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내게 놀이를 주제로 사유를 하게 한다. 나의 작업에서 놀이는 목적 없는 유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자 태도이다. 효율과 생산성, 성장을 기준으로 한 근대적 규범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환경을 위계적으로 배열해 왔다. 나는 이러한 질서에서 밀려난 식물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캐릭터를 만들고, 이들을 놀이의 주체로 등장시킨다. 이 캐릭터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균열을 내며, 놀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감각적 경험으로 재구성한다.
방패연이 날아오르는. 투표용지가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날고 전투기가 나는. 권위를 상징하고 왕권을 상징하는 봉황이 나는. 드론이 날아오르는. 미사일과 포탄과 화살촉이 어지러운. 탱크가 기동하는. 구부러진 포신이 나무로 변신하는. 바리케이드가 보이는. 총이 폭죽처럼 불을 뿜는. 담벼락 위 철조망이 보이는. 판문점이 보이고 청와대가 보이는. 자기 일에 골똘한 말똥구리가 한가로운. 나비와 참새가 한가로운. 난 옆으로 고추밭이 있는. 실핏줄 같은 실개천이 흐르는. 아마도 동대문 시장에서 구했을 조화가 흐드러진. 맨드라미와 연꽃이 피어있는. 모란과 매화가 핀. 아마도 문구점에서 구한 스티커 형식의, 떼서 붙이기 쉬운 문자와 활자와 숫자와 알 수 없는 기호가 난무하는. 사람 형상을 대신한 이모티콘이 보이는. 경계를 서는 문자 군인이 보이는. 나무가 춤을 추는. DNA 염기서열이 보이는. 양탄자처럼 날아다니는 지폐가 보이는. 산세와 겹친 주식 그래프가 보이는. 장수를 상징하는 가녀린 실과 거북이가 보이는. 무덤이 보이는. 감모여재도(제사를 치르기 위해 그린 그림)가 보이는. 책거리와 책가도가 보이는. 괴석과 괴목이 보이는. 갓이 보이는. 별자리가 총총한. 눈을 홉 뜬 비정형의 얼룩이 보이는. 눈을 부릅뜬 탱크가 긴박한. 깃발과 깃대들이 웅성거리는.
그리고 물속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유영하는 고기 떼. 공격수의 태세로 긴장한 채 매복하고 있는 사마귀. 파수꾼처럼 나무에 앉아 전방을 주시하는 새. 용병처럼 총총걸음을 옮기는 개미 떼. 활을 든 채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생긴 캐릭터(아마도 작가가 캐릭터라고 부르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나무 인간(반인반수)과 식물인간. 나무 인간으로 변신한 캐릭터.
이 그림들은 다 무엇인가. 아리송한, 그 의미를 알 것도 같고 오리무중을 헤맬 것도 같은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 김현수는 계열도 없고 계통도 없는 세계, 뒤죽박죽인 세계, 마구 엉클어진 세계, 뒤집힌 세계, 전도된 세계를 보여준다. 알 수 없는 어떤 계기로 지금 막 새로이 생성하면서 재편되고 있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생성회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지금 막 새로이 생성하면서 재편되고 있는 세계인 만큼 정해진 규칙도 따라야 할 형식도 없다. 그림을 그리면서 형식이 열리고,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의미가 도래한다.
미셸 푸코는 계통(지식의 수직적인 체계)과 계열(지식의 수평적인 연쇄)의 기초가 되는 분류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라고 했다. 분류가 자의적이라면 계통도 계열도 임의적이다. 그런가 하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예술이 매번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의 연속이라고도 했다. 재현 불가능하지만,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재현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논평하고 비판하는 방법을 위해 개발된 문법이 알레고리다. 얼핏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작가의 그림이 이런 알레고리를 빌려 시대에 말을 걸고 현실을 논평한다.
작가의 작업은 평면 회화와 콜라주, 마른 나무껍질과 들풀, 식물의 씨앗과 뿌리, 꽈리와 수세미, 해변에서 주워온 부목과 같은(때로 여기에 빨갛고 파란 실을 부가한), 자연에서 직접 채집한 오브제(그러므로 자연 오브제) 설치와 이에 바탕 한 사진 작업으로 구성된다. 그 구성원을 보면 상호 이질적이거나 무관해 보이는 소재와 소재, 요소와 요소, 의미와 의미를 하나로 결합해 제3의 그를듯한 형태를 생성하고 의미를 낳는다는 점에서 브리콜레르와 브리콜라주와 통하고, 한국화를 확장하는 계기를 연 소위 퓨전 동양화에도 맞닿아있다. 그 바탕에는 신화적인 상상력과 동화적인 상상력, 그리고 민화에 바탕 한 상상력이 하나의 결로 어우러지고 있는데, 이로부터 각 변신을, 놀이를, 그리고 탈형식을 주요 개념 코드로 취해오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화는 변신하는 신들의 이야기에 바탕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정신의 물화 된 형식이 신임을 인정한다면, 자유 정신(자유자재한 정신)이 변신과 등치가 된다는 사실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동화는 말할 것도 없이 유아의 상상력에 바탕 한 놀이문화에서 왔다. 원래 인간은 유아에서 시작하는 만큼 상상력을 타고났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언어로 구조화된 상징계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이 거세된다(자크 라캉). 이처럼 타고난 상상력이 거세되는 것은 상상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고 제도에 의해 예술과 함께 잉여로 추방됐기 때문이다(조르주 바타이유). 그렇게 상상력(그리고 예술)에는 억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해방하는 작가의 기획에는 상상력을 옥죄는 자본주의와 제도화된 사회를 향한 비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보들레르는 상상력이 예술에서 결정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형식이나 의미에서 작가의 그림을 특징짓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치자면 민화의 차용과 재사용을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화의 주체는 민중인 만큼 사대부 문인화의 형식을 따를 일이 없었고, 그 의미를 추종할 일도 없었다. 형식과 의미에 관한 한 거칠 것이 없었다. 그 자유자재한 정신과 실천이 동시대의 시대 감정과도 통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을 선취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형식이 의미를 결정한다고 했다. 형식이 자유자재하니 의미 또한 자유자재하다. 다시 말해 의미는 사물에 내장된 것도 아니고, 사물의 본성도 아니다. 오히려 맥락이 의미를 낳고 결정한다. 그러므로 맥락이 달라지면(탈맥락과 재맥락)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의미는 맥락 결정적이다(후기구조주의). 그리고 여기에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반쯤 무의식이 그리는)이, 자유연상 기법(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는)이, 그리고 데페이즈망 그러므로 사물의 전치(사물의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지는)에 대한 공감이 가세한다. 그러므로 민화도 그렇지만 민화를 계승한 작가에도 현대미술과 함께 동시대적인 의미론을 선취하는 부분이 있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위험한 놀이라고 부른다. 경계에서 놀기로 정의하기도 한다. 주제이면서, 작가의 그림과 태도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다. 무슨 의미인가. 주지하다시피 요한 호이징하는 호모루덴스 그러므로 놀이하는 인간에서 문화와 예술의 기원을 찾는다. 그런가 하면 프리드리히 실러는 감성과 이성을 종합하는 제3의 능력으로 유희충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 유희가 위험하고 놀이가 위험하다. 경계에서 놀기 때문에 위험하다. 경계에서 논다는 것은 소속이 없다는 것이다. 무소속이라는 말이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너의 색깔을 묻는 자에게 자신의 색깔은 회색이라고 했다(이데올로기적인). 혹 누군가가 작가에게 너의 형식은 뭐냐고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작가는 아마도 나의 형식은 무형식(매번 새로 시작하는)이고 탈형식(결정적인 형식으로부터 탈주하는)이고 비형식(형식에서 탈주하면서 형식을 여는)이고 재형식(형식을 재사용하는)이라는 답을 내놓을지도 모른다(예술에 대한 태도와 관련한).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옛날 민화가 그랬던 것처럼, 시대적 현실에 대한 논평과 예술에 대한 태도가 하나의 결로 포개져 있다. 여기에는 위험한 시대를 천진난만한 놀이로 돌파하는 아슬아슬한 미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