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길(토마스 최)/ 바다, 세상의 끝, 어쩌면 세상의 경계에서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최만길은 학습 과정에서 사실상 회화와 조각을 복수 전공했다. 여기서 사실상이라고 한 것은 실제로는 회화를 전공했지만, 이후 어떤 연유인지 조각을 독학으로 병행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면적인 이미지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만지고, 만들고, 부수고, 쌓는, 재료의 물성과 직접 몸으로 부닥치는 과정에서 오는 감각적 경험(직접성이라고 해도 좋고 실제성이라고 해도 좋을)이 작가를 조각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회화가 환영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조각은 실재를 창조한다고 한 미켈란젤로의 말을 떠올려봐도 좋을 것이다(이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가 사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조각은 노동에 가깝다고 해서 회화와 조각 논쟁에 불을 붙였다). 

당시 작가의 조각을 보면, 인체를 반 추상화한 조각으로, 주제로 치자면 정을 주제로 한, 그리고 꿈을 주제로 한 조각들이다. 아마도 가족을 표현한 보듬는 형상으로 정을 주제화한, 하늘을 향해 비상하거나 도약을 예비하는 형상으로 꿈을 주제화한 조각들이다. 정과 꿈, 그리움(존재론적 자궁에 대한 원형적인 기억이라고 해도 좋을)과 비상으로 귀결되는, 보편 인간의 원초적이고 소박한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회화 밑바탕에는 조각에 대한, 조각의 물성에 대한 감각적 경험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미지에 바탕 한 회화와 물성이 강한 조각이 어느 시점에선가 하나의 결로 합체되는 것인데, 회화와 조각을 종합하면서 저부조(릴리프)로 나타난 자기만의 형식을 얻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 매개체(회화와 조각을, 평면과 입체를 종합하는)로 도입된 것이 한지다. 모더니즘에 바탕 한 단색화의 경향이 강한 평면적 회화가 그 하나라고 한다면, 조각적 물성과 질감이 두드러져 보이는 반입체적 회화가 또 다른 한 경향을 예시해주고 있다. 전자를 보면, 한 눈에도 추상성이 강조돼 보이는 화면으로 바탕에 원색을 깔고 그 위에 한지를 덮었다. 그리고 한지 표면을 찢어내거나 젖은 상태의 한지를 도구를 이용해 밀어내 바탕의 원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이게 했다.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원색이 구멍과 상처(희로애락의, 몸에 아로새겨진 흔적이라고 해도 좋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추상회화와는 다른 점이다. 모더니즘적인 형식에 생철학 혹은 존재론에 속하는 삶의 질곡을 담았다고 해도 좋다. 저부조로 나타난 근작과는 다른 결의 작업이라고 해도 좋고, 근작의 밑바탕에 살아 숨 쉬는(근작에서 종합되면서 근작을 밀어 올리는) 원동력에 해당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그간 작업의 경로를 살폈다면, 이제 근작을 보자.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나만의 풍경이라고 부른다. 내면 풍경, 혹은 심의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다름 아닌 나만의 풍경이란 점에서는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는 자기반성적인 작업이라고 해도 좋고, 자기의 유래를 찾아서, 어쩌면 상실된 고향(지정학적 고향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고향)을 찾아서 길을 떠나는 원형적인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부르고, 그 집단적 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작가의 경우에는 땅 그러므로 대지와 특히 바다)을 원형이라고 부르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는데, 그런 원형적 이미지를 되불러오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여기서 풍경은 자연과 어떻게 다른가. 스스로 자족적인 자연에는 인간의 인식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런 자연을 보고 있으면, 자연에서 건너오는 것이 있고, 자연으로 건너가는 것이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교감인데, 그 교감을 매개로 비로소 열리는 것이 풍경이다. 그러므로 풍경은 자연에 대한 나의 감정이고, 자연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자연에 투사한(된) 나 자신이고, 그러므로 나의 인문학적 배경이다. 그러므로 나만의 풍경이라는 주제는 어쩌면 적확한 표현일 수 있는 것이 풍경이 바로 자연에 대한 나의 감정이며, 나의 해석이며,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존재론적 증명이고 확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바다 앞에 선다. 존재론적 고독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드문드문 섬들이 떠 있는 바다 앞에 서고, 그 끝을 헤아릴 수도 가름할 수도 없는 밑도 끝도 없는 막막한 바다 앞에 서고, 은근한 달빛이 수면을 희롱하며 물비늘(윤슬)을 만드는 칠흑 같은 밤바다 앞에 선다. 모든 바다는 세상의 끝이다. 세상이 끝나는 경계다. 그러므로 바다 앞에 선다는 것은 세상의 끝에 서고, 세상의 경계에 서는 것과 같다. 그리고 여기에 밤바다는 세상의 끝에서 시작되고, 세상의 경계에서 비로소 열리는 침묵(우주론적 침묵? 존재론적 침묵? 절대적 침묵?)과 대면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달빛이 희롱하며 물비늘을 만드는 밤바다의 절대 어둠이 정중동 속에 파토스를 숨겨놓고 있다. 그 파토스가 분기되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안(카타르시스)을 준다. 그렇게 다도해를 소재로 한, 바다를 소재로 한, 밤바다를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세상의 끝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안을 준다. 작가의 심성(마음씨)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 바다 그림과는 사뭇 다른, 한눈에도 우둘투둘 돌출한 땅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일련의 그림이 있다. 주로 원형 캔버스에 만들고 그린 그림들이다. 여기서 작가는 보통의 한지와는 다른 출처와 성질의 한지를 재료로 도입하는데, 신문과 함께 서실에서 서예를 연습하고 버린 한지를 재료로 사용한다. 신문과 문자가 기록된 한지를 물에 풀어 종이 죽을 만들고, 그 종이 죽을 캔버스에 덕지덕지 올려 요철을 만든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한지를 덧붙여 마무리하는데, 해체된 문자 사이로 드문드문 해체되지 않고 살아남은 문자의 일부가 보인다. 여기서 신문은 일상을 상징하고, 서예 연습 종이는 수행(서예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표상한다. 일상과 수행(일상을 수행처럼 사는. 작가의 경우에는 작업이 일상이므로 예술을, 창작을 수행처럼 사는)으로 나타난 삶의 의미를, 어쩌면 삶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고 해도 좋다. 

그 문자가 해체된다. 불립문자다. 진정한 일상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문자로, 문자의 의미로, 말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세상의 끝과 경계에서 열리고 시작되는 밤바다의 침묵이 소환된다. 해체된 형태로 응축된, 문자 없이 의미하기, 침묵을 통해서 말하기가 예시된다. 그러므로 다시, 수행으로 나타난 삶(그리고 어쩌면 예술)에 대한 태도에 진정한 소통의 의미가 부가된다. 그렇게 작가는 역설적으로(해체된 문자를 매개로 한 것이므로 역설적인. 그리고 여기에 문자를 매개로 한 소통이 오히려 불통을 낳는 것인 만큼 다시 역설적인) 몸을 매개로 한 소통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신문과 문자가 기록된 한지를 매개로 자신의 작업을 의미론에 연결하고, 소통론을 열어놓는다. 

의미론적으로 그렇고, 작업의 물성에 주목해 보면, 작가의 작업은 땅의 질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땅의 단면을 그대로 떠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땅의 질감이며, 땅의 단면이라고 했다. 존재의 질감이며, 존재의 단면이라고 해도 좋다. 존재의 유래를, 존재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그 땅의 단면이 원형이다. 그 원형이 지구를 떠올리게 하고, 행성을 떠올리게 하고, 우주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칠흑 같은 밤바다 위에 보이지도 않는, 저 홀로 떠도는, 이름 모를 행성(그러므로 어쩌면 우주로 표상되는 존재)을 주조해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