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속에 숨어있는 시간의 결
이선영(미술평론가)
공간의 시간성
올해 20주년을 맞는 클래이아크 김해 미술관의 대표 공간인 돔하우스의 내부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열리는 [주름과 덧댐] 전은 잘 짓는 것 못지않게 지속적인 살핌을 요구하는 건축의 특성에 주목한다. 대기업 상표가 붙은 완제품으로서의 건물을 선호하는 문화에서 과정은 감춰지곤 한다. 굳이 과정이란 것이 있다면, 상품 가치의 변동에 대한 관심 정도 아닐까. 건물은 삶의 장이라기 보다는 물신숭배의 대상이 됐다. 물신이란 그 말의 기원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마술처럼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 전시는 고정된 상태의 건축이 아닌 그 맥락을 풀어낸다. 이를 위해 건축이 놓인 환경은 물론, 사용자와 함께 서서히 변하는 안팎의 상태를 살핀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삶을 재편하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가일층 커지는 가운데 시공간이 압축되는 강도는 더욱 커진다. 효율을 앞세운 그러한 경향은 양극화를 가속한다.
자본과 기술이 추동하는 유토피아적 청사진과 시장이 추동하는 물신적 가치 사이에서 우리의 삶을 담아내는 삶의 자리는 제대로 음미되지 못했다. 이 전시는 건축의 보이지 않는 부분 또는 가려져야 하는 부분을 전면에 배치하면서 삶이 펼쳐지는 자리의 ‘주름과 덧댐’을 살펴본다. 이 전시의 참여 작가/팀의 주제인 건축은 대표적인 공간예술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공간만큼이나 시간에 방점을 찍는다. 현대미술은 시공간의 결정적 단면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에서 시간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찰나의 순간을 물신화하는 것은 관념적이다. 반면 시간성은 상황과 기억, 그리고 그것을 주관하는 몸의 무의식을 강조한다. 시간은 뭐든 끼어드는 경향이 있기에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폄하되었지만, 삶의 많은 것을 포괄하던 예술의 풍부함이 나날이 가지치기 되는 상황에 대한 반대급부인 셈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현대조각사의 흐름]은 그러한 이론적 경향을 구체적인 미술사의 작품에 적용하여 설명한 기념비적인 책이다.
크라우스는 현대조각이 실제 시간 속에서의 지속의 경험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현대조각은 ‘비합리적인 입체, 즉 구조적 핵심의 논리가 배제된 주변적 요소들의 배열로서 취급하는 경향’(크라우스)이 있는데 그 예인 미니멀리즘에서 ‘그 질서는 합리적이며 내재적인 질서가 아니라, 하나 뒤에 다른 것이 뒤따르면서 연속되는 단순한 순서와 같은 것’(도날드 져드)이다. 이를 통해 ‘현대조각은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 전환되는 과정이 완결됐다’(크라우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삶의 과정 또한 불투명한 지각의 과정을 통과하는 시간의 지속이다. [주름과 덧댐] 전은 작가의 의도가 투명하게 관철되는 청사진 같은 구조가 아니라, 상황의 논리를 중시한다. 전시 키워드로 제시된 ‘주름’은 접혀지거나 펼쳐질 때, ‘덧댐’은 기존의 것에 부가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펼쳐지는 주름과 덧대지는 시간의 연속이다.
이때 전제되는 몸이 통과하는 시공간은 서사가 된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구성은 시간’(거트루드 스타인)이며, 작가의 노력이 ‘시간의 지속감, 경과감, 퇴적감을 주는 것’(헨리 제임스)이라고 인용한다. 요컨대 훌륭한 작가라면 누구나 지속적 긴장, 속도, 연속성 등 자신의 기법에 있어서의 중심 문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다. 시간성이 의식적으로 실험된 작품은 ‘보다 더 완전한 표현뿐만이 아니라, 보다 더 진정한 현실의 개념까지도 표현하게 해줄 것’(멘딜로우)이다. 공간예술에도 시간성은 내재되어 있는데, 이를 더욱 활성화하여 공간 안에 접혀진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관객의 동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설치 방식 또한 시간적이다. 관객은 의미의 단면으로 간주된 형태만 훑어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시간의 단면들을 음미한다. 공간적 지각에 시간적 기억이 보태져서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전시에 제시된 건축적 공간은 ‘어디의 몇평인가’ 같은 공간적 범주가 아니라, ‘어떻게 얼마나 살았나’같은 시간적 범주가 더 중요하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집을 비롯한 평범한 공간에 숨어있는 시간을 끌어낸다. 시간이 압축된 낡은 벽, 오랫동안 살았던 집의 이야기, 주변의 조건을 받아내어 매번 다른 풍경을 펼치는 면들, 공원급의 드넓은 미술관 부지의 긴 동선, 빗물받이, 관을 통과하는 여러 물소리, 식물이 자라는 정원 등은 어떤 결정적 지점 보다는 시간의 축을 따르는 느릿한 움직임을 따라간다. 공간 속에서 숨어있는 시간의 결은 펼쳐지고, 움직이는 관객의 지각과 기억이 덧대진다. 작품의 배치 또한 각각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겹쳐지는 전이의 지대가 존재한다. 한 작가의 작품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다른 작품과 교차하면서,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힌다. 관람자를 안내하는, 각 전시장을 알리는 작은 표시들 또한 작품이다.
여섯 작가/팀의 주름과 덧댐

이윤석(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클래이아크미술관에 있음)
이윤석의 [서산 좋은 집]에 등장하는 부부의 회고담은 그들이 곧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점만 빼면 부러움 그자체로 다가온다. 20분 분량의 인터뷰는 이사 전에 지인들을 초청한 마당 파티라는 범상치 않은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시회도 오프닝보다는 전시 마지막 날 하는 클로징 파티가 종종 열린다. 처음의 이상적인 기대치보다는 종결되는 시점까지 진행된 실제적 과정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예전에 아파트에 살던 부부는 서산에 마당 있는 집을 짓고 25년간 살아왔다.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그 집에서 살아온 과정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집의 본래적 모습이 있다. 초기에는 ‘마당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다’는 말에는 마당 가꾸기에 대한 거주자의 열정이 깔려있다. 물론 손이 많이 가는 단독주택의 면모는 한국의 지배적인 주거 양식이 된 아파트의 필연성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전시장 벽에는 지나온 시간의 단면이 선택돼 사진으로 붙어 있는데, 그 세부적이고 주변적인 장면들은 일상을 이루는 대목에 주목하게 한다. 단편과 단편 사이에 보이는 전시장의 하얀 벽은 압축된 시간의 간격을 말한다. 커튼 같이 드리워진 작품 [아마추어 아마추어]에서 비즈로 장식된 주름이 많이 잡힌 천은 그동안 꾸몄을 집의 시공간임과 동시에, 가벽 보다 유연한 구조로, 다른 작가의 작품과 경계를 표시한다. 이윤석의 또 다른 작품은 큐빅하우스의 외부공간을 개조한 [벽돌, 자갈, 샬레]다. 작품 제목은 새로운 마당을 구성하는 재료 이름이기도 하다. 기존의 낡은 나무 데크를 제거하고 자갈을 깔며 식물이 자라는 투명한 화분을 설치하는 등, 미술관 한 켠에서 벌어지는 리노베이션을 작은 규모로 반복한다. 다시 탄생한 장소는 깔끔한 마감재로 덮이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매개로 한 물의 흐름이 드러난다. 쇄석 사이사이에 설치된, 내부의 흙층이 보이는 투명 화분들의 높이는 각기 달라서, 이 공간이 살아 움직이는 장이라는 것을 구조적으로 표현한다.

김민선
김민선의 [흔적의 벽]은 미술관 벽 안 층을 한꺼풀 드러내는 듯 연출됐다. 석기질 점토와 도자 혼합 원료를 가압 성형한 내벽은 약 200점의 단위체로 구성돼 있다. 큐빅하우스로 나가는 문의 [펼쳐진 돌-문고리] 또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관객으로서는 여기에 있었던 구조를 저기의 다른 맥락에서 발견한다. 겉의 벽을 떼어낸 모양새라 대략 세가지 크기의 타일 표면 흔적은 반복되지 않는다. 같은 생산과 유통라인을 거치는 상품이 처음에는 똑같다가 마치 다른 인생을 산 쌍둥이 얼굴이 달라지듯 차이가 난다. 작품 제목에 포함된 ‘흔적’은 결국 압축된 시간의 자국이다. 매순간 업데이트 되는 인터페이스를 보는 것이 일상화된 정보화 사회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가 표현한 시간의 자국은 거의 굳은 공간이다. 신의 계율이 새겨진 석판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의 흔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모자란 바는 없다. 그의 작품은 전시실에 원래 있었다가 재발굴된 층은 아니다. 또한 이 작품은 전시 기간이 지나면 화이트 벽면으로 복구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굳이 실제의 벽면에 설치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시간의 자국을 지우고 감추려 하는 관행에 대한 대응이다. 작가는 기억의 의미가 무색하게 깔아뭉개지는 삶의 흔적들을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기념한다.

서민우
서민우의 [물은 관 모양으로 흐르고 새는 자리를 찾았다]는 금속으로 된 관에 스피커를 달아 미술관 안팎 여기저기에서 수집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게 한다. 금속관은 전시장 천정에 원래 있는 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폴리염화 비닐과 케이블로 감싸여 있다. 현대미술 전시실은 높은 천고를 가져야 하므로, 보통 건축물이라면 내부로 가려져야 할 관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그러한 노출된 관같은 구조를 설치를 통해 관객 앞에 세웠다. 8채널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미술관 여기저기에서 기이하게 울려 퍼진다. 관악기처럼 관은 일종의 울림통으로 작용하기에 소리와 밀접하다. 연주자의 호흡은 관을 통과하면서 음악이 된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관은 여러 관들을 내장하는 건축 자체가 유기적 구조를 가짐을 새삼 드러낸다. 단순한 형태나 구조와 달리, 소리는 살아있음의 특징 아닌가. 소리는 고정된 형태와 달리 생겨나거나 소멸하고 작아지거나 커진다. 시적인 제목은 ‘하나의 선 위에 자리 잡는 몸의 상태’을 보여주는 ‘전신주 위에 앉은 새’에서 영감을 받았다. 유기적 구조는 유기체와 조응한다는 것이다.

비유에스건축
비유에스 건축(박지현+조성학)의 [빗물받이]는 건물의 한 구성요소인 빗물받이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빗물받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건물에 고인 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매우 시끄럽고 배수가 제대로 안되면 크고작은 사고가 날 수 있다. 기후 변화로 물부족 사태가 상시화되면 집 안팎에 흐르는 물 한방울도 잘 활용해야 한다. AI 시대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면서 그 사회적 분배가 난제에 빠져 있는 가운데, 자연과 공존했던 시대의 오랜 지혜도 참고한다. 여러 스케일의 건축 모형에서 나타난, 원래는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요소인 빗물받이는 지붕 전체가 되기도 하고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의 운치를 살려주기도 한다. 가장 규모가 큰 구조물은 그자체가 빗물받이같은 지붕과 나무로 된 본체가 있는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수직과 수평, 사선으로 구성됐으며, 평행으로 설치된 빗물받이에는 식물들이 자란다. 그것은 작가가 빗물받이의 생태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자연에 내재된 원소의 순환에 역행하는 문명의 장벽들이 많기 때문에 흐름의 맥을 짚어주고 틔어주는 구조에 대한 감각이 요구된다. 빗물받이는 무슨 거창한 장치나 기계가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순응하는 물질의 흐름에 작은 길을 내어 주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은 자연과 건축의 내재적 관계를 표현한다.

김민수
김민수의 [Ways of Closing]은 여러 장소에 같은 폭의 하얀 천들을 드리워서 [주름과 덧댐] 전의 장을 확장한다. 가령 사물함이 있던 긴 복도를 그저 한 장소에서 장소로 이동하는 통로가 아닌, 통창으로 보이는 미술관 주변의 자연 풍경에 주목하도록 의자를 배치하고 바깥의 빛을 받아 실내 분위기를 조율한다. 전시장 입구의 안내문이 있는 장소나 큐빅 하우스의 통창에도 설치했다. 그의 작품이 자리한 곳들은 복도나 로비 등, 주요 전시 공간이 아닌 일종의 유휴공간이다. 큰 막을 내려뜨리는 비교적 간단한 조치만으로 유휴공간은 예술작품이 놓인 다른 장소같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보통 유리창에 바짝 붙여서 설치되는 구조물이 관객 앞으로 훅 다가와 있는 모습이다. 그것은 방해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방해는 주변을 색다르게 의식하게 한다. 한편 그의 작품은 옛날에 사용되던 발처럼 여기와 저기를 나누면서도 잇는, 유연한 가림막과도 비슷하다. 그의 작품이 ‘닫은’ 것은 무의미하게 방치된 죽은 공간이다. 주요 작품이 전시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곳에 내려뜨린 막들은 선(先)이해를 위한 읽기가 중요한 전시를 보기 위한 시간을 늘려준다. 무대가 열리는 듯한 기대치는 그 기대만큼의 결과를 낳는다.

김유나
김유나의 [시간지도]는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를 잇는 안내표지들과 이어져 있다. 표지들 또한 그의 작품이다. 여러 전시장을 통과해온 관객에게 그의 작품은 안내 표지들 중 가장 큰 덩어리에 해당되며, 표시는 다른 작품이 있는 공간들로 계속 이어진다. 블랙과 야광색 시트를 기하학적 모양으로 잘라 벽면에 구성하고 그 사이사이에 시계나 나침반 등을 떠올리는 형태가 모터의 힘으로 돌아간다. 기하학적 구성에 시간이 도입되는 키네틱 아트의 면모를 갖는다. 작품의 경쾌한 시각적 리듬은 길다면 긴 동선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반영한다. ‘시간지도’라는 개념은 어디쯤 왔을 때의 시간같은 일상 체험에 드러나듯 시간과 공간을 연결짓는다. 근대에 하도 분리된 것들이 많아서 시공간이라는 원래의 자연스러운 개념은 거창한 물리학 이론의 도움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저마다 아우성을 치는 스펙터클에 밀려 우리의 심리지도는 빈약하기만 하다. 가까운 거리도 스마트 기기의 도움이 없이는 헤매기 십상이다. 스마트 기기가 직접 감각기관과 연결되는 시기도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의 몸은 주변 공간과 더욱 단절된다. 육체적 감각과 부응하는 간단한 장치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아나로그의 힘을 잘 활용한다.
출전; 클래이아크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