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 빛을 그리고, 물을 그리고, 바람을 그리고, 공기와의 교감을 그린 

고충환 | 미술평론가

물이 일렁이면서 물결을 만드는, 물결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물빛을 희롱하는, 수면에 아롱거리는 빛 알갱이를 보는 것 같은, 윤슬 같고 물비늘 같은, 반투명한 베일이 드리워진 것 같은, 베일 위로 부유하는 것도 같고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도 같은, 어룽어룽한 아지랑이 뒤편으로 비쳐 보이는, 낱낱이 해체된 사물도 같고 점점이 뭉개진 정경도 같은, 물이 흐르는 것도 같고 가만가만한 것도 같은, 바람이 부는 것도 같고 가만가만한 것도 같은, 부는 듯 가만가만한 바람에 수초가 몸을 떠는, 해체되고 뭉개지는, 모이고 흩어지는, 부유하고 사라지는 빛의 단면을, 물의 표면을, 아지랑이의 깊이를 통해서 보는 것 같은, 심연처럼 깊이에 가닿을 수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는 반투명한 어둠을 내장한 것도 같은, 희미한, 흐릿한, 아득한, 막막한, 가없는 기억의 잔상을, 감각의 잔상을, 감각적 기억 그러므로 몸이 기억하는 잔상을 보는 것도 같은.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무언가를 떠올려줄 뿐. 상기시켜줄 뿐. 암시할 뿐. 보는 사람이 저마다 다른 무엇으로 읽어도 무방한 열린 그림이고 비결정적인 그림이다. 비결정적이지만 비현실적인 그림은 아니다. 빛, 바람, 물, 공기와 같은 비물질적인 물질을 그린 그림이다. 비물질적인 물질의 존재 방식과 현상을 그린 그림이다. 비물질적인 물질과의 교감을 그린 그림이다. 물질과 비물질의 모호한 경계 위에 있는,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물질을 그린 그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비가시적인, 비감각적인, 비물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유령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작가가 이처럼 비가시적인, 비감각적인, 비물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물질과 현상에 관심이 있고, 작가의 관심이 그것들을 가시의, 감각의, 물질의 표면 위로 불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그림의 표면 위로 불러낼 것인가. 암시다. 폴 클레는 가시적인 것은 다만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한에서만 존재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에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낭만주의(비가시적인 존재와 공존하는 삶)와 상징주의(상징으로 직조된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현대미술의 어법에 맞게 해석한 경우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암시가 뭔가. 분위기다. 실제로는 먼 것인데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감각경험을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 그러므로 분위기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먼 것? 신이다. 신의 은총이, 신의 손길이, 신의 눈길(루시앙 골드만의 숨은 신)이 지금 여기 함께한다는(신의 현현) 감각경험이다. 다르게는 영성주의다. 영적인 무엇, 분위기에 해당하는 무엇, 비가시적인 무엇을 소환하는 기술 그러므로 암시하는 기술이 예술이다. 음악이 그렇고, 문학(특히 시)이 그렇고, 그림(시와 같은 회화)이 그렇다. 

가시가 죽으면 비가시가 산다. 가시적인 것, 감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이 물러간 자리에 비가시적인 것, 비감각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이 들어선다. 저 홀로 들어설 수는 없고, 다만 가시와 감각과 물질이 암시하는 한에서만 들어설 수 있다. 빛과 공기와 바람과 물과 같은, 가시와 비가시가 애매한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이 그림 위로 밀어 올리는 한에서만 들어설 수 있다. 추상이다. 감각적인 추상 그러므로 감각 추상이다. 그렇게 작가는 가시와 비가시의 경계를 넘어 추상과 구상 혹은 추상과 형상의 경계마저 허물고 넘나든다. 그렇다면 추상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감각적인 세계에서 사물 현상의 존재 방식은 관계를 매개로 한다. 그 관계의 망으로부터 사물 현상 자체만을 오려냈을 때(수면 같은, 빛의 단면 같은), 구상은, 형상은 추상이 된다. 그렇게 추상은 이미 구상 속에, 형상 속에, 감각적인 세계 속에 내장돼 있었고, 잠재해 있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자면, 예술(특히 시)의 존재 의미는 현실태(감각적 현실)가 아닌 가능태에 있고 잠재태에 있다. 이미 주어진 감각적 현실이 아닌, 가능한 세계, 잠재적인 세계를 소환하고 예시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 가능하고 잠재적인 세계를 위한 공간이 여백이다. 무는 무가 아니고, 공은 공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비가시적인, 비감각적인, 비물질적인, 마치 유령과도 같은 가능하고 잠재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의 거소(집)가 여백이다. 그러므로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형상보다는 여백(그리는 것보다는 안 그리면서 그리는 것)에 있고, 결정적인 것보다는 비결정적인 것에 있고, 그리고 여기에 의미구조를 느슨하게 만들고 헐렁하게 가져가는 것에 있다. 그림이 숨을 쉬고, 미처 예기치 못한 다른 의미가 들락거리는(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는) 숨통을 열어주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빛을 그리고, 물을 그리고, 바람을 그리고, 공기를 그리고, 그것들과의 교감을 그린 작가의 그림 자체가, 그리고 전체가 어쩌면 여백에 해당할 수 있고, 다름 아닌 여백(빈 듯 충만한)을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그림은 빛과 물과 바람과 공기와 같은, 비물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과의 교감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모네의 정원에서 모네가 수련 연작을 그릴 때 물질적 상상력을 매개로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빛과 물과 바람과 공기와 같은, 비물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물질이 화가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물질이 불러일으킨 상상력, 아마도 감각)을 통해서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매번 흔들리는, 변화하는, 가변적인 사물 대상(자연현상)을 그림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그 자체 모네의 그림에 유독 많은 연작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하는). 그렇게 작가는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빛을 그리고, 물을 그리고, 바람을 그리고, 공기를 그린다. 그것들과의 교감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아닌, 그것들에 투사된 자기를 그린다(모든 풍경은 자연에 투사된 주체의 해석이고, 인문학적 배경이다). 자기의 감각의 질감을 그리고 색감을 그린다. 자신의 마음의 결을 그린다. 


그렇게 작가는 원래 채색화로 시작해서, 빛과 물과 바람과 공기와 같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마치 여백과도 같은, 비어있으면서 충만한(텅 빈 충만), 여백 자체만으로 이미 그림이 되는, 그런, 가능한, 잠재적인, 암시적인 그림을 그린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을 그리고, 흐르는 것들을 그리고, 무상한 것들을 그리고, 부재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감각적 기억 그러므로 몸 기억이 불러낸 것들)을 그린다. 최근에는 이처럼 흐르는 것들 그러므로 무상한 것들을 그림을 넘어 영상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하면서 관객과의 교감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 자체 전통 채색화의 영역과 범주를 심화하는 한편으로(비물질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전통 채색화에 대한 치열한 형식실험의 과정에서 유래한 것), 이로써 한국화를 재정의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