜옥, 정지연, 최용선, 허강, 허진권, 홍지희 등 14명의 참여작가들은 3박 4일간에 걸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일행은 공주의 금강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증도, 김제의 새만금 등지를 순회하며 자연의 품에 안겨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에 몸을 던지고(野投) 자연과 함께 하는 이 자연동화의 순간이야말로 세계 구원의 첫 발자국임을 몸소 깨닫게 된 것이다. 참으로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이 절체절명의 팬데믹 위기에 대응하는 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순수한 행위에서는 오늘날 위기의 주범인 문명을 찬양하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문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류 발생의 시원인 자연의 소중함을 인류에게 일깨우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자연의 품에 안기려는 이유이다.
지난 45년 동안 야투의 회원들이 보여준 행위는 자연의 야생성을 환기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원초적 행위는 초기에는 너무 일러 사람들이 그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의 저널은 이들의 활동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변방에서 시작한 이 자연미술 운동은 이제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동을 거는 중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지구촌을 둘러싼 환경도 한몫을 했다.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날로 악화되는 지구촌 환경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함은 물론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야투 회원들의 활동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다소 길지만 그 의의를 상기시키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다.
“생태계의 위기가 운위되는 지금 미술계에서 야투의 활동만큼 그 의미가 부각된 행사도 드물다. 생수라는 단어조차 없던 80년대 초반에 시작하여 이제 생수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인류는 살고 있다. '야투'는 그 시기를 고스란히 겪어왔다. 그리고 이제 시대의 증언자로서 야투는 자연 위기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세계미술사에서 이런 흐름은 이제까지 없었다.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대지미술(Land Art)’이 나타났지만, 작품의 제작을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반면에 야투의 회원들이 즐겨 하는 것은 맨손으로 자연의 품에 안겨 작은 규모의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큰 범주에서 볼 때 자연의 모방에 가깝다. 새가 티끌을 모아 작은 집을 짓듯이, 어떤 작가는 나뭇가지를 모아 작은 집을 만들었다. 파도가 모래밭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는 것처럼, 어떤 작가는 해변에 굴러다니는 통나무를 주워 백사장에 긴 선을 그었다. 나뭇가지를 모아 만든 작은 집이건, 백사장에 남긴 선이건, 언젠가는 파도에 씻겨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연 속에서 작품을 만든 후 현장에 남긴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하나의 퍼포먼스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되며, 후에 전시가 되는 것은 대개 물질, 즉 작품보다는 시각적 자료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금전적 가치보다는 아카이브 형태의 자료적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개념미술이나 일시적 행위에 의존하는 퍼포먼스적 산물에 가깝다.” 13) 사진이나 영상을 비롯한 아카이브 자료만 남긴 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행위는 점차 소멸될 것이다. 아니 시간의 영속성에 비춰보면 사진이나 영상조차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보존과학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원본이 사라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부본(副本)이 지배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행위를 하는 순간의 열기, 흥분, 인간적 체취, 관조적인 느낌과 그것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 등이 묻어있는 행위의 흔적으로서의 작품은 소멸된다.
야투 운동이 시작된 1980년대 초만 해도 완전히 아날로그 시대였으나, 그 후 컴퓨터와 인터넷이 주도한 디지털 문명이 인류를 지배하면서 세계가 한 가족이 되었다. “We are the world.”(1985)라는 유명한 팝 음악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젠 전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된 시대다. 그것을 주도한 것이 바로 인터넷 혁명이며, 얼책(facebook), 인스타그램, 트위터, X와 같은 SNS 매체들이다. 모바일폰을 손에 쥔 지구촌 사람 누구나 이러한 혁명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인류문명의 발전에 빈비례하여 자연은 더욱 황폐해져 갔다. 이제는 지구촌 누구나 기후와 생태의 위기를 염려하는 시대다. 또 하나가 있다. 이른바 ‘A.I(Artificial Intelligence)’ 또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로 대변되는 인공지능의 시대다. 이른바 ‘Chat G.P.T’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기반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의해 심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에게 최후의 보루로 남겨진 마음의 영역이 미래에 과연 인공지능을 탑재한 사이보그의 그것으로 대체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시기는?
여기 자연이 있다. 그것은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어 인간에게 따뜻한 품이 돼 준다. 그 품은 어머니의 품이다.
야투의 몸짓은 그런 어머니의 품을 지키고자 하는 ‘저항’의 몸짓이자, 자연 환기의 몸짓이다. 다같이 자연을 지키자!
- 1차 게재: 『야투 45년사』
1) “야투 자연미술연구회는 1981년 그해 여름 공주 금강 백사장에서 5박 6일 동안, 강변에 설치한 야외숙소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함께 작품연구를 시작한 20명의 젊은 회원들로부터 창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기간 중에는 청명한 날씨에서부터 심한 천둥 번개를 동반한 강풍이 몰아치기까지 예기치 못한 변화가 잦았고 흐르는 금강물은 낮에는 물이 줄고 밤에는 크게 불어났으며 밤낮으로 들려오는 풀벌레의 소리 등등 자연의 소리가 충만하였다. 이와 같은 일절의 자연현상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항상 신선한 감흥과 의식을 깨우쳐주었고, 더불어 자기표현과 그 실현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
고승현, 충남미술그룹소개 야투자연미술연구회, 충남예술 12, 1987, 36쪽.
2) 1981년 창립전 이후 발행된 ‘야투’의 도록에 실린 작가노트에는 모두 주어가 생략돼 있는데, 이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3) 철학박사 이상수의 글 중에서, <철학을 넘어선 철학자 박동환의 특별한 선집>, 한겨레신문, 2017년 3월 30일자(수정) 네이버 검색, 2022. 12. 5. 굵은 체의 기운 글자는 필자의 강조임.
4) 1984년 ‘야투(野投’ 야외현장미술연구회 도록, 1984 겨울 공주 금강 백사장, 1984 봄 공주산성공원 합본호. 쪽 표기 없음.
5) 임동식, 2008년 11월 13일 인터뷰, 조상영,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다빈치기프트, 2009, 132쪽.
6)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몽(蒙)의 괘이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 몽의 괘는 ‘철들지 않은 어린이’가 점차 세계를 인식하고 발전해 나가는 계몽(啓蒙)의 의미를 지닌다. 가시덤불에 가려 어두컴컴한 상태에 처한 옹달샘은 처음에는 졸졸 흐르다 점차 시내가 되고 강이 되면서 때로는 거센 소용돌이를 이루기도 하나 종래는 평안한 상태에서 보다 큰 세계인 바다로 진입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본정신이 있으니, 사물의 근본이 되는 원리 즉,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바로 그것이다.
7) 야투 창립회원인 임동식이 쓴 이 선언문은 이후 1985년(9권)까지 거듭 수록되었음. 1981년 여름(창립전) 야투(野投) 야외현장미술연구회, 기간 1981. 8. 14-19, 장소: 공주금강백사장. 원래는 국한문 혼용체이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필자가 한글로 고치고 문맥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구두점을 삽입함.
8) ‘사계절연구회’는 야투 활동 초기부터 봄연구회, 여름연구회, 가을연구회, 겨울연구회 등 계절마다 붙인 이름을 총칭하는 말이다. 2025년 기준 168회에 이른다. 이 연구회의 활동은 야투의 핵심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으로 야투의 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다.
9) 이 문장은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미디어 아티스트 이경호와 필자가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자유의 여신상이 해수에 잠기는 이경호의 미디어 영상작품(데드라인 1.5/Deadline 1.5)은 매우 충격적이다.
10)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지구촌의 우려는 기후협정에 관한 다양한 국제회의를 낳았다. 1972년 6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슬로건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를 비롯하여 1992년의 ‘유엔환경개발회의’(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리우선언, 생태계 보호 노력 강화, 환경영향평가제 도입, 생물다양성 협약,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기후변화협약 등등), 1997년 기후변화협약 제3차(일본 교토/교토의정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의무 명기 등), 2015년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1/프랑스 파리), 파리협정, 지구 평균온도 상승 섭씨 2도 목표달성 노력 등등. 2021년 영국 글래스고 기후 합의, 2050년까지 전 세계가 탄소 중립 실현, 1.5도 상승 폭을 유지하자는 합의 도출. 온실가스 주 배출원이자 화석연료를 대표하는 석탄의 단계적 감축 합의 등등
11) 자연미술(Jayeonmisul/Nature Art) : (사) 한국자연미술가협회가 제공한 ‘야투의 연혁과 역사’라는 문건에 의하면 창립 초기에 사용되던 ‘야외현장미술’이라는 용어가 ‘자연미술’로 바뀌게 딘 계기는 야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인 고승현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창립 초기의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는 ’야투자연미술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야투를 둘러싼 다양한 명칭 변경의 역사적 과정과 내용은 이 문건을 참고할 것. 1988년 야투 회의록, 1월 29일자 참조.
12) 윤진섭, <자연과의 동화(同化)룰 통한 동화(同和) 의지>, 2021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프랑스Ⅲ, 독일Ⅲ, 몽골Ⅱ, 중국, 한국Ⅴ, 도록, 10쪽.
13) 윤진섭,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통한 동화(同和) 의지>, 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2021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프랑스Ⅲ·독일Ⅲ·몽골Ⅱ·중국·한국Ⅴ, 9쪽. YATOO, 2021
고승현, 충남미술그룹소개 야투자연미술연구회, 충남예술 12, 1987, 36쪽.
2) 1981년 창립전 이후 발행된 ‘야투’의 도록에 실린 작가노트에는 모두 주어가 생략돼 있는데, 이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3) 철학박사 이상수의 글 중에서, <철학을 넘어선 철학자 박동환의 특별한 선집>, 한겨레신문, 2017년 3월 30일자(수정) 네이버 검색, 2022. 12. 5. 굵은 체의 기운 글자는 필자의 강조임.
4) 1984년 ‘야투(野投’ 야외현장미술연구회 도록, 1984 겨울 공주 금강 백사장, 1984 봄 공주산성공원 합본호. 쪽 표기 없음.
5) 임동식, 2008년 11월 13일 인터뷰, 조상영,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다빈치기프트, 2009, 132쪽.
6)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몽(蒙)의 괘이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 몽의 괘는 ‘철들지 않은 어린이’가 점차 세계를 인식하고 발전해 나가는 계몽(啓蒙)의 의미를 지닌다. 가시덤불에 가려 어두컴컴한 상태에 처한 옹달샘은 처음에는 졸졸 흐르다 점차 시내가 되고 강이 되면서 때로는 거센 소용돌이를 이루기도 하나 종래는 평안한 상태에서 보다 큰 세계인 바다로 진입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본정신이 있으니, 사물의 근본이 되는 원리 즉,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바로 그것이다.
7) 야투 창립회원인 임동식이 쓴 이 선언문은 이후 1985년(9권)까지 거듭 수록되었음. 1981년 여름(창립전) 야투(野投) 야외현장미술연구회, 기간 1981. 8. 14-19, 장소: 공주금강백사장. 원래는 국한문 혼용체이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필자가 한글로 고치고 문맥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구두점을 삽입함.
8) ‘사계절연구회’는 야투 활동 초기부터 봄연구회, 여름연구회, 가을연구회, 겨울연구회 등 계절마다 붙인 이름을 총칭하는 말이다. 2025년 기준 168회에 이른다. 이 연구회의 활동은 야투의 핵심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으로 야투의 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다.
9) 이 문장은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미디어 아티스트 이경호와 필자가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자유의 여신상이 해수에 잠기는 이경호의 미디어 영상작품(데드라인 1.5/Deadline 1.5)은 매우 충격적이다.
10)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지구촌의 우려는 기후협정에 관한 다양한 국제회의를 낳았다. 1972년 6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슬로건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를 비롯하여 1992년의 ‘유엔환경개발회의’(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리우선언, 생태계 보호 노력 강화, 환경영향평가제 도입, 생물다양성 협약,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기후변화협약 등등), 1997년 기후변화협약 제3차(일본 교토/교토의정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의무 명기 등), 2015년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1/프랑스 파리), 파리협정, 지구 평균온도 상승 섭씨 2도 목표달성 노력 등등. 2021년 영국 글래스고 기후 합의, 2050년까지 전 세계가 탄소 중립 실현, 1.5도 상승 폭을 유지하자는 합의 도출. 온실가스 주 배출원이자 화석연료를 대표하는 석탄의 단계적 감축 합의 등등
11) 자연미술(Jayeonmisul/Nature Art) : (사) 한국자연미술가협회가 제공한 ‘야투의 연혁과 역사’라는 문건에 의하면 창립 초기에 사용되던 ‘야외현장미술’이라는 용어가 ‘자연미술’로 바뀌게 딘 계기는 야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인 고승현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창립 초기의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는 ’야투자연미술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야투를 둘러싼 다양한 명칭 변경의 역사적 과정과 내용은 이 문건을 참고할 것. 1988년 야투 회의록, 1월 29일자 참조.
12) 윤진섭, <자연과의 동화(同化)룰 통한 동화(同和) 의지>, 2021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프랑스Ⅲ, 독일Ⅲ, 몽골Ⅱ, 중국, 한국Ⅴ, 도록, 10쪽.
13) 윤진섭,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통한 동화(同和) 의지>, Global Nomadic Art Project 2021/2021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프랑스Ⅲ·독일Ⅲ·몽골Ⅱ·중국·한국Ⅴ, 9쪽. YATOO,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