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통한 수행
이선영(미술평론가)
오랜 세월 수도자 생활을 했던 작가 신서이는 예술을 통해 수행을 이어간다. 반복적 실행이 시리즈로 이어지는 현대미술의 한 관행에 대해 ‘수행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아왔던 이의 수행성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근대 예술은 종교의 어떤 측면을 이어왔다. 종교의 엄격한 율법과는 별도로,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조각난 다양한 부분을 이으려는 노력이나 기도나 찬송에서 보여지는 몰입의 과정 등이 그 예다. 물론 찬란한 종교예술의 역사에서 보이듯이 종교 또한 이미지의 힘을 십분 활용했다. 예술의 기원에는 종교가 있기에 예술의 기원으로 소급하려는 지향에는 종교와의 만남이 수반된다. 근대가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많은 부분을 예술에서 떼어내려 할 때, 오히려 종교성은 더 큰 부분을 차지한 측면도 있다. 예술사는 추상미술로도 이어졌던 ‘예술을 위한 예술’의 많은 작가들이 정통종교를 벗어나 이단이나 이교, 또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예를 많이 보여준다.
예술과 종교는 짝패처럼 서로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신서이의 삶의 여정이 극적인 전환이기 보다는 심화 또는 또 다른 국면은 아닐까. 그는 18년간 수도생활를 했고 수도원를 나와 뒤늦게 대학원을 다녔으며, 2025년부터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개인전을 시작했다. 그는 ‘나의 봉쇄 수도(필자 주-봉쇄 수도원 [封鎖修道院]이란 천주교의 용어로 그 사전적 의미는 ‘바깥의 세상과 일절 접촉을 금하는 수도원’을 말한다) 생활을 배경으로 반복된 기도. 단순노동. 절대자를 향한 사랑이 나의 작업과 닮아있다’고 말한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을 통한 비움에 작업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수행적이다. 수도하는 삶에서 입고 살았던 ‘외벌 수도복(古服)과 갈색이 주는 가난’은 그의 작품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2025년의 작품 [무제]의 바탕 면은 수도자의 낡은 옷처럼 거칠거칠하다. 몸에 닿으면 피부를 아프게 자극했을 것 같고 흑갈색, 또는 갈색으로 통일된 색감은 금욕주의를 반영한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면 대지는 갈색으로 변한다. 죽음은 사유할 수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을 생각하게 하고, 그 또한 동서고금 종교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해법은 종말, 부활, 순환 등 다양하지만 말이다. 수행성이 있는 그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가 없지는 않다. 누추하고 거친 외벌 수도복같은 바탕면 사이로 배어 나오는 절대적 타자인 신에 대한 사랑이 표현된 도상이 그것이다. 추상적 바탕 면은 어둠 속에서 미광을 비춘다. 수도복을 화면 한가운데 배치한 작품 [무제](2025)에서 오래된 직물은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지만, 허리춤에 매달린 끈은 환하게 빛난다. 날실과 씨실로 짜여진 옷의 굵은 올의 질감은 수직 수평이 교차됨으로서 생기는 십자가 형태와 겹쳐진다. 낡고 어두운 옷은 안팎으로 빛난다. 캔버스 또한 짜여진 천이다 보니 질감과 빛은 연속되는 것이다.
수도자의 묵직한 삶은 공중 부양하는 옷의 모양새로 중력을 이겨낸다. 빈 껍데기 같은 옷은 부재를 통한 현존을 표현한다. 수도복에서 허리춤의 끈만 단독으로 그린 작품의 경우 일종의 구상적 이미지지만, 보통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비유하는 은유법처럼 그 단편은 작가에게 의미를 지닌다. 옷과 몸이 빠져 나간 상황은 그가 이제 종교적 수행이 아닌 예술적 수행으로 이동했음을 말한다. 신서이는 2026 서귀포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개인전 작가 노트에서 성 프란치스코 서거 800주년이 되는 해를 기억하면서 ‘정결 청빈 순명’이라는 프란치스코적 구도를 시각적 표현하려 했다. ‘선과 질감의 만남으로 기도하는 모습, 수도복, 수도복 허리에 묶는 띠를 선의 반복을 통해 누적된 채색’으로 그렸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레드, 성모마리아의 상징인 블루, 그리고 프란치스코 수도복의 상징 갈색 계열’을 채색했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서기 1000년경 수도회의 색이 확정됐다고 말한다. ‘회색과 갈색은 청빈을 요구하는 수도회의 색이 되었고, 검정은 약간의 사치를 허용하는 수도회의 상징이었다.’(에바 헬러) 색을 만들기 위해 자연에서 재료를 구했던 이전 시대에 화려한 색은 곧 부를 뜻했다. 반대로 칙칙하고 어두운 색은 청빈과도 관련되었다.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금욕주의는 종교적인 것만큼이나 군사적인 덕목이라고 말한다. ‘군대나 공동체 혹은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개인의 싸움에 있어서 금욕은 전략적으로 필요한 일이다.’(존 하비) 작업 또한 극도의 체력 소모를 동반하는 전투이다. 신서이는 색을 절제해서 쓴다. 그가 한국의 단색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군은 완전한 추상이다. 하지만 추상이라고 해서 종교적 감성이나 의미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성상파괴주의나 이슬람 문화권의 기하적 패턴은 종교가 이미지 외에도 추상의 어법을 활용했음을 말해준다.
현대에 와서는 재현적인 아름다움으로 벗어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숭고한 경향 속에서 추상이 자리하곤 한다. ‘나의 그림은 생각을 채우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내는 공간’이라고 작가가 말할 때 추상은 적절한 어법을 제공한다. 신서이의 시리즈 작업은 거친 올의 질감이 그대로 추상적 이미지가 되는 작품이다. 이때 색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작품 [무제](2025)는 난색과 한색 계열이 교차로 배열되어 시각적인 선명도는 높인다. 영원한 푸른색과 희생과 관련된 붉은 색의 교차이다. 추상적 언어에 실린 상징색으로 제목과 이미지 없이도 이야기한다. ‘나의 작업은 반복되고, 누적되고 쌓여지는 층의 마티에르 질감의 표현 과정이 구도의 여정과 닮아 있다. 시간을 요하는 작업을 통해 수신의 작업, 비워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무리 작업으로 조각칼로 환도로 파내면서 내재된 채색이 드러난다’고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밝힌다.
신록의 색은 대지를 상징해 왔던 정사각형을 가득 메운다. 하늘 또는 우주적 감각을 보여주는 그의 또 다른 시리즈와 상보 작용을 한다. 사각형이든 원이든 만다라처럼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같다. 원(또는 구)의 이미지가 있는 시리즈는 연이어서 보면 시간적 추이를 느낄 수 있다. 선의 배치를 달리하는 같은 크기와 형식의 작품들에 원이 가지는 잠재적 운동감에 더해진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서 여러 각도(좌측, 정면, 우측 등)로 배치한다. 그의 작품에서 둥근 원은 구 모양의 질감으로 부피감을 준다. 조형 언어를 통한 추상적 부피감이다. 원이나 구는 유한과 무한을 중첩시킨다. 푸른 지구도 떠올리는 구는 무한한 하늘이며, 동시에 대우주의 반향인 자아의 상징이다. 그는 의미와 연결된 형태 대신에 정동과 연결될 색에 집중한다. 블루는 상징적 의미도 있기에 신서이의 최근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구 형태와 더불어 파랑은 하늘을 상징한다.
‘파랑은 신성한 색, 영원한 색이다. 지속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 영원히 계속 되어야할 모든 것에 파랑을 결부시킨다’(에바 헬러). 마가레테 브룬스도 [여덟 가지 색으로 풀어본 색의 수수께끼]에서 파랑은 신들의 색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거대한 창공 속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신서이는 작품의 푸른색을 마리아와 연결시킨다. 마리아의 블루는 관념적 초월보다는 따스한 보호에 가깝다. ‘보호해 주는 어머니의 상징인 마돈나의 거대한 종 모양의 외투는 천국의 천막을 강하게 연상시키는데 이는 보통 파랑색으로 묘사되었다.’(마가레테 브룬스) 에바 헬러는 파랑이 신성한 색이라면 녹색은 지상의 색, 자연의 색이라고 말한다. 사각형 대지를 채우는 녹색 계통의 색조와 원형 하늘을 채우는 파랑의 색조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 신서이에게 예술로의 길은 하늘에서 땅으로의 관심 이동이었지만, 그가 떠나온 공간은 지금의 작업 속에 자리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