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현재 이곳의 미술가들은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진단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술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미술시장은 확대되고 지구화로 인한 교류가 늘어나며 새로운 담론이 확대되는 등 미술의 장이 더욱 확장되는데 반해 구체적인 전망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 다소 기이한 사정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전시장, 작가와 화상, 큐레이터들의 어려움과 맞물려있다. 미술관들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에 봉착해있고 그런가하면 미술관 자체로는 미술관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내야 하며 어떤 전시를 기획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에 처해있다. 상업화랑들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 가는 미술시장의 위축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상업화랑들의 전시는 노골적인 판매위주의 전시거나 아니면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예 전시를 포기하고 잇는 사례가 많다. (대신 공공조형물만을 취급하려하거나 중개상정도로 전락하고 있다)나로서는 대부분의 전시장, 화랑들이 사실은 임대업으로 먹고 산다는 생각이다. 없는 작가들에게 임대료를 챙겨 살아가야 하는 것이 대부분 한국의 전시장들이다. 그런가하면 작가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작품발표의 기회, 전시장 선택, 작품판매 등에 따른 난감함을 겪고 있다. 큐레이터(큐레이터지망자)들 또한 전시를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전시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장소의 부재로 인해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자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미술계를 형성하고 이끌어 가는 주체들의 이러한 어려움과 지난함은 곧바로 한국미술의 위기 내지는 정체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은 미술 작업으로 최소한의 생존이 유지될 수 있는 기회, 상황을 만들기는 무척 어렵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가치실현의 문제가 가장 크다. 또한 나름의 의미 있는 미술 작업의 방향 또한 찾을 수 없다거나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움과 동시에 좋은 작업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일종의 문화적 가치 실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만큼 전시문화, 미술관문화의 부재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이래 이와 같은 어려움은 더욱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우선저으로 90년대 이후 학생들의 대학 진학 욕구의 한 방편으로 팽창되었던 미술대학의 성장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이제는 멀티미디어, 영상매체, 애니메이션, 만화 등등 이미지관련, 미술관련 학과가 더욱 늘어나는가 하면 미술대학 배출자가 또한 상당수 늘어나고 있다. 이렇듯 전반적인 미술 과잉 인력의 문제가 다각도로 미술인들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90년대 들어와 미술계의 다방면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특히 시장이 확대되는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개별 관객들이건 아니면 컬렉터들이나 화랑, 혹은 미술관이건 미술작업의 구매자 혹은 관객들의 취향이 아직도 극히 제한된 감성에 기대어 있거나 그 한계 내에서 마치 유행이 변하듯 급변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다양화된 작가군들 전반이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비엔날레나 대규모 기획전시들이 빈번하게 열리고 있긴 하지만 그런 참여와 언론의 주목과 관심이 미술시장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기이한 단절이 초래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미술협회나 미술평론계는 지극히 무관심하다. 특히 미술협회는 기껏해야 지도부의 밥그릇 챙기는 데만 급급해하는 현실이나 미술가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제반 요건(작업실, 전시장 정보, 지원체계, 세금문제 등)들에 대한 사회적 정책적 지원이 극히 빈약하며 관료적인 행정의 낙후성에 묶여있다는 점, 그나마 그 배분에 있어서도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음으로써 이러한 곤혹스러움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생존과 경제 문제보다도 자기 작업의 문화적 가치실현 문제에 오면 심하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작가들이 그 변화를 창의적으로 소화,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미술의 존재의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영욱)이다. 또는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없음에 좌절하거나 그러한 노력이 투여된 성과들이 미술의 장에서 올바르게 가치평가 되고 격려되는 상황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구조적 전환을 읽어 내고 대응할 수 있는 문화적 조망능력의 부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현재의 문제는 우리 미술문화의 총체적인 구조적 난맥상과 연관된 문제라는 시각이 보편적인 편이다.
2. 전시-전시장 선택의 문제
작가들은 저마다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려낸다.
관자들을 통해 비로소 소통되고 이해되기를 기다리는 창작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미술생산품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전시되고 우리는 그곳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그를 통해 정신적 대화나 위안, 예술에 대한 사유의 확장과 깨달음 같은 것들을 만난다. 작가들의 작품이 비로소 그 공간에서 되살아나고 새로운 차원에서 문화,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다. 동시에 작가로서의 인정과 이해도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란 우리의 정신적 삶의 가치를 제시해주는 문화행위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의 창작행위와 전시행위를 둘러싼 모든 제도적 장치 속에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작가들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느냐 하는 문제는 한 작가에게는 결정적인 사항이다. 그가 한 작가로서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서 그는 우선 그가 몸담고 살고 있고 활동해야 하는 미술계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현실상황에서 작가들이 전시를 열기란 매우 힘들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지나치게 쉬워서 힘들어 보인다. 우리의 경우 미술대학을 나오거나 혹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고 화단에 처음 선을 보이는 경우가 대개 개인전 형식을 빌어 나온다. 더러는 공모전을 통해 나오지만 그 공모전이 엄밀하게 작가들이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등용문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작가 지망생들은 거의가 자비로 화랑을 빌리고 전시 도록을 만드는 등 전시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들을 감당한다. 그 경우 전시란 철저하게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되어 이루어진다.(경제력이 전시의 횟수와 작품의 질까지 포장한다)그것은 작품의 성과와 질적 측면과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그런 능력이 없는 작가들의 경우 개인전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상업화랑이나 미술관들 대부분이 새로운 젊은 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이나 객관적인 잣대를 통해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능력 있고 좋은 작가들을 선별해서 키워주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상업적인 잣대나 이미 다 커버린 작가들 혹은 경력과 정치력에 의존되어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전시를 기획할 때 작가 개인의 학벌, 배경, 경제력 등등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거나 혹은 경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 화단에서 젊은 작가들이 제대로 인정받고 날카롭고 예리한 기획전시에 의해 선별되고 가늠되는 구조가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다. 전시장에 따른 작품의 성격과 질이 가늠되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러나 젊은 작가들은 그래도 올바른 미술문화의 기능에 부합하려는 몇몇 좋은 전시장소를 선별해 집중적으로, 전략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니까 개인전이나 기획전, 그룹전들을 소모적으로, 형식적으로 치루지 않으려는 매우 체계적이고 신중한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우리 환경에서 전시를 할만한 화랑이나 미술관, 특정한 공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가능하면 작품성을 보고 전시를 기획해주는 곳, 작가지원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장소를 알아보고 그곳의 조건과 요구사항들을 세심하게 준비한다. 자신의 전시가 가능하다면 좋은 공간에서 많은 미술인들이 와서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논의와 토론이 가능할 수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강구해야 한다.
또한 최근에는 기획안,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해 선별해서 전시기회를 부여하는 기회(문예진흥기금, 지방문화재단지원, 몇 군데 기업문화재단의 지원, 신세계미술관지원프로그램 등등)가 있으니 그런 곳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작가들은 작업에 몰두하는 것만큼이나 전시장소를 보다 좋은 조건에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살펴보고 이용해야 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그러한 장소를 찾아 나서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 전시를 끊임없이 학습하듯이 다니는 것, 미술계의 흐름과 각 전시장소의 성격과 큐레이터의 안목과 비평적 시각 등에 대해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3. 작가-전업작가의 예
미술계란 동네 역시 미술을 매개로 해서 먹고사는 삶의 관계망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다. 미술계란 것이 형성된 것은 서구의 경우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부터 개인화실과 화상, 화랑 전시회, 자유시장 등이 실질적으로 미술생산과 화가들의 구조가 되었다. 아카데미의 구속과 특정한 후원과 명성으로 둘러쳐진 군주제의 모든 제도로부터 이탈된 이후 작가라는 존재는 가혹한 시장에 던져지고 내몰리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19세기말에 이르러 현대의 화상-비평가 체제는 아카데미와 살롱을 대체하고 강력한 권력을 형성해 나갔다. 이 새로운 체계는 무엇보다도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 기업의 하나로서, 개인의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여러 수용제도들-화랑이나 비평, 출판, 개인컬렉션, 미술관, 대중매체들 중의 하나이다. 작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구조와 체제 속에서 인정받고 그 틀에 순응해야만 한다. 미술계란 구조 역시 적나라한 먹이사슬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러나 그것이 여타의 사슬들과 다른 것은 그것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오늘날 한국미술계의 권력구조의 핵심세력은 무엇보다도 미술관 및 재벌미술관의 관장이나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대학교수작가, 중요상업화랑의 화상 및 언론과 저널의 미술담당기자, 극소수의 컬렉터들이다. 이들이 한국의 미술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미술계에서 선호하는 작가들은 무엇보다도 특정 대학 출신에 화려한 수상경력이 있고 현재 교수직에 있으며 더 나아가 집안 환경과 배경이 막강한 작가들이다.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작가야말로 화상들이 눈독을 들이는 작가들이고 일반 콜렉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들이다. 학력과 인맥에 고상한 지위 그리고 달콤 쌉싸름한, 적당히 걸기 좋은 그림이면 말할 나위 없다. 그 그림들이란 결국 대중들이 선호하는 미의식의 범주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현대미술’개념을 고급하게 두르고 있어야하며 좀더 고상하고 고매한 인격이나 초월적인 정신세계 같은 것까지 아울러주면 더 좋다. 촌스럽거나 구닥다리 내음은 지워야하니까 좀더 세련된 감성을 덮어씌운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들은 제도권의 여러 미술관련 이익단체들에 관계하면서 전체 문화계의 중요 역할을 맡게 된다. 교수직과 미술관련단체의 요직은 미술계 권력의 중추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직인데 이들은 이런 직에 두루두루 걸쳐있으면서 일종의 신분귀족 그룹을 형성한다. 미술관이나 재벌미술관, 고급화랑의 전시오프닝행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술계 인사들을 보라. 미협회장이나 미술관장직도 대개 그런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형편이지 않은가? 또한 이들이 돈이 되는 미술관련사업들을 거의 도맡고 있다. 환경조형물 내지는 건물에 들어가는 그림들 역시 대부분 이들의 그림들이다. 미술잡지나 언론의 주목을 받거나 커다란 지면을 할애 받는 작가들 역시 이들이다. 이들의 전시 오프닝 날은 입구에서 전시장안까지 흡사 화원을 옮겨다놓은 듯한 착각을 준다. 죽죽 늘어선 화환과 난, 꽃바구니에 걸린 휘장에 박힌 신분과 권력의 명함들이 줄줄이 내걸려있으며 그것들이 그 작가의 권력의 정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결국 오늘날 한국미술계에서 미술의 문제는 이런 명망성, 권력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미술 역시 정치와 권력, 파워게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미술계 역시 피해나갈 수 없는 덫이다. 문제는 모든 자본주의사회에 걸쳐진 보편적인 문제라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한국적 특수성이 우리 화단에 좀더 고질적이고 심각하게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미술계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미술의 질에 대한 논의와 평가, 그에 따른 위계와 질서, 인정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미술과 미술문화는 사실상 부재에 가깝다. 이런 틀과 제도를 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의 해체, 허물기 그리고 객관적인 비평과 대중들의 미술관에 대한 수정과 교정 같은 것일 것이다. 최근 한국전업작가협회가 만들어지고 이들 나름대로 기존의 우리미술계의 이 완강한 구조를 타파하고 현재 진행중인 여러 파행과 그로 인한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런 전체적인 구조와 체제를 문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다분히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소수가 독점하는 미술계의 권력과 그에 따른 경제적 이해관계에 들어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다만 얼마간이라도 챙기고자 하는 선이라면 그것은 기존의 제도와 먹이사슬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사실 전업작가란 그림 그리는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고 그것은 그만큼의 세속적 이해관계나 삶의 그물망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애초에 용인한 셈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선택한 삶이다. 화가란 존재, 예술가란 존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소외와 궁핍, 탈권력적인 자세가 자기 삶의 근간이 되는 수밖에 없다.
4. 큐레이터-독립큐레이터의 예
90년대 들어와 서구미술계의 특이한 현상의 하나가 바로 미술관에 적을 두지 않은 독립큐레이터들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미술관이나 정부기관과의 관계를 통해 활동한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관의 무겁고 거대한 구조가 유동적이고 빠르게 변신하는데 따라, 그리고 시공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90년대 현대미술형태에 맞춰 그에 적합한 형태로 큐레이터 역시 변하고 있다.
이들 독립큐레이터들과 90년대 작가들은 이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전복시키지는 않는다. 기존의 거대한 체제를 수용함과 동시에 그것의 부조리에 조용히 역행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어쩌면 이 새로운 큐레이터들은 시스템 안에 들어가 바이러스로 맞서 싸우는 형국이다. 반면 기관에 붙어 섭생하면 그 기관의 의지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유형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기말, 문화다원주의의 와중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제도로써의 모더니즘패러다임에 대한 여러 대안적 움직임의 활발한 진행이다. 그리고 이는 체제 변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체제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그 체제의 틀 안에서 은밀한 모반과 역행을 꿈꾸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모더니즘 미학으로 완강히 무장한 학교, 화랑, 미술관, 언론매체 등을 아우르는 제도권적인 미술제도로부터의 퇴행이나 그것에 대한 조용한 역행이 감행되고 있는 것이 동시대 미술의 흐름이다.
새로운 작가들은 가능한 미술관의 내부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고급미술의 폐쇄성을 부인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미술관 외부에서의 적극적인 활동을 감행하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 현대미술, 세계미술의 흐름은 비평적 의미나 관점의 제시를 넘어 문화적 이슈들을 실험하고 다양한 담론을 생산해 내는 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 시각에 의한 이데올로기성 전시가 퇴화하고 전시의 구성요소는 더욱 가변적이 되어가며 작가 개인의 역할 또한 다기능적이고 조직적인 실천을 수행하면서 전시의 구체적 목적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큐레이터의 역할과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작가들이 그 역할을 대체해가고 있다. 작가 겸 전시 기획자들의 등장은 그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 스스로가 미술계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념 생산이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그룹을 대체하는 역할을 스스로 맡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현존하는 문화 및 미술 논쟁의 기조에서 새로운 비평을 어떻게 개발하는 가이다. 그리고 이는 큐레이터들의 전시를 통해 새로운 예술경향을 접하며 그들의 이론에 따른 전시성격과 참여작가들 그리고 예술형태들을 떠올리면서 근접한다. 즉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고 그것이 미술사적 자리 매김을 하는데 있어 미술관큐레이터와 독립큐레이터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성을 띄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큐레이터는 정보 수집자로, 신미술을 정돈해서 제시함으로써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기사적. 객관적인 틀을 제공한다.”(카네스톤 멕샤인)
따라서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전시기획자들이 과연 어떠한 전시방법들을 창안했으며 그 방법들이 작가들의 미술사적 자리매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충분히 분석할 필요가 그만큼 커졌다.
큐레이터들은 작품(전시)을 소비자(대중)에게 접목시키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동시대미술에서 큐레이터들은 정리된 화면을 연출하는 창의적 힘을 지녀야 하는데 이는 일종의 작가의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 혹은 작가출신의 이론가들이 큐레이터로서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그들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고, 새 과정을 개발하고, 다른 맥락에서 작가와의 관계를 형성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작가와 함께 새로운 비평의 장을 창조해나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전시 자체를 ‘배움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미술관과 개별 전시회간의 상호협동과 경제적 가치의 교환, 서로 다른 모델들간의 충돌과 피드백 효과를 통한 연결고리의 형성이 그만큼 중요시해졌다. 따라서 앞으로의 큐레이팅은 미술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와 장르뿐 아니라 간학문적이어야 하며 하나의 삶의 프로세스이며 지식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현대미술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인 미술사, 미술관, 미술미디어의 세 가지 축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시다. 그만큼 전시를 빼고 현대미술을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미술관 큐레이터는 사실상 전시큐레이터를 지칭할 정도로 전후현대미술에서 전시는 중요해졌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이제 비로소 그것에 주목하는 단계이다. 그런가하면 미술관과 미술사, 전시의 유형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달라진 추이를 함께 반영해나가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끌어안고 있다. 근대의 소산인 미술관 문화, 전시, 큐레이터에 대한 개념 정리와 이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동시에 미술과 미술관에 대한 개념규정이 크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 속에서 이를 재정의 할 필요성 역시 커졌다는 얘기다. 따라서 미술사적 의미를 고정시키는 전시는 신화구조 속에 작가와 작품을 박제화 시킨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며 동시에 오늘날 유행하는 키치와 대중문화에 몰두하는, 다분히 선정적인 센세이셔널한 이미지 전시는 보는 눈을 상당히 천박하게 만들 수 있고 또한 비평적 의미와 문화적 이슈들을 제시하는 일련의 전시들은 흥미 있는 반면 특정한 개념과 이론을 지나치게 설명, 주장하는 독단으로 흐를 위험을 보여준다. 심상용, 비엔날레에 있어서 정신적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월간미술(2002.5)p.79
전시는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들의 표현의 장이다.
미술현장의 피부, 표면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를 구성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마다 작가들의 작업방식과 형태가 다르다면 당연히 이에 적절한 전시방법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것이 전시기획자가 안고 있는 과제일 것이다. 동시에 전시의 진정한 힘이나 배후의 프로세스 또한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이런 지점이 지나치게 취약하다보니깐 전시와 전시기획자만 논의되고 뜨는 상황을 초래하고 모두가 다 전시기획자로만 활동하고 싶어하는 일종의 거품을 만들고 있다.
현재 독립큐레이터(독립기획자, Freelancer Art Director)의 두드러진 활동은 현대미술계 기획인력들이 그만큼 수적으로 증가했음을 증명한다. 미술관이나 화랑이라는 특정 공간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프로젝트로 사업을 추진하는 이들은 전형적인 미술문화 공간의 틀을 벗어나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대안적 미술 문화 기획자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주로 메이저급 미술문화공간에서 노하우를 축적한 큐레이터 출신, 이론가 혹은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기획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이들과 작가활동을 겸하면서 현재의 미술제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독립큐레이터들의 간헐적인 전시기획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학 강의 및 비평활동, 또는 프로젝트 수행 등을 통해 수입을 얻는 이들의 전시기획활동은 무엇보다도 생존전략이자 존재방식의 탐구이기도 하다. 이들의 역할은 공공성을 담보하는 미술문화 기획자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네 미술계의 열악한 상황과 안정적인 물적 토대의 부재에 따라 이들의 지속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인 것도 사실이다.
국내에서는 이른바 프리랜서나 독립큐레이터들이 설자리가 별로 없다. 프리랜서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 기관의 관료주의 기관큐레이터들과 기관장의 배타주의 이기주의가 문제다. 또한 대안공간이 몇 있지만 이 또한 기관과 비슷하게 관료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큐레이터 지망생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는 실정이다. 문자 그대로 공공 대안공간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미술계 공동의 노력이 요구된다. 새로운 미술체계의 대안으로서의 독립큐레이터의 합리적이고도 능동적인 위상과 신분의 확립이 요구되며 비영리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다른 차원에서 작가를 보호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이루어낼 수 있는 집단적 시각을 창출하는 새로운 가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들을 제도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틀이 요구된다.
유럽의 경우는 다양한 발상과 개방된 체계하에서 독립큐레이터들을 양산하고 있으며 이들이 용역기회를 경험해나가면서 종국에 미술관이나 인스티튜트 등의 제도권으로 편입되고 있는 실정인 반면에 미국의 경우는 미술사와 미학 학위 소지자들이 리서치큐레이터, 큐레이터 어시스턴트 과정을 단계별로 거치면서 미술관 큐레이터로 자리잡아나가고 있다.
한국의 경우 미국형 큐레이터쉽과 미술관 문화를 모델로 출발한 상황에서 국제미술계의 변화를 주시하면서도 큐레이터쉽 자체에 대한 원형적 개념이 설정되지 않아 혼란을 겪고 있다. 더구나 최근 학예사 자격증 제도가 시행되어 큐레이터의 자격문제가 혼란을 더욱 가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각 대학마다 큐레이터 관련학과가 신설되고 지망생들이 급증하고 있으나 학교 당국과 정부는 자격증을 받은 인력들이 근무할 수 있는 미술관, 화랑 등의 인프라 구축문제에 있어서는 속수무책이며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경우 전공과 전문성이 구별이 안되며 미술대 대학원만 나오면 큐레이터의 필요조건이 되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만큼 전문성이 부족하고 프로의식이 부재하단 얘기다.
결국 큐레이터쉽이란 특정한 규범, 원리나 자격에 의해 실현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현재 한국에서 독립큐레이터들이 증가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미술관다운 미술관이 부재하고 동시에 전문큐레이터들이 없으며 있다해도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미술관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다는 인식, 그러니까 볼 만한 전시, 동시대의 흐름을 적절하게 포착하는 그런 전시와 비평과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아울러 그런 능력을 갖춘 전문큐레이터제 도입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현재 우리의 미술관과 화랑 오너들의 전시기획자, 큐레이터에 대한 인식이 저급하고 무지함에 대한 불만들이 독립기획자로 독립하게 한다. 따라서 기존에 미술관이나 화랑에 소속되었던 큐레이터나 비평적 시각과 기획능력을 갖춘 작가들 스스로를 독립기획자로 나서게 하는 것이다. 둘째, 기존 미술관들과 화랑이 기능을 축소하거나 폐쇄하고 있고 그만큼 작가들의 작품발표의 장과 작가로서의 살아나갈 조건들이 열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자구책이 스스로들 전시기회를 만들고 이슈를 생산하게 한다. 셋째, 이벤트성 전시가 급증하고 작업과 작가보다는 전시가 보다 중요시해지면서 전시기획자에 대한 욕망들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미술대학에 관련학과가 개설되고 외국에서 미술경영과 행정을 공부하고 온 인력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전시 기획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있다. 이들을 수용할 시설과 기관이 부재함에 따라 독립기획자로 부유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넷째, 이미지와 미술문화에 대한 수요욕망이 크고 그만큼 전시문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불만들이 스스로 판을 만들게 하는 경우이다. 다섯째, 기존 큐레이터, 미술사나 미학자들, 평론가들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불만에 따른 것이다. 현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글들, 상아탑에 갇힌 미술사적 지식들, 작업을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하다는 시각(비평가들의 안목은 작가들 눈의 정확성을 넘지 못한 채 불안하며 미술사가들은 전시의 현재형을 과거 속에 연결시키는 습성에서 젖어있다)이 작가들 스스로 판을 만들게 한다. 전문성에 대한 강한 불신이 초래한 결과들이다. 박영택, 독립큐레이터, 현대미술의 또 다른 문화생산자(월간미술, 2002. 5)pp.166
작가 겸 전시 기획자들의 급증은 바로 그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현대미술이 개념적으로 흐르다보니깐 전시형태와 방식이 자연스레 기존의 오브제성에서 탈피해나가기에 작품보다는 이론과 담론, 전시 형태가 필요해지면서 자연스레 전시기획과 글이 작품을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동시대 작가들은 작품이 조형적으로 완성된 오브제라는 지난 개념에서 탈피하여 현실 속의 다양한 분야들을 예술과 연결하고 작업을 하나의 상황으로 제시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의 특성인 프로젝트작업, 비정착적 개념, 공간의 다양성, 관객의 참여, 공동작업 등의 다양한 예술형태의 작업이 부각되면서 자연스레 전시기획이 중요해진 것이다. 즉, 과학. 도시계획. 경제. 사회. 정치 등의 현실 속에서 그들이 체험한 주관성을 예술로 끌어들여 그것을 시각화한다. 니콜라 브리요가 말한 ‘관계성의미학’말이다. 현실과 예술을 연결시키면서 작가와 관객이 함께 만드는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와 기획자의 입김이 세졌고 권력화 되어가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 지점에서 작품을 둘러싼 심각한 에러가 발생한다. 즉 작품보다는 이론과 전시 이슈 등이 앞서면서 작품의 진정성 내지는 완결성과 질적 수준, 그리고 개별 작가의 의미가 가려진다는 아쉬움이다. 작품은 단지 전시기획자의 개념을 보조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전시기획자의 의도에 맞춘 혹은 전시기획자가 작품의 생산에 지나치게 간섭하면서 함께 만들어낸다는 식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측면을 노정하고 있다. 어쨌든 이런 상황 속에서 독립기획자들이 부상하고 있는데 이들의 다채로운 활동들이 활기 없고 맥빠진 우리미술계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생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예술경영학회발표원고, 2003)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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