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은 얼굴

살아있는 얼굴은 우리가 대하는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외면이다. 그 얼굴은 우리를 개체로 만들어준다. 비로소 말이다. 우리는 얼굴을 관통해서 내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모든 얼굴은 다르다. 지구상 60억 인구의 얼굴 하나 하나가 다 다르다.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얼굴은 신비로운 신호 발생 장치이다. 얼굴은 놀라운 깊이와 무한한 색조를 띤 메시지를 발산한다. 모든 얼굴의 근원은 캄캄하고 깊은 바다 속이다. 바다 밑의 어둠과 포말, 비릿한 내음과 햇살에의 갈망, 수면의 일렁임을 온 몸에 문신처럼 두르고 있는 것이 우리들 얼굴이다.
고낙범은 자신의 삶에서 친밀했던 이들의 얼굴을 단색조로 커다랗게 그려 놓았다. 자기 생에서 친밀한 이들을 선별해 그렸다. 그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색채가 대신한다.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이들에 대한 기억, 심리, 느낌 등등을 온통 핵으로 버무려놓았다. 그런데 색은 기억과 동시에 기억이 불분명하거나 모호해서 그저 막막하게 연상하는 느낌, 언어로 표명하기 곤란한, 그를 넘어서는 분위기 같은 것들로 확산되는 편이기도 하다. 어쨌든 특정한 기억, 주로 사적이고 친밀한 대상들에 대한 기억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의 역할이 그 색들이 한다. 기억은 이미지로만 머물지 않고 냄새나 색으로도 충분하다.
그 사람들은 이른바 고낙범 개인의 앨범에 들어있는 이들이다. 그려진 그림들의 목록이 앨범을 만든다.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는 자기 생의 시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친밀한 이들을 그렸다. 이 인물의 선택은 무척 개인적이고 오로지 자기에게만 의미가 있는 이들이다. 그들만이 지닌, 누구하고도 틀린 얼굴을 그림으로써 그 얼굴에 스민 자신의 시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그 누군가와 함께 했던 일생이다. 우리 삶은 무수한 인연의 그물망,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현기증 나는 촘촘한 우연들, 예기치 못한 만남들, 그리고 숙명적인 해후와 이별이 그렇다.
단색의 색으로 치환되고 분류된 이들은 이름을 지우고 생김새와 표정의 명확함을 슬쩍 망실한 상태에서 한 가지색, 서로 다른 색이란 단순한 색채정보로 환원된다. 고나범은 어떤 색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색을 가지고 다양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색채의 층을 넓혀간다. 그린다는 것이 동시에 색을 만들어 가는 것과 동일한 궤적을 이룬다. 색은 가변성이 있어서 자유스럽다. 무엇보다도 한가지 색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게 무척 많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색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빨간 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 색을 통해 기분이 좋아지고 에너지가 ‘업’up되는 느낌이 좋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색에 대해 민감하게, 정서와 심리적으로 반응한다.
그는 좋은 색을 낼 수 있는 물감을 선별하고 그런 다음 물감, 어느 한 색을 풀어서 사발에 담가놓고 풍부한 양을 만들어나간 후 작업을 한다. 여기서는 섬세하게 계산된 양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노랑 색을 사용한다면 노랑 색 계층의 여러 색을 만들어놓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는 매우 미묘한 감정의 여러 층위들이 스며든다. 색채의 차이를 이용해 상상력이 점가되는 이 형국은 사실 추상작업과 유사하다. 말하기를 그는 기본적으로 색채추상, 색면 추상 그 중에서도 마드 로스코 같은 이의 작업을 좋아한다고 하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려진 인물은 분명 누군가의 얼굴이지만 인간의 얼굴로 보기에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쾌락적이다. 어느 날 밤 ‘소셜 바’에 앉아서 한참이나 프로이트 얼굴 그림 연작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 그림은 다른 어떤 그림보다도 장식적이고 매력적이다. 동시에 친숙하지만 어딘지 낯설고 기이하다는 느낌(uncanny)도 강하다. 마치 우리가 당근이나 토마토, 바나나처럼 한가지 색으로 물든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물론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피부색 등이 각양각색이지만 고낙범의 그림에 쓰는 색하고는 다르다. 프로이트는 “기이한 것은 현실 속에서의 전혀 새롭고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형성된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단지 억압과정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소외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투사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이함은 감추어진 것을 폭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섬뜩하게 변형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기이한 것은 오래되고 낯익은 어떤 것이 억압되어 정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이함의 효과는 전혀 낯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하고 자연적인 것 뒤에 감춰진 모호하고 폐쇄된 영역의 가시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 같은 환상성은 낯익은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안전한 것을 불안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억압된 것의 회귀’)




전략과 구축

고낙범의 이력은 무척 다채롭다. 그는 자신을 미술관 노동자(museum worker)와 이미지(상)제작자(image maker), 그리고 기획(curating)과 제작(creating)의 중간위치로 규정한다. 그는 스스로 문화중개자라 고 말한 적이 있다. 전시기획, 작품활동, 강의, 글쓰기, 문화에 관련된 많은 일을 하다보니 이를 묶을 수 있는 ‘문화중개자’의 역할이 그것이다. 그만큼 그는 재주, 능력이 많은 미술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오감에 접수된 여러 문화 양상에 대한 지극히 섬세하고 지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에 따른 활동이 그간의 궤적이었다. 그는 미술보다는 문화에 대한 관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이 무엇보다도 흥미롭다고 한다. 그래서 작업은 순수하게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기보다는 여러 자극을 받고 섭취하는 일상, 바로 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예고를 나오고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 1기로 들어가 큐레이터 경력을 쌓았다. 그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작품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경험, 여러 나라의 특색을 음미해보는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전시를 꾸밀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기에 계획 있는 생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산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은 그의 그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작업하는 순간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는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적절하게 맞는다. 특히나 색에서 느껴지는 쾌감으로 인해 색에 빠져있는 그 과정, 순간 자체가 좋아서 그 과정을 철저히 즐기는 편이다. 그러니까 그림은 스스로 자아도취가 되어야 한다. 그의 그림은 철저히 계획적인 작품이다. 그는 미리 상상해서 결정되어야 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은 과작寡作이고 연작형식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합리화되어야 시작하는 스타일이다. 그간 서양미술사를 배우고 익히고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을 하나씩 구체화하는 것이 그림이 된다. 그는 서구현대미술사의 궤적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필연성을 느끼지는 못한다. 자신이 굳이 그 맥락에 있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작업은 그 맥락에서 벗어나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작업으로 반성화 되어 나타난다.
그의 그림은 구축적이고 계획적이다. 자신의 구체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나간다. 그는 우리 현대미술사가 쌓아놓은 게 없어서 서구의 경우처럼 해체하고 반성할 ‘꺼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는 큐레이터 경험 속에서 그 사이를 보다 분명히 인식한 것 같다. 그래서 그 틈에서 이해한 것들이 그의 일련의 작업들이다. ‘뮤지엄 시리즈’가 그렇고 ‘색띠 얼굴’이 다 그런 전략, 이해에서 나온다.




얼굴이라는 것

우리의 얼굴은 그 누군가의 얼굴을 추억한다. 기억할 수 없고 단 한번도 본적이 없던 그 누군가의 얼굴이 내 얼굴 위에 포개어져 있다. 나의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무수한 인연의 결과물이다. 내 몸의 근원이었을 까마득한 선조의 육신의 어느 한 조각이 편린처럼 스며들어있다. 그런가하면 내 몸은 나의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 이 몸은 또 누군가의 몸으로 기생해나갈 것이다. 어쩌면 몸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잠시 현존한다. 얼굴은 한 개인의 정체성의 표식이자 문화적, 사회적 징후이기도 하다.
얼굴은 인간과 더불어 태어났다. 그 얼굴은 잊혀지지 않으면서 언제나 새롭게 변해간다. 얼굴은 불사조이며 히드라이다. 얼굴은 그렇게 다시 태어나서 성장하고 분열하여 증식해간다. 얼굴은 그러니까 스스로 태어난 존재이다. 또한 얼굴은 나와 세상이 만나는 경계다. 얼굴의 피부야말로 세상의 끝이고 세계의 시작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물질세계가 만나는 장소성을 띈다. 다게르(Jacgues Daguerre,1787-1851)가 은판사진술로 최초의 사진을 찍어낸 1837년 이후로 사진과 영화와 텔레비젼은 인간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또한 시각(視覺)을 지나칠 정도로 발전시켜왔다. 당연히 몸의 나머지 감각기관은 배제되거나 은폐되어 왔다. 그래서 오로지 몸만큼이나 큰 눈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사실 사진은 처음부터 얼굴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그토록 오랫동안 응시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제 사진을 통해 저마다 나르시스(자아)를 분출한다. 초상사진은 구성의 체계가 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꾸미고 분장하고 특정한 외형으로 보여지면서 나르시시즘의 도구로 삼는가 하면 시간과 아름다움이란 이전의 규정 역시 흔들어놓았다. 시간은 고정되고 영원하게 정지되어 물화되는가 하면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도 사진을 잘 받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초상은 옛날처럼 위대한 천재를 영원히 기억하게 해주기보다는 어리석은 대중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로 전락했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효용성은 곧 확산되었다. 19세기 중반 일부 교도소에서 수감자의 얼굴을 사진에 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 주최측이 신분확인을 위해 사진을 도구로 사용하면서부터 이제 사진은 신분확인시스템으로 들어갔다. 그때 찍혀진 얼굴사진은 인물의 가장 객관적인 얼굴을 남기려는 의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때 초상사진 속 얼굴은 시간이 중단된 것처럼, 마취제에 마취된 것처럼 고정되어야 했다.
얼굴은 촉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의 집합체다. ‘얼굴’(불어로 visage)이란 단어는 ‘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videre의 과거분사 ’visus‘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얼굴‘은 보는 능력,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의 겉모습을 의미했다. 이제 얼굴은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기이한 패러독스가 자리한다. 정작 다른 사람의 눈에 의해서만 보이는 것,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지만 정작 나는 볼 수 없는 곳이 다름 아닌 얼굴이다. 내가 자랑하는 것인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것, 내가 세상에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내 가면, 내 깃발이면서 내 고통이기도 한 것, 그것이 바로 얼굴이다. 결국 내 존재의 유일성을 가장 분명히 확인해 주는 수단은, 모든 것을 뚫어보지만 정작 내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눈동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내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e Levinas)는 타인의 얼굴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라고 말했다. 타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얼굴이라는 얘기다.
무한히 다양하게 생긴 얼굴들, 그러나 불안할 정도로 약해 보이는 얼굴들은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스럽다가도 저주스러운가 하면 욕망의 대상이었다가 숭고한 표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얼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살아 있고 생명이 꿈틀대는 그런 얼굴을 만날 때마다 놀랍게도 새로운 기분을 매번 느낀다. 우리는 그 옛날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만났을 얼굴들을 단 하루동안 접할 수 있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그 무수한 얼굴들을 바라보고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그 누군가의 얼굴을 찾는 일이다. 그렇게 지켜보고 바라보고 관찰하다가 또한 그 누군가의 시선을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또 다른 얼굴을 찾는다. 나 역시 그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보여진다. 타인의 얼굴이 나를 쳐다본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에게서 내 유일성을 보장받고자 하듯이 나도 그에게서 그의 유일성을 인식할 수 있고자 한다. 그렇게 시선은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