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선 여러 사람들
이선영(미술평론가)
광장에 들어서며
차의 생산과 운용은 물론 정비까지 AI를 탑재한 로봇이 담당하게 되는 이미 다가온 미래는 전시가 열리는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가 본래 기능을 예술에게 넘겨준 이유를 알려준다. 산업 시대를 상징했던 낡은 공간의 높은 천고와 거친 내부는 문명 한가운데서 야생을 추구해 온 현대미술과 어울린다. 차량 정비고에서 열리는 [광장의 기억](예술감독 김기라)은 광장을 오고 갔을 사람들을 기억하며 작품을 통해 호출한다. 기억이지만 선형적 시간 개념을 벗어나는 그들의 작품은 미래까지 포함한다. 과거가 현재의 기억이듯, 현재는 미래의 기억일 수 있으니 말이다. 광장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때로 역사를 진전시켰던 그 인간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전시의 작품들은 여전히 인간은 있지만 그것이 기억 속의 바로 그 인간인지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기억이란 누구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있다. 물론 기억은 순수하지 않다. 영화처럼 이것저것이 모여 편집된 것이며 같은 내용도 매번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각종 포스트 증후군과 더불어 인간 또한 ‘포스트 휴먼’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머지않아 그 또한 인간의 ‘본질’이 될 것이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 휴먼과의 만남]에서 ‘의식은 컴퓨터에서 다운받고 신체는 인간-돼지-로봇의 여러 부품들을 섞어 조립하고, 신경계통 임플란트를 장착하고 성격을 바꿔주는 약품을 먹는’ 포스트 휴먼 시대를 묘사한다. 그 시대는 ‘나’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모든 내용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의 자아는 불안정한 세계에 적응하며 살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다양한 모습의 자아를 통일되고 유일한 자아에 비추어 퇴폐적이고 나약해졌다고 비난하는 대신, 그는 복합적인 현실에서 탄력 있게 적응하기 위한 성숙함으로’(도미니크 바뱅) 생각할 수 있다. 도미니크 바뱅은 우리는 자아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강화라는 두 모순되는 현상이 동시에 뒤엉키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이 영웅적이고 기념비적인 차원으로까지 고양된 시기는 근대다. 그때 인간은 역사를 진보로 이끄는 주체로 간주되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근대적 주체를 대변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주장하는 바는 추상적 주체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마치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처럼, 사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를 객체로 설정하여’ (하버마스) 자신을 되돌아보는 인식주체이다. 하지만 그러한 명증한 자기 인식은 이런저런 욕망을 부추키고 그에 휘둘리는 현대 소비사회의 인간상과 거리가 있다. 시장의 힘은 더욱 커졌다. 몸과 (무)의식도 분절화되어 사고파는 시장과 이성적 자기 정체성이 강한 근대적 주체는 양립될 수 있을까.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은 [상업문화 예찬]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주장이 ‘객관적 이성과 훌륭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계몽주의 기획에 기초한 현대성의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믿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존재와 사유, 그리고 행동 사이의 괴리로 분열되어 있다. 누군가는 그러한 분열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응하는 방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전면적 지배에 무력하다고 비판한다.
예술은 변화되고 있는 인간상을 담고, 때로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예술도 ‘끝났다’고 선언된 지 꽤 되었지만, 아마도 인간이 있는 한 예술은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때에도 인간과 예술은 짝패처럼 연동된다. 그것은 양자가 불확실성을 자유와도 연결짓는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해 더 강화된 시스템의 이상은 불확실성의 해소이다. 그것은 근대시대의 계몽처럼 투명성을 진보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더 촘촘해지는 시스템화가 인간의 행복에 진정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무지와 맹목이 옳지는 않지만, 앎이 경제적 이익으로만 귀결됨으로써 생기는 폐해가 크다. 돈 슬레이터는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시장의 모든 사건과 성과물은 개인이 사적으로 규정한 자기이해를 추구한 결과라고 설명한다.(각주부탁드려도될지요?) ‘자유주의 전통은 자기의 이해 추구라는 동기를 통한 물질적 성공, 기술적 발전, 개인의 자유와 결합이다. 자본주의, 소비주의, 자유시민 사회는 결국 한가지이다.’(돈 슬레이터) 모든 것이 시장으로 귀결되는 시대에 승자독식을 추동하는 경쟁과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광장은 시장과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 공공적 영역이다. 이 전시의 키워드인 ‘광장’은 시장주의가 추동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의식하며, 그것이 결국 절벽이 되기 전에 말해야 할 진실을 표현하는 장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기억’으로 물러나고 있는 현실 또한 직시한다. 참여작품들이 다시 불러낸 인간은 더 이상 이전 시대의 든든한 지적 토대(인문학, 인류학, 역사 등) 위에 서 있지 않다. 작품 속 인간의 불안정성은 인간의 취약함이자 자유의 몫이다. 고착되지 않는 예술은 사라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에 대한 면밀한 감식자이자 기록자로 인간이 처한 현 상황을 잔잔하게 또는 충격적으로 비춰준다. 발표된지 꽤 됐어도 여전히 충격을 주는 원로작가부터 사회의 새로운 지배적 규칙에 반기를 드는 젊은 작가의 신작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인간은 다양하지만 편치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크 랑시에르가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말하듯이, ‘미학담론이 말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사변적 인간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사물들을 식별하는 새롭고 모순적인 체계이다. 미학은 새로운 무질서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의 작품은 전통이나 근대의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두드러진다. 이질적 인간상들이 담긴 작품들은 ‘모순을 통해 화해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 증언한다.’(자크 랑시에르) 회화부터 영상, 설치, 조각 및 사진조각까지 이르는 여러 형식에는 인간적 서사의 극적 변화가 잠재적이거나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출품작들에는 인간과 현실, 역사와 구조와의 관계에 더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미디어와의 역학관계가 나타난다. 각 항은 서로 겹쳐지기도 하지만, 서술의 편의를 위해 17명의 참여 작가/팀을 몇가지 항목(현실과 인간, 미시적-거시적 차원의 인간, 구조와 인간, 미디어와 인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항목에 공통적인 인간은 여러 시제를 넘나드는 보이지 않은 힘을 가시화하는 효과적인 매개자로, 작품의 내용이기도 한 서사의 주인공이다. 각기 개성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간은 그 존재의 확실성이 사라지고 새롭게 퍼즐을 맞춰나가는 중이다.
1. 박치호, 김기라, 이우성, 유근택
거대한 화면을 가득 메우다 못해 가장자리가 잘리는 박치호의 인체상은 그 기념비적 차원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이거나 아름다운 면모가 없다. 그의 작품 속 몸은 스펙터클의 시대가 고무하는 선남선녀와는 거리가 멀다. 불룩 튀어나온 배나 고르지 못한 피부색도 건강하지 않아 보인다.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은 몸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하다. 보통 사람의 실제 몸을 모델로 삼은 그의 작품은 소비사회가 세뇌하는 관리되는 몸이 아니다. 보여지는 몸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몸들은 세상이라는 고통의 지뢰밭을 통과하면서 언제라도 터지고 헤질 수 있는 낡은 자루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 울퉁불퉁하고 묵직한 짐 더미를 가볍게 벗어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김기라의 [약속의 땅]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는 장년층 남자가 등장한다. 그가 광장으로 설정된 무대 한가운데서 외로이 깃발을 들게 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악에 받친 표정으로 확신에 차 외치는 상징적 행동을 하는 남자는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힘의 가시화다. 그는 지배 질서의 산물인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다. 작품 [장님-서로 다른 길]에서 화면 가득히 잡힌 인간 군상들이 서로 치대고 몸부림치며 갈등 상태에 있다. 어깨에 올라타거나 매달린 사람들의 무게를 꿋꿋하게 버티며 중심을 잡는 남자를 포함해 모두 무너져 쓰러진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기생한다. 배우를 비롯한 전문가들과의 협업으로 조율된 무대를 담은 영상은 순간순간의 장면을 회화처럼 보이게 한다. 인간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듯 영상 또한 그러하며, 그것은 작가가 영상에 연출된 인간의 드라마를 담는 이유이다.
이우성의 작품 중 하나인 [해질녘 노을빛과 친구들]은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밝게 웃는 모습을 화면 가득히 담았다. 이전 같으면 공장 노동자나 운동권 학생 등으로 전형화됐을 수도 있지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은 특정 사업장이나 학교를 벗어나 이제 보편적으로 편재한다. 수많은 매뉴얼을 들이대며 진입 장벽을 높여가는 사회에 초년생들은 각개격파 당하기에, 을(乙)은 함께 해야 한다. 관료주의와 기술 등으로 강화되는 갑(甲)의 권력은 더 보이지 않으며 그만큼 더 강해지고 있다. 작가는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벽처럼 늘어선 등신대 인물상들을 80년대 걸개그림처럼 걸어놓는다. 청년들의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광장에 선 인간과 가장 잘 어울린다. 그들은 찬란하게 빛났던 삶의 순간을 포착한 낭만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유근택의 작품은 지필묵을 사용해도 통상적인 동양화 분위기가 없다. 그는 붓을 들기도 전에 화면에 미리 차지하고 있는 동양화에 대한 관념적 태도를 걷어내고 그가 매일 접하는 세면대부터 밥상까지 자신의 일상을 이루는 소소한 대상에 주목한다. 동양화에서 인간은 초상화가 아니라면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인간 또한 자연에 속하는 미미한 존재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사물들을 응시하고 작품으로 드러내는 보이는/보이지 않는 움직임 자체에 내재한다. 재료의 물성이나 색다른 필기구로 실험하는 화면에 있는 인간은 지금 여기의 삶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다. 그가 속한 삶의 결을 따라가는 작품은 뻔해 보이는 현실에서 일궈내야 할 미지의 영역이 예상외로 드넓다는 것을 알려준다.
2. 이동욱, 최수앙, 박미라, 윤동천
이동욱의 작품 맥락에서 인간은 작은 통조림 캔 속에 빽빽하게 정렬한 정어리 같은 위상을 가지기도 한다. 한없이 작아진 인간은 주변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든다. 그 인형 같은 조상은 인간이 주변 환경에 비해 점점 왜소화하는 현대를 상징하는 것일까. 물론 인간만큼 축소되지는 않는 여러 사물의 모습을 보면 그런 경향도 있지만, 그의 방식은 인간 안팎을 둘러싼 환경을 손안의 차원으로 축소하여 소재를 보다 유연하게 다루면서 다양한 서사를 이끌어 내는데 적합하다. 이러한 규모의 변주를 통해 인체에 내재한 유기적 질서를 잃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인간을 가두는 여러 철칙들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카프카적인 변신도 필요한 법이다. 최수앙의 극사실주의적 인체상들은 그 자체보다는 변형에 방점이 찍힌다. 기준이 있어야 위반도 힘을 받기 때문이다. 인체라는 기준이 더 완벽하게 구현될수록 변형이 야기하는 심리적 파괴력은 크다. 세계와 나의 경계인 몸은 죽어가는지 살아나는지 알 수 없는 여러 중간 단계의 형상으로 펼쳐진다. 그의 작품은 인체 단독으로도 서사를 이끌 수 있는 조각의 힘을 활용하는 동시에, 다양한 설치 방식으로 확장되어 현대 인간이 처한 상황을 충격적으로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3D 프린터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쉽게 모방되어 생산되는 현대에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섬세한 영역임을 보여준다.
박미라의 그림에는 영상이 내재해 있고,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최근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눈과 손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되게 했던 위대한 기관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작품 속 기관들은 전체의 부분으로 조화롭게 작동하는 유기적 질서로부터 벗어나 자율화된다. 하지만 분열(유목도 비슷한 맥락)은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됐다. 기관들은 이런저런 사물이나 상황과 연결되어 한밤의 꿈처럼 자유롭게 말한다. 세계를 투시하는 눈은 하늘을 날고 노동에 갇혀있던 손은 그 외의 수많은 것들도 창조하는 만능의 기관이 된다. 미술 역시 눈과 손의 관계가 긴밀해야 한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긴밀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꿈과 무의식이 전면에 드러나는 그의 작품 자체는 분열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리하르트 반 뒬멘은 [개인의 발견]에서 개인은 ‘어원상 in-dividuum, 즉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개체를 뜻하며 그리스어로는 atomon에 해당되는데, 이는 집단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개체’를 뜻한다고 말한다. 리하르트 반 뒬멘에 의하면 근대적 개인의 발견 및 발전에 가장 강력한 추동력을 제공한 것은 계몽주의이다.
그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예를 들면서 개인이라는 이념은 교육의 완성에 기대고 있으며,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믿음은 사회현실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세계를 기획하고 또 세계를 인간에게 종속시킨다고 말한다. 요컨대 개인이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고 실현한다는 생각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것은 근대사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근대 개인주의는 합리주의적 자율성과 도덕적 자율성, 자연권, 경쟁 원칙을 갖추고 있으며 잘 조직된 합리주의적 문화를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리하르트 반 뒬멘) 그러나 푸코의 고고학이 보여주듯,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근대를 포함해 역사는 늘 변화 중인 과도기였다. 현대 인간의 분열적 양상은 굳이 부정적인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윤동천의 최근작 [촛불-태우다]는 얼마 전 광장에서의 극적 드라마를 스펙터클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반딧불같이 밝혀진 작은 빛들은 함께 모여 여러 패널로 이루어진 작품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여럿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힘을 결집하는 것은 작품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 관철된다. 하나의 중심에 도전하는 다(多) 중심의 위대함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 주체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광자처럼 이합집산한다. 과거 역사의 주체로 설정됐던 민족, 민중, 시민, 국민이 아닌 다중(多衆)이다. 촛불이 태우면서 빛을 발하듯, 인간은 다중으로 해체 모이면서 진면목을 발휘한다.
3. 신학철, 서용선, 장종완, 문경원&전준
사진들로 기록된 우리 근대사의 장면들을 이어붙여 힘과 힘이 맞붙으며 나아가는 광경으로 총체화하는 신학철은 그 스펙터클한 내용과 형식으로 한국미술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 화가로 알려지기 이전에 행해진 그의 모더니즘적 실험은 모더니티로 확장됐다. 찰스 테일러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근대성(modernity)이란 새로운 실천과 제도적 형식(과학, 기술, 산업생산, 도시화), 새로운 생활양식(개인주의, 세속화, 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불안들(소외, 무의미, 절박한 사회적 해체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인간은 근대에 역사를 이끄는 주체로 격상됐지만, 인간이 헤쳐나가야 할 파고는 어느 시대보다 높았다. 조화로운 질서는 화면 안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되었고 구체적 실천이 요구됐다. 사진의 사실 전달력과 회화적 필력이 결합된 신학철의 작품은 역사를 이끌어왔던 힘이 인간임을 말한다. 인간은 자본과 독재에 의해 억압받으면서도 저항한다. 모순과 갈등, 투쟁의 장에 늘 희생되거나 승리하는 인간이 있었다. 인간의 살들이 욕망의 덩어리로 뭉쳐있는 듯한 말단 부분은 맹목적이다. 맹목이지만, 아니 맹목이어서 쭉쭉 나아갔다. 시공간적으로 광폭의 주제를 다루어왔던 서용선의 작품은 탐구적이다. 굳이 찾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것을 파헤치는 작가는 당대의 현실을 넘어서 시간의 시험에 남겨진 역사를 소재로 여러 시리즈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 역사가 그러했듯이 대부분 비극의 무대이다. 굵은 필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된 그의 역사에는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근대사로 올수록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구조와 인간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무기는 인간을 살아 있는 과녁으로 대한다. 그러한 힘의 스위치를 조작하는 이들의 얼굴은 숨겨져 있거나 익명적이다.
양과 사자가 한 자리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을 그렸던 장종완은 그것이 허구임에도 매혹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표현한다. 모노톤으로 그려진 최근작에는 세상을 구원할 듯한 결정적 한방을 품은 듯한 알이 위태로운 계단에 놓여있다거나 신의 계시를 받는 대상이 돌연변이된 자연의 모습을 한 경악스러운 상황을 통해 미지의 것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린다. 여전히 그의 그림은 유토피아적 희망을 내포하고 있지만, 거기엔 판도라의 상자처럼 반대급부적인 것도 튀어나올 불길한 분위기가 감돈다. 인간은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인 것을 꿈꾸지만 그의 욕망이 이끄는 곳에 무엇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코드로 결정되는 듯한 급격하게 다가온 미래는 미지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문경원과 전준의 작품은 영상 작품을 넘어서 유명 배우가 나오는 단편 영화에 해당된다. 본격적인 영화예술 같은 매끄러운 카메라 움직임이나 세련된 영상미가 돋보인다.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라는 흥미로운 설정에 작업실이나 실험실이라는 무대는 예술이나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준다. 특히 그들의 진짜 무대였을 작업실의 디테일은 설득력 있다. 예술가는 홀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타자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종말은 외부와 닫혀진 공간에서 무언극처럼 전개되는 상황으로 간접적으로 예시된다. 마치 노아의 방주나 세상의 모든 식물 씨앗을 보관하는 저장고처럼 미래를 새로 시작하는 도가니 같은 곳에서 여전히 인간이 주인공인 예술은 미지의 가능성에 대한 시험대로 나타난다.
4. 오원배, 정현, 이재석, 권오상, 이용백
오원배의 작품에서 같은 크기의 화면 안에서 각기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구조에 의해 공격당하고 그에 반응한다. 칸칸이 나뉘어진 평면은 원고지 안의 글자처럼 분절화된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연이어 배열된 그들은 한 사람의 여러 상황일수도, 여러 사람의 동시적 상황일 수도 있다. 다양한 상황이 응축된 그의 작품은 해석의 융통성이 있다. 그림이라는 정지된 매체는 연속 장면을 통해 잠재적 동감을 펼친다. 그의 작품에서 말없는 몸짓은 말이 된다. 검은 바탕에 하얀 선으로 처리된 인간은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고통받거나 고뇌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사물이 아닌 사람으로 남아있음을 말한다. 구조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이제 구조가 사람을 만든다. 그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구조와 인간이 투쟁한다. 간간이 끼어있는 식물은 자기 색을 잃지 않았으며 고독한 인간과 달리 자웅이 조화롭게 만나기도 한다. 재료와 상품, 그리고 노동자와 소비자를 가득 싣고 달리던 철도는 근대 산업사회의 원동력이었다. 정현은 철로 아래 수십 년 누워있던 침목들을 인간으로 벌떡 일으켜 세운다. 침목이라는 소재로 인간상을 구축한 그의 작품은 근대에 우뚝 선 기념비적인 주체를 상징한다. 거친 재료를 선택해 원재료의 속성을 살리는 최소한의 미적 가공이 이루어진 인체는 물질에 내재된 에너지를 품고 있다. 물질과 인간은 서로를 강화한다. 고목을 닮아가는 침목은 낡은 기차의 선형적 여로와 더불어 시대의 뒤안길에 서 있다. 많이 가공되지 않은 그의 재료이자 작품은 자연과 인공 그 어딘가에 있다. 정현의 인간상은 자연처럼 착취되고 물화된 모습을 새기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힘을 온몸으로 받아낸 형상은 범접하지 못할 거인으로 나타난다. 땅과 하늘을 잇는 인간의 위상은 근대적 거인의 발자취가 한 시기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 성취임을 예시한다. 이후의 인간은 그 거인의 어깨를 타야 나름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매일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의 매뉴얼을 습득하기도 버거운 대량 생산의 시대에 일방적으로 주어진 지침을 따라야 살아야 함은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압박적 구조는 이재석이 처음 그 힘을 의식했던 군대뿐 아니라 학교, 감옥, 교회, 병원, 공장 등, 미셸 푸코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연구했던 모든 사회 구조에 해당된다. 푸코는 이러한 구조들의 산물이 바로 (인문학에서 규정하는)인간이라고 봤다. 이재석은 이 권력적 구조를 무심한 듯 거리를 두고 풍경화한다. 인간의 욕망에 맞춰 이리저리 구부러지는 나무는 어떠한가. 타자를 억압하는 동일자 또한 타자이다. 폭력은 되돌아온다. 인간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체계를 통해 군림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 변화에 대해 작가는 중성적으로 반응한다. 단지 인간 소외라고 표현하기에는 이미 그 변화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림이나 사진은 3차원 현실을 2차원으로 재현한다. 권오상은 이 재현의 질서에 역행하여 2차원을 3차원화 한다. 부분들을 붙여가며 형태를 완성해 가는 것은 소조의 방식과 유사하다. 조형적인 기발함과 작가가 그동안 해결해 온 난이도도 있지만, 이미지를 현실화하려는 오랜 역사적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3차원에 2차원을 그럴듯하게 세우려는 것은 현실이 환영이 된 만큼이나 환영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있다. 미디어 사회에서 인간의 경험은 현실보다는 현실의 미디어적 전유에 의해 결정된다. 뒤에 아무것도 없는 사진은 안에 아무것도 없는 사진 조각이 된다. 속이 텅 빈 정교한 시뮬라크르는 인간을 찍거나 찍은 것을 3차원에 세운 것을 넘어서 자체의 존재를 주장한다.
미디어는 이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닌 공기 같은 존재가 되었다. 처음부터 디지털 사회에 태어난 세대와 이용백처럼 청년기에 미디어계가 극적으로 변화했던 세대의 감각은 다르다. 펠릭스 가타리는 [카오스모제]에서 과학기술, 생물학, 컴퓨터 기술, 정보통신, 매체의 세계는 매일 우리의 정신적 좌표들을 한층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오늘날 그 불안정한 경계는 몸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다나 해러웨이는 [유인원, 사이보그, 여자-자연의 재발명]에서 현대 사회에서 몸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진단한다. ‘무엇이 단위로, 즉 하나로 간주되느냐 하는 문제는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도로 의문시되는 문제다. 우리는 통제 전략이 자연적 대상들이 아니라 경계조건과 공유영역 경계를 가로지르는 흐름의 속도에 집중해야 한다’(다나 해러웨이) 비슷한 맥락에서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은 ‘자의식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대서사시이며, 집단적인 창작품이고 언제나 변화하는 공동의 구조물’(도미니크 바뱅)로 정의된다. 사이보그를 작품화하기도 했던 이용백은 그 경계에 집중한다. 숨 막힐 듯 조여드는 코드화의 세계에서 힘겨워하는 이를 심연을 홀로 걷는 양복쟁이로 표현하는가 하면, 동서양의 대표적인 종교 도상인 부처와 예수를 교묘하게 뒤섞기도 하며, 실제 무게는 거의 없는 폴더를 300킬로 무게의 돌덩이로 만들어 끌게도 한다. 꽃으로 위장해서 꽃 속을 전진하는 전사들은 ‘지도가 영토를 다 덮게 된’(보르헤스) 시뮬라크르 세계의 면모를 보여준다. 경계에서 작업해 온 아방가르드로는 최신의 정보처리 시스템이 말하는 바와 조응한다. 초창기 컴퓨터의 모델이 0과1의 이진법이었다면, 최근의 양자 컴퓨터는 0과 1을 공존하게 함으로써 더 고도화된 계산 체계를 가진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면접보고 평가하며 진단하고 판단하고 예측하고 조절하는 시대를 인간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축소로 볼 것인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많은 인간상들을 필요로 하고, 인간과 짝패였던 예술은 이러한 과제에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출전; 진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