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환/ 자기를 반영하는, 어쩌면 자신을 반영하는 돌

고충환 | 미술평론가

길을 걷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길 끝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그 너머로 건너갈 수 없다는 점에서 길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고 하나의 세상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세상이 끝나는 곳에 있는, 모든 바다는 그러므로 어쩌면 세상의 끝이다. 내가 속한 세상이 끝나고 내가 속하지 않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이 열리는, 세상의 변방이고 세상의 경계다. 그 바다가 갯벌을 품고 있다. 자신의 속살을 품고 있다. 낮에 바다는 자신의 속살을 내어주다가도, 밤이 되면 자신의 속살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므로 갯벌은 밤새 자신을 품었던 바다의 어둠을 기억하고 있다. 갯벌에는 그런, 밤의 기억이, 어두운 바다의 기억이 묻어있다. 

사람들은 삶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하고,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한다. 일장춘몽 그러므로 한바탕 봄 그러므로 찰나에 꾼 꿈에 비유한다. 가없는 우주에 던져진 유성에 비유하고,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에 비유한다. 때로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비유도 있지만, 대개 고독하고, 쓸쓸하고, 허망한 감정이 사무치는 비유들이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감정을 반영하는 비유들일 것이다. 삶에 대한 이런저런 비유들이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삶을 길에 비유하는 것이다. 때로 돌아가고 우회할 수는 있지만, 다만 한길을 갈 수 있을 뿐인 외길이다. 그래서 모든 길 위에서 길을 걷는 사람들은 외롭고 쓸쓸하다. 작가는 그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걸었고 그렸다. 길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곧 진정한 자기(불교로 치자면, 진아)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기반성적인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길을 그리다가, 길 끝에서 가닿은 바다를 그리고 갯벌을 그렸다. 사람들은 작가의 갯벌 그림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탁 트인 시야, 열린 시야 때문일 것이다. 그 열린 시야 끝에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아마도 빛이 발원하는(아니면 사그라드는) 곳일, 시야 안쪽으로 희붐한 깊이를 만드는, 때로 가녀린 실을 그리고 때로 그 실마저 뭉개지는 경계가 있다. 인간의 인식이 가닿을 수 있는 끝 그러므로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감각적 경계 위에 관념적 경계가 포개지는 이중적 풍경을 그리고 중의적인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그 경계 안쪽에 있는 갯벌을 그렸다. 밤새 자기를 품었던 밤의 기억을 그렸고, 잿빛에 묻어온 바다의 기억을 그렸다. 밤이 바다를 품고, 바다가 갯벌을 품고, 갯벌이 생명을 품는,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보듬으면서 순환하는 존재의, 생명의 연쇄를 그렸다. 


갯벌은 밤새 자기를 품었던 밤을 기억하고, 바다를 기억한다고 했다. 갯벌 여기저기에 그 기억의 파편과도 같은 크고 작은 돌들이 부유한다. 사실은 물에 잠긴 것이지만 물에 뜬 것처럼 보인다. 물이 움직일 때 돌은 물에 속한 물의 부분처럼 보이고, 물이 잠잠할 때 돌은 물에서 분리된 독립된 개체처럼 보인다. 물이 움직이는 것도 잠잠한 것도 자연현상이지만, 그 자체 동시에 파토스가 분기하거나 평정심과 같은, 작가의 세계감정이 반영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돌도 있을 것이고, 큰 돌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돌도 있을 것이고, 다른 데서 온 돌도 있을 것이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그 모든 돌이 처음부터 거기에 있어서 하나의 풍경을 일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돌의 몸에 어둠을 만드는 그림자가 갯벌에 묻은 바다의 자락을 들어 올려 바다의, 어두운, 기억의 조각들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돌이 있고, 물이 있다. 그 돌과 물이 작가의 세계감정을 반영하고, 외부의 빛 환경을 반영한다. 빛의 성분 여하에 따라서 그림 속 돌이 그리고 물의 색깔이 달라진다. 외부 환경에 연동된 삶의 질을 알레고리로 표현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알레고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반영과 반영상을 들 수 있다. 그림 속에서 돌은 거울 같은 수면에 자기를 반영하고, 또 다른 자기를 분기한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반영상 그러므로 또 다른 자기다. 자기_타자다. 어쩌면 작가는 거울 같은 수면에 자기를 반영하는 돌을 통해서 이처럼 자기를 반영하는 자기를, 자기를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만의 문법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여기에 그림 속 돌을 가만히 보면 그 생김새가 다르고 질감이 다르다. 오랜 세월 물에 깎여 두루뭉술해진 호박돌이 있고, 날이 선, 각이 여실한, 채석장에서 채취한 잡석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다른 삶의 질감을 대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얼핏 현실 그대로 캔버스 위에 옮겨온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편집과 재구성의 회화적 문법이 작용하고 있다. 현실은 다만 그림을 위한 계기일 뿐,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열어놓고 있다. 현실을 재창출하는 한편으로, 또 다른 회화적 현실(회화로 인해 비로소 존재하는 현실, 회화가 아니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현실)을 제안해놓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림 속 돌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일구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풍경은 무슨 의미를 열어놓는가. 풍경은 자연이 아니다. 풍경과 자연은 다르다. 인간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스스로 그러한,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자연에는 인간의 인식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그곳에, 그저, 있었던 것처럼, 있을 뿐. 그렇게 그저 있는 자연을 보고 있으면 자연에서 건너오는 것이 있고, 자연 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만나는 접점에서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열린다. 내가 건너가면서 자연은 하나의 풍경이 되고, 내가 투사되면서 풍경은 나의 풍경이 된다. 그러므로 풍경은 어쩌면 자연을 향한 나의 인문학적 배경일 수 있고, 그 배경 여하에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의 자연에서 다른 풍경을 본다. 그렇게 작가는 길에서 삶의 유비를 보고, 바다에서 인식의 임계점을 보고, 갯벌에서 밤의 기억을 보고, 갯벌에 부유하는 돌에서 자기를 본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돌을 그린다. 길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갯벌을 그리다가, 종래에는 갯벌에 부유하는 돌을 그린다. 길에서부터 시작된 긴 여정의 끝에 당도한 종착지라고 해도 좋다. 앞서 길을 그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난 돌은 그렇다면 자기일까.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돌을 그리면서, 동시에 돌에 투사한 자기를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돌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돌을 빌린 작가 자신의 초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돌에는 작가가 겹쳐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의 관계 문제를 건드린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천착한 형식주의 논리가 아니라면, 추상은 구상 속에 이미 잠재해 있었고, 가능태의 형태로 형상 속에 잠자고 있었다. 추상은 구상의 잠재성이고 형상의 가능성이다. 어떻게 그런가. 우리가 구상을 구상으로 형상을 형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관계망을 걷어내고 보면, 구상은 추상이 되고 형상이 추상이 된다. 사물 대상을 클로즈업해서 볼 때 그렇고, 관계가 삭제된 상태에서 사물 대상 자체를 볼 때가 그렇다. 그렇게 볼 때 구상적이고 형상적인 사물 대상은 추상적으로 되고, 본질적으로 되고, 관념적으로 된다. 감각적인 풍경이 관념적인 풍경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이며 계기가 된다고 해도 좋다. 그 경계의 풍경을 통해서 작가는 풍경의 풍경, 풍경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풍경에 투사된 자기를 그려놓고 있었다. 이런 존재론적인 반영이 아니라고 해도, 그림 자체가 주는 감각적 쾌감이 작가의 그림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