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구조 속 생성의 자리
이선영(미술평론)
이영희의 [공든 탑과 믿는 도끼] 전은 무엇인가 무너지고 휘발하는 듯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바닥에 깔려있는 작품이 다수인 전시장 분위기도 작품 설치가 다 끝난 것인지 모호하다. 나무 프레임과 박음질, 때로는 붓으로 가필이 이루어졌지만, 흔들림을 붙잡지는 못한다. 이번 전시의 출발 이미지는 그가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이 매체를 지극히 불투명한 것으로 만든다. 사진에 가해진 여러 형식들은 재현에 반쯤 걸치는 추상 회화같은 느낌이다. 그의 작품은 굳이 그리지 않아도 생성되는 형상들로 가득하다. 단지 매체 실험이라기 보다는 현시대에 대한 작가로서의 발언과 감수성을 담은 것이다. 변화는 늘 있어왔지만 그 속도와 정도에 있어서 유래가 없는 시대에 대한 반응이다. 모든 시대가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한 시기이며 과도기로 여겨졌지만, 요즘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때가 있었나 싶다.

갤러리 에포크 1층 전시전경(사진 백영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녹아버린다’고 당시 산업자본주의를 평가한 것이 19세기 중반이니,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 또는 기대치의 역사 자체도 오래된 셈이다. 변화의 중심에 선 AI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정신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인간의 일에는 다소간 기계적인 부분이 있다. 자연과 사회 또한 미지와 우연에 맡겨진 빈 곳이 있었지만, 그 부분이 점차 코드로 세분화되고 자동적으로 채워지면서, 진짜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는 진실은 코드화의 확대가 계층 간의 간격을 더 벌린다는 것이다. 물어보면 뭐든 답해줄 것같은 전지전능한 도구에 마주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깨우치는 것일까. 내년 초에도 전시가 잡혀있을 정도로 바쁜 작가가 60대에 영국 유학을 새로 준비하고 있다는 점은 놀랍다.
그가 오랫동안 교육계에 있었단 점은 물론, 이후에도 미술대학을 포함하여 학교만 다섯 군데 이상을 다녔고, 학교 외의 여러 전문 기관에서 새로운 기법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계속 배우고 있다는 점은 그의 앎에 대한 의지를 반증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객관적’ 경력을 쌓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0여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퇴임을 얼마 남기지 않았음에도 관련 분야의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배울수록 작업을 할수록 작가는 목이 마르다. 아마도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사실, 확실성과 더불어 불확실성도 높아지는 역설을 체감한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가 섭렵한 다양한 앎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지류들이 모이는 장이 바로 예술이라는 점이다. 그의 앎에의 의지는 예술을 어떤 지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검증하는 추동력이 된다. 한국의 정치 현실을 지배하는 이항 대립적인 상황이 목소리 큰 확신범들을 양산하고 있음과 비교하면 된다.


2층 설치장면
대답 없는 질문을 계속 해 나간다는 예술의 특징은 그에게 이런저런 사유 실험을 행할 수 있는 장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의 실험은 관념이 아니라 손발이 움직이는 실행적 차원에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이다. 예술이 관념화되면서 기법이나 손의 노동이 억압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러한 오판은 예술을 멀리하게 하는 가까운 길이다. 개념미술의 창시자 뒤샹이 말년을 장기두기로 마친 점은 합리적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결론이다. 움직이면서 하는 사고가 예술이다. 예술은 정치와도 다르게 실천적이다. 예술은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지식의 시대에 인간이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한다. 기계와 마주해서 받아들이기만 하는 인간은 기계적인 것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비자로만 주저앉을수 밖에 없다. 오히려 아나로그적인 경험이 많고 디지털 우주로의 변화를 체감한 세대에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기술적 현실 앞에 모두 ‘초짜’인 것이다. 이영희는 AI를 비롯해서 현재 전개되는 기술혁명에 대해 촉각을 세우면서도, 그의 주요 방식은 다소간 고풍스럽다. 그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재봉질은 거의 드로잉 수준으로 손에 익은 오랜 방식이다. 최근 전시에서 자주 쓰는 사진이나 영상도 그자체로는 새롭지는 않다. 그는 얼마 전부터 전문적으로 사진과 영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 배움은 자기식으로 변형을 하기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하다. 가령 그의 ‘사진’은 마구 흔들려 있고 여기에 재봉질, 주름, 붓터치 등이 더해져서 해상도는 더욱 떨어진다. 형식이 하나씩 보태질수록 사진을 흔들어서 벌린 틈은 더욱 많아지고 커진다. 그는 이 틈을 생성의 자리로 만들려고 한다. 나무틀에 안치된 작품들은 큐브나 퍼즐처럼 의미의 조합을 위한 설치 방식으로, 의미를 결정하는 변수를 또 늘린다. 확실한 듯 하지만 이미 금가 있는 거울의 속성을 활용한 설치도 비슷한 맥락이다.
불확실성은 확실성에 기댄다. 그래서 이영희의 작품에서 최초의 지시 대상이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사진의 인덱스적 측면은 그것이 진짜 피사의 사탑이든 놀이공원의 시뮬레이션이든 상관없이, 일단 지상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유물이든 놀이기구든 사람들의 경험으로 남아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에서 지시 대상과 그 변형은 정(正)과 반(反)의 관계지만, 어떻게 ‘합’이 될지는 열어두고 있다. 제작부터 설치까지 다양한 조합의 방식이 내재한 그의 작품은 변증법적이 아니라 해체적이다. 해체가 겨냥하는 것은 해체의 이면이기도 한 구조이다. 해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구조는 형식과 의미의 형식상의 통합’(루셀)이라는 말은 인용하면서, ‘구조는 의미들을 집합시키고 테마들을 확인하며 불변 수들과 상응점들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 내지는 관계에 불과했다’고 비판한다. 해체주의자에게 구조는 전체주의적라고 생각되었다.

갤러리 에포크 2층 전시전경


하지만 해체는 구조 이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견고한 구조 자체에 내재해 있음을 밝히는 과정이다. 구조와 해체의 관계는 이영희가 오랫동안 주제로 삼았던 ‘crack(틈/균열)’의 역할과 같다. ‘나의 작업은 어느 순간을 극적으로 폭발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쉽게 감지되지 않았던 불안정의 구조를 천천히 가시화한다. 우리가 안정적이라 믿는 구조 안에 이미 존재하는 상태이며, 평온하게 여겨지는 세계 내부의 미세한 흔들림을 드러낸다. 어쩌면 균열은 붕괴의 시작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는 작은 틈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틈은 공간적 이미지지만, 결국 그 틈이 끌어내는 것은 변화, 즉 시간이다. 굳어있는 구조는 변화의 힘에 직면한다. 순간으로 동결된 시공간인 사진은 시간의 축 위에 여러 방식으로 재배치된다. 다른 비율과 크기, 색감 등으로 출력하는 것은 물론이고 액자 틀에 넣어져서도 작품들 간의 배치는 열려있다. 그의 작품은 시간의 축 위에 놓여지는 공간이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예술에서 시간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옛 사람들은 안정된 우주를 규칙적인 관계의 체계 속에 유지하는 균형있는 구성이 존재하는 줄로 믿었다. 우주의 질서는 체액으로부터 원소, 그리고 궤도를 운행하는 별들까지 적용되는 모든 등급과 계층 속에 신, 인간과 동물, 식물과 광물의 왕국을 포용하고 있었다. 천체와 천체 간의 정확한 조응, 각각 다른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와 원소 간의 균형은 대우주와 소우주를 완벽한 세계 정형에 들어맞았다. 신에 의해 주어진 원리에 입각한 이 조화된 통일성은 우주라는 폐쇄 원을 가득 채웠다.’(멘딜로우) 하지만 ‘전체적인 우주(universe) 자체가 분산우주(multiverse)가 되어. 우리는 개방된 형태(gestalt)에 직면한다.’(멘딜로우) 고정된 형태는 재현하기 쉽고 투명한 언어로 체계화된다. 완벽한 원근법 체계가 적용된 고전주의적 회화에서 얼어붙은 듯한 장면을 떠올려보라. 반면 변형 중인 작품의 언어는 불투명하다.

1층, 가파도

1층 가파도

1층
‘우리의 의식과 표현 사이에, 끼어드는 불투명한 매체가 있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본성상 단선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생의 유동성을 표현하기가 어렵다’(멘딜로우). 이영희의 작품에 내재된 여러 겹의 장치는 공간예술에 시간을 개입시키는 방법이며, 작품 자체가 시간성의 표현으로 나아간다. 차이와 흔적의 계열이라고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본질과 구조에 내포된 형이상학과 관념론을 거부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공든 탑과 믿는 도끼]인데 그 서술어가 무엇이겠나? 이중의 강조는 대개 부정으로 기운다. 그의 전시 부제에서 공든 탑은 무너졌고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는 예견이 가능하다. 이번 전시에서 ‘틈’의 위상은 어느 때 보다 강하다. 그가 한국적 시스템 내에서 무난해 보이는 삶을 살아왔고, 미술작업에 본격적으로 매진한 이후에도 적지 않은 전시 기회를 가졌다는 점은 그의 근본적 회의에 주목하게 한다.
하지만 그가 전면적 회의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회의주의 또한 유형화된 사유 또는 자세로서 기성의 지배 질서에 의해 쉽게 코드화된다. 기성 질서는 그들만의 영토를 마련해주고, 그렇게 경계는 다시 도전받지 않는다. 일찍이 아방가르드의 역사가 그러했고, 특히 요즘처럼 모든 것이 쉽게 주어지는 환경은 냉소주의를 양성한다. 회의주의나 냉소주의는 끝없이 투여되어야 하는 어마어마한 예술적 열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방식은 외부로부터의 도전이 아니라 내재적인 전략이다. 그가 오랫동안 주목했던 ‘크랙’에는 안정된 중산층의 삶에 내재하는 균열, 기성 질서를 확신하는 도그마에 대한 분열이 포함되어 있다. 코드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그가 사진을 흔드는 이유 중 하나는 AI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과 판단을 염두에 둔다. 기계는 정확하면서도 유연성이 부족하다. 벽과 바닥에 설치한 작품은 거울반사와 관련된다.

1층 우면산 둘레길

1층 우면산 둘레길
벽과 바닥의 작품이 일치하지 않는 반영 상은 재현의 논리를 해체한다. 현실은 조각난 것이며, 거울은 사회의 요구를 담은 상상적 단계로 거짓된 통합상을 만든다는 심리학의 가설은 거울상과 재현의 관계를 해체한다. 왜 재현주의는 현대미술에서 문제시되는가.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모방에 내재된 욕망을 밝힌다. ‘우리는 사물을 표상화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하나의 객체로, 객관적인 현실로 만들려고 하며, 그것을 공간의 순수성에서 끄집어내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대상에 의지하며 일삼는 확언은 ‘작가에게 진리와의 관계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 진리는 개인을 초월하며 시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진리’(블랑쇼)이다. 그러한 진리는 쉽게 코드화 된다. 코드는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현실을 재현하려 하며 상당 부분 성과를 거두어서 매끈한 가상현실에서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끼는 이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가상현실이 더 매끄럽고 사실주의적으로 보일수록 현실은 더 흐릿하고 더 울퉁불퉁하다. 현실 자체가 불확실하고 심지어는 불편한 것이 된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변형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현실은 그가 현장에서 찍은 사진으로부터 왔지만, 대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그의 작품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며 불이 나고 대지는 요동친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생성이며, 구조가 아니라 발생이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발생의 입장에서 구조를 비판한다. ‘역사의 형이상학에서 텔로스(목적인)의 탄탄한 구조는 형이상학을 본질화 한다...진리의 의미 혹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의 의미는 어떤 종류의 제한도 없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전 시간성과 보편성의 요구이다.’ 데리다는 텔로스를 개방적으로 본다. 그것은 열린 문이다. ‘텔로스는 역사의 구체적인 가능성이요 탄생 자체이고 생성 일반의 의미이다. 결국 텔로스는 구조적으로 발생 그자체’(데리다)다.

1층

1층

2층 서울랜드

2층 서울랜드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이영희의 여러 형식적 장치에서 사진 이후가 더 복잡하다. ‘이후 이들 이미지들은 포토샵 안에서 다시 해체된다. 자르고, 삭제하고, 색과 노출을 조절하는 동안 원래의 맥락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오점을 지우지 않으며, 덧씌운다. 오히려 익숙한 의미가 흐릿해지도록 개입한다. 이들은 다시 배접 광목천 위에 평판 인쇄되고, 솜과 공업용 재봉을 통해 물질화된다. 표면은 유지되는 듯 하나 내부는 미세하게 부풀고 비틀어진다. 재봉선은 구조를 지탱하는 봉합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crack(틈/균열)의 미세한 흔적이 된다.’ 이번 작품의 기본 이미지가 된 사진은 가파도, 우면산 둘레길, 서울랜드 등에서 촬영한 것이다. 흐릿해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가파도는 자연의 비중이 높고 우면산이나 서울랜드는 자연과 인공이 뒤섞여 있다. 대부분 풍경을 이루는 주요 색감으로 포화시키며 모노톤의 그린과 블루, 그리고 빛의 궤적으로 이루어진다.
흔들림은 원래의 장소와도 관련된다. 가령 섬은 파도치고 바람부는 자연의 힘이 압도적인 장소로 원소의 빠른 순환이 느껴진다. 우면산은 산책로를 비롯해 자연이 잘 보존된 도시 인근이지만, 몇년 전 일어난 우면산 산사태가 기억난다. 또한 작가는 인근의 카페 같은 실내 풍경도 담았는데, 이는 자연재해 뿐 아니라 도시의 평범한 일상 또한 그리 단단한 지반을 가진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무관한 듯한 다른 장소에 존재하지만, 나는 이들을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한다. 우리는 무엇을 안정적이라 믿고 살아가는가’를 묻는다. 서울랜드는 환상에 빠져들고 싶은 이들이 놀러가는 곳으로 각종 놀이기구와 행사가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든다. 달처럼 보이는 인공광원부터 폭죽같은 소리와 움직임을 낳는 빛의 궤적이 담겨있다. 피사의 사탑같은 유명 건축물의 모사물은 여러 겹의 흔들림이 있다. 원본은 건축으로서의 안정감이 부재하고, 모조품 또한 모조품이라는 그 지위 때문에 흔들린다.






2층 서울랜드
이영희는 ‘원래 피사의 사탑은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기울어진 건축물이다. 그러나 의도되지 않은 불안정은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 되었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인식되는 기념비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놀이동산의 피사의 사탑은 그 기념비를 다시 흉내 낸 놀이 구조다. 그곳에는 역사도, 시간의 축적도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가능한 풍경으로 축소된 복제물이다...믿음은 원본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복제된 구조 안에서도 충분히 믿는다.’ 본래 축제란 일상 시공간의 질서를 전복하고 흔드는 과도기적 시공간을 말한다. 기존의 존재를 불태우고 다시 태어나는 전통적 축제의 의미는 퇴색하고 가짜들로 가득한 오락이 되었다. 얼마 전 개인전에서 보여준 사천왕상 또한 강하게 흔들린다. 이 문지기는 침입자를 내치면서 강한 진동을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초인적 기대치와 달리 스스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우락부락한 큰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눈빛은 액체처럼 흐르고 눈알 또한 여럿으로 불어서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 작가는 이 도상에 대해 ‘사천왕상은 오랫동안 보호와 질서, 믿음의 구조를 상징해 온 존재다. 그러나 나는 그 얼굴을 흔들리는 사진으로 촬영한다. 위엄은 흐려지고, 보호의 얼굴과 발은 미세하게 떨리며, 견고해 보였던 권위는 잠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그는 각 풍경이나 대상에 내재된 균열과 움직임을 끌어내 가속시킨다. 외부적 힘 뿐 아니라 내재적 원인에 의해서도 흔들린다. 연꽃처럼 구체적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애초의 피사체가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은 흔들림도 발견된다. 연꽃의 경우 다양한 각도로 촬영되어 연꽃에 담긴 명상적 분위기는 약화되고 균열과 흔들림이라는 전시의 기조로 맥락화된다. 전시장 1, 2층의 벽에 걸린 작품 아래에 깔아 놓은 작품은 마치 반영상같다. 하지만 색감이나 형태 등에서 연결고리는 있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2층 사천왕상
마주한 것들 사이에 조응이 일어날 뿐이다. 장소별로 계열적인 장면들을 찍었기에 선택적 조합이 가능하다. 나무틀 안의 이미지는 여러 크기로 작가는 설치적인 방식으로 벽면에 구성했다. 반영상을 염두에 둔 바닥의 작품은 설치 중인 작품들처럼 보인다. 재현이나 코드가 아닌 그의 작품에서 평범한 보여주기 방식은 지양된다. 천정 근처 모서리에 맞붙은 작품은 모서리에서 생겨나는 듯 배치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걸린 작품은 언뜻 갈대밭 위에 휘엉청 뜬 노란 달 같지만, 뜻밖의 대상이며 그조차도 많이 주름져 있다. 가로형 작품은 풍경의 요소가 더 강하다. 달이라는 광학적 현상은 촉각적인 무엇으로 제시된다. 사진이 출력된 천 사이의 솜들은 밖으로 나와 있고, 그자체의 선적 요소이자 화면을 정돈하는 느낌을 주는 재봉선이 촉각적이다. 이러한 따스한 촉각성 때문에 여성 몸의 깊은 곳에 자리한 배(胚)같은 느낌도 있다. 배는 주름을 접고 펼치는 운동을 통해 생명을 발생시킨다. 경직된 구조의 대항마는 여전히 삶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