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미로의 유랑자

 

이선영(미술평론)

 


소현우의 작품에서 인류의 미래에 중차대한 역할을 할 주인공은 토템 같은 머리 장식에 빛나는 홀을 든 선지자 풍모로, 동물들과 함께 사막을 횡단하는 중이다. 시야가 뻥 뚫려있으면서도 늘 지형이 바뀌는 ‘사막은 미로’(자크 아탈리)이다. 주요 길목에서 수수께끼를 풀어야 무사 통과할 수 있는 악무한(惡無限)의 길에서 별과 직관은 그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유목에서 대안의 정체성을 찾는 저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유목민은 보이지 않는 지도들 혹은 바람 속에 모래밭과 돌들 위에, 식물들 속에 쓰인 지도들을 읽을 줄 안다. 사막은 기호들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 황야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길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호들의 거대한 지도’라고 말한 바 있다. 버려진 인형에 남은 체취를 쫒는 반려견과 달리, 짐을 한가득 실은 사슴 뒷다리는 기계다.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기계’론(라 메트리)이 나오기 전에 이미 ‘동물은 기계’(데카르트)로 간주됐다. 모종의 결정론을 암시하는 기계론은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기계’(리차드 도킨스)라는 현대의 생물학적 사고에도 면면히 흐른다. 그것은 기계가 인류문명의 향방을 쥐게 된 시대에 더욱 힘을 받는다. 






사라진 시대-유랑 전 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봉산문화회관)



소현우의 작품에서 유목하는 무리(인간-동물-기계 복합체)가 이동 중인 땅은 이미 다가온 기후변화든 문명의 자멸에 의한 종말적 상황이든 더 이상 이전의 풍요로운 초록 대지는 아니다. 최악의 조건에 적응한 금속성 괴생물체가 스멀거리는 사막은 단지 불모의 자연을 넘어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한 경계 지역이다. 파괴된 문명의 잔해가 모래로 덮여진 상태이기에 때로 보물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한편 모래는 섬 지역 출신인 작가가 육지로부터 보호받음과 동시에 단절되었던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다. 동경과 희망을 잃지 않은 경계인은 불확실한 길이나마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자체 동력을 가진다. 경계 위의 존재인 괴물 또는 혼종이 진화인지 퇴화인지에 대한 판단은 열려있다. 인류의 종말과 희망이라는 거대 서사를 다루는 소현우의 작품은 SF적인 상상력과도 친숙하다. 사막화된 세상에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는 필요한 물품을 싣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난다. 등짐의 물건들은 시스템에 의지하는 코드화된 물건, 가령 접속이나 충전이 필요하지 않다. 


미래의 조건으로 유목을 지적한 저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21세기의 인간은 유목민이며 그가 소지하는 유목물품은 항상 접속상태로 있게 하는 휴대가능한 사물’이라고 예언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스마트 기기는 이미 혼종 인간 안에 DNA처럼 장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소현우의 작품은 정보기술이 발달로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낙관주의에 회의적이다. 주인공은 한 발 앞서가는 개의 코에 의지한다. 인류는 사냥과 수렵의 시대를 마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정착했지만, 유사 이래 유목민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점은 여전하다. 그가 처한 불안정성이 끝없이 이동을 촉구할 것이다. 작가가 평소에 벼룩시장 등에서 수집해온 오래된 사물들은 여정에 따라 추가될 수도 뺄 수도 있는 가변성이 있다. 이동하는 발치에서 발견될 유물이나 괴물도 그렇다. 그것들은 그 수수께끼같은 단편성으로 선형적 사고를 무화시킨다. 금속 용접으로 조각을 만드는 소현우는 단편들 잇기에 익숙한 편이다. 사슴의 등짐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유목의 필수품들이다. 










위험에 대비하는 총과 칼, 삶과 죽음의 의미가 담겨있을 종교적 물건(불상, 십자가), 언제 끝날지 모를 오랜 여정을 기록해 줄 타자기, 앞을 밝히고 보는 등불과 망원경, 그리고 섭식에 필요한 그릇 등등.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온 그 물건들은 최소한 한번 이상 몽땅 망해서 사막 아래에 묻힌 유물들이 불연속적인 것과 같다. 인간을 인간이게 했던 직립 보행은 그로 하여금 하늘과 앞을 보게 했으며, 희망을 꿈꾸게 했다. 정착민보다 유목민에게 희망은 더욱 강하다. 그의 작품에서 유목하는 존재는 사막을 건너가기에 적합한 발굽을 가지고 있으며 황금빛을 발하는 홀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을 해결해 주는 마술적 힘을 가진다. 작가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주인공이 여성상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발굽 모양은 초식동물의 그것으로 육식 동물보다는 평화롭다. 사자머리 장식을 한 그녀에게 육식동물의 특징은 덧붙여진 것이지 타고난 본능은 아니다. 서사의 주인공이 여성인 것은 아마도 종말 이후의 삶에서 희망을 잉태할 가능성의 담지체이기 때문은 아닐까. 

 

출전;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