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동양화 전공자들이 ‘동양화’라는 것을 그린다. 그런데 대부분 작가들에게 동양화란 것이 특정한 소재와 형식, 의미와 사유의 담론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따라서 그 그림은 동양화라고 이미 일정하게 전제되어 있는 것들을 습관적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 ‘동양화’작업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양화가’라는 알리바이를 차용하는 선에서만 정당성을 갖는 기이한 상황을 노정한다.
한결같이 자연풍경을 ‘사생’하면서 이를 전통적인 산수화의 연장선 안에서 이해한다거나 혹은 꽃이나 새를 꼼꼼하게 더러는 도안풍으로 그려내는 것이 전통과 연루된 그림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그 그림들은 거의 한결같이 일종의 장식화, 일러스트레이션에 머문다. 인물화 역시 마찬가지다. 지필묵이란 재료 자체를 신비화하거나 과도한 정신성과 철학을 선험적으로 머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과거 지필묵은 사실 환영을 다루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나, 오늘날 맹목적으로 환영을 만들어내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로 전락했다. 지필묵은 사물이나 세계의 환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세계로 진입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유효한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최상의 유효성을 지니지 못할 때는 일시적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니까 지필묵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표현매체로 인식되고 전문적인 표현영역으로 구분되는 현대 동아시아의 상황에서 지필묵은 더 이상 지켜내야 할 고유한 영역은 아니라는 얘기다. ‘먹에 생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유근택)라는 것이다.
시간. 공간. 물질과 우리의 몸. 마음이 결합하는 선과 지대들을 발견해 가는 노력들은 어떤 한정된 매체를 훨씬 넘어선지 이미 오래다. 세계를 드로잉하는 과정에서 지필묵은 수단이고 방법이다. 지필묵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되던 시대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을 필요한 만큼 사용하면 될 것이다. “지필묵을 지켜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논의할 것이 아니라, 미술이 여전히 살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더 긴요”(이영철)한 것이다.
현재 대부분이 동양화 작업들은 특정 소재를 그려내고 장식화 하는데 치중하면서 그것을 포장하는 의미들은 한결같이 자연과 생명, 동양적인 사유의 한 자락을 덮어씌운다는 생각이다. 동시대 동양화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듯 동양화란 것을 한정된 소재나 굳은 관념, 상투화되어 닳을 대로 닳아진 의미를 마구잡이로 차용하고 있는데서 빚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뜬소문 같은 철학적 수사로부터 한동안 물러나, 내 육신의 생생한 관능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자”(김학량)는 제안은 그래서 나온 듯 하다.
“제가 한국 화가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바는, 시대적 리얼리티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산수화’라는 장르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피건 내장이건 무엇이든 다 그릴 수 있는 시대에는 산수화를 그릴 수 있는 정당성이 오히려 새롭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장르 자체가 아니라, 장르를 해석하고 구사하는 작가의 상상력입니다. ..문제는 산수화라고 하는 특정 장르나 스타일을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라, 산수화의 현실 속에서 유통되고 있는 기존의 의미론적 영역을 어떻게 파격적이고 비현실적으로 확장 갱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산수화에 대한 좀더 새로운 상상력을 부여한다면, 산수화의 비현실을 빌어 이 시대의 현실을 탐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김원방)
<최근 동양화를 전공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기존의 습관화된 그림들과는 다른 몇몇 그림들을 본다. 대표적으로 유근택이 거론되는 편이고 (그는 화선지라는 공간과 일상적 삶의 공간, 풍경을 일치시킨다.여기서 화선지는 장소를 뜻하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후배 세대들 중 많은 이들이 또한 유근택과 유사한 작업들도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박병춘, 김범석, 정재호 등의 모필 드로잉으로 포착한 풍경 등). 그런가하면 동시대 서양화 혹은 설치나 매체를 다루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이용해 동양화의 새로운 작업처럼 포장하는 경우도 만난다. 동양화작가들이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아서 새로운 의미로 이야기 될 수는 있지만 이미 다른 장르 쪽 작가들이 한 것을 끌어들여서 동양화의 참신한 작업인냥 이야기되는 것도 의아하다.

인천 풍경을 담담하게 스케치하듯이 그려나가거나 먹과 담채를 이용해 인천이란 도시의 분위기, 느낌을 포착해내는 정재호의 경우도 신선한 그림이지만 최진욱, 고진한, 공성훈이나 김형관, 유용문, 이광호(회화술멤버)등 현재 서양화분야에서 재현과 시선, 프레임 등을 스터디하는 작가들의 작업들과 유사한 공유성을 보여주는 편인데 이를 통해 회화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공유성이란 것이 동양화에서는 어떻게 풀려나가면서 변별성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나로서는 서정국, 이강소, 이근범 같은 다른 영역의 작가들의 작업에서 동양화적인 요소를 물씬 접하는 편이다.
최근 젊은 개인전을 치룬 동양화 작가들 중에는 박윤영, 김은진, 김미겸, 김원경 등의 작업을 흥미롭게 보았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관습화된 동양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그 밖에서 ‘동양화적인 것’들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생각이다.

박윤영은 동앙화를 그리려 하기보다는 ‘동양화적인 것’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관습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이미 일상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는 미술적인 것을 들춰본다는 의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캐나다에 자주 머물면서 그녀는 자신이 전공인 동양화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리를 확보한 것 같다. 그 거리가 지금 이곳에서의 동양화 작업과는 무척 다른 감각을 가능케 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예술을 막연히 동경하는 동시에 그 기법 등에서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인식에 착안한 ‘Calligraphy Project는 작가 거주 프로그램인 Art Omi에서 참여한 50여명의 외국인들에게 특정한 한자 채본(서예)을 직접 모방해보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저마다 제각기 써놓은 그 문자(기호)는 흥미롭다. 먹이 번지고 스며드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다 쓰고 난 후 매우 뿌듯해 했다고 하는데 서양인들이 바라보는 한자는 문신에 쓰이는 기이하고 신비스런 기호이며 서예는 가장 구체적인 동양예술의 코드에 다름아니다. ‘픽토그램산수’는 지팡이를 잡고 있는 눈먼 여자가 물소리를 듣는 장면의 인물산수화가 기성품으로 파는 족자 안에 그려 넣어졌다. 할머니와 연관된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제발,題跋)를 픽토그램으로 그려, 써놓았는데 이는 누구나 쉽게(특히 외국인)그림의 내용을 읽게, 상상하게 하고자 한 배려다. 자신이 돌아가신 할머니의 입장에서 눈을 지우고 지팡이를 들고 물소리를 듣는 이 장면은 개인의 심리적 상처이자 기억의 상흔이기도 하다. 동시에 산수화의 전형을 차용, 남자의 육신을 대신해 여자의 몸이 개입되는 장면은 여성으로서의 산수화 독해란 점에서 흥미롭다.
또 다른 픽토그램은 이전에 선보였던 것의 연장인데 오마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동안의 개인적인 일과를 마치 그림일기를 쓰듯이 그려본 것이다. 특히 먹으로 그린 후 그 윤곽을 번지게 함으로써 은연중 빛의 효과를 부여하기도 하고 아울러 명확한 경계보다는 또 다른 영역의 중간지대를 보여준다. 작가는 그것이 더욱 아름답다고 느낀다. 까르티에 제품 이미지(기름종이에 인쇄된 이미지)에 개자원 화보에 나오는 인물들을 슬쩍 끼워 넣어 그려 넣은 그림들은 동양의 미인도와 명품을 연결 지운 작업이다. 작가는 미인들이 그러한 명품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려 넣었다고 한다. 까르티에란 기호는 동시대에 욕망과 자본과 취향, 감각의 기호이자 현실적인 생성의 힘이다. 그런가하면 천연수 에비앙과 볼빅의 팻병에 붙은 로고 디자인 이미지로서의 이상향(유토피아)산수를 차용하였다. 작가는 늘 에비앙을 즐겨 마시는데 어느 날 그 ‘아름다운’로고(산과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동양의 이상향(산수)을 닮은 그 로고 역시 좋은 물, 이상적인 물을 상징하는 것인데 맥주, 와인, 생수 등 물과 관련된 제품의 로고에는 예외없이 산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거기에 이미 ‘산수’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또 어느 날은 편의점에서 휴지를 사는데 우연히 크리넥스 티슈 통 중 수묵으로 물고기를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휴지를 뽑으려고 힘을 주면 반쯤 올라온 휴지가 삼각형의 형태로 멈춘 체 마치 산의 모양을 하고 있고 통의 표면에 그려진 물과 물고기와 어울려 그것 역시 ‘산수’를 연상시켜준다. 이렇듯 박윤영의 동양화독해는 무척 개인적이며 또한 자유롭고 익살맞고 흥미롭다. 그녀는 다양한 기호와 로고를 뒤바꾸어놓으면서 그 과정에 자신의 발랄한 개별성의 감성을 섞어놓는가 하면 ‘동양화적인 것’들의 자취를 찾아 여기에 신선한 피를 수혈해주고 있다.
< 김미겸은 닥나무에서 나온 장지를 이용해 일종의 콜라주 작업을 보여준다. 장지를 이용해 전통 목가구를 만들어내는,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지를 여러 목재에서 나온 염료로 색칠하여 나무로 만든 가구이 조형을 응용하여 화면에 재구성하는 과정인데 이는 전통적인 목가구의 미감이 고스란히 우러나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니까 우리 선조들은 방안에 들여놓는 목가구의 표면에 동백, 호두 기름 등으로 광을 내고 오래도록 사용해 깊게 스민 손맛과 시간의 켜들이 따스하게 엉켜있어 매력적인 표면의 맛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그 목가구의 높이와 폭의 비례는 독특하면서도 간결하고 대소의 각 면들은 서로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좁고 가는 골재로 경계를 이루어 흥미로운 면 분할을 이룬다. 이러한 것들을 작가는 자신의 화면에 자연스레 되살린다. 이 작가는 옛 물건, 목가구이 미감과 색상을 전통적인 동양화재료를 구사해 아름답고 편안한 미감으로 환생시키고자 한다.

김은진은 창백한 표정을 지닌 서양식 고관절 여자인형과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거나 광배를 두르고 보살의 몸에 걸쳐진 영락 같은 붉은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인삼(人蔘)이 그려져 있다. 세로로 길게 드리워진 종이 위에 고관절 인형과 인삼이 텅 빈 배경을 뒤로하고 커다랗게, 거의 등신대 크기로 그려졌다. 단색으로 단호하게 칠해진 배경은 인형과 인삼의 육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삼과 인형은 의사인간, 유사인간형이 되어 두루마리 형식의 프레임 안에 꽉 차게 들어 앉아있다. 보는 이의 시선은 전적으로 그 대상과 마주한다. 그것 이외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빼앗길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 인삼은 또한 차도르나 장옷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고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포즈, 두 개의 인삼이 남녀가 엉켜있듯이 서로 얽혀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람의 몸과 살을 닮은 인삼의 육체에는 민화에서 흔히 보는 목단 꽃 그림이나 복(福), 수(壽)자, 구름문양 등이 잔뜩 치장되어 있다. 간혹 어떤 것들은 머리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거나 응고된 체 매달려있다. 나로서는 그런 형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피에타를 그린 전형적인 도상과 몸을 연상시켜준다. 서구의 종교화의 전통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가 놓여져 있다. 이른바 성혈(聖血)이 그것일 것이다. 그리스도 스스로 자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 작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 피와 살의 냄새를 모든 일상에서 몸으로 맡고 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종교적이고 비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이 유난히 강하다는 인상이다.
인간이 몸을 흉내낸 인형에 목숨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거나 인삼의 형체에서 사람의 몸 혹은 아프고 병든 몸, 죽어 가는 몸을 떠올리고 이를 차분하게 관조한다. 그리고는 그 육체에 복 복(福)자와 목숨 수(壽)자를 부적처럼 써주었다. 오래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목단 꽃도 풍성하게 문신 마냥 둘러주었다. 아프고 신음하는 육신을 눕히고 베개를 베어준 후 그 피를 하얀 시트가 다 받아내고 있는 풍경도 보인다. 그 모든 것들을 치유하고 보듬고 보살피고자 한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은 홀연히 겹쳐진다. 그런 작가의 마음과 시선에서 태어난 그림이다. 무엇보다도 민화와 채색을 이용해 주술성과 영성이 깃든 초현실적인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김원경은 이른바 ‘핑크산수’를 그려냈다. 형광의 분홍빛이 흠뻑 적셔진 화면 안에는 전통적인 산수화(동기창이나 형호, 석도 등의 그림)의 한 부분이 차용되어 그려져있다. 분명 고전적인 산수화이다. 그러나 그 발광하는, 현란한 분홍빛 색조는 먹색의 산수화와는 무척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작가는 ‘고전’을 지금 이 시대의 분위기, 뉘앙스로 새삼 번안하고 싶다는 욕망을 노정한다. 이 분홍빛 산수, 핑크 산수는 매우 가볍고 생경하고 날것이자 키치적이며 욕망을 달뜨게 하는 색상이다. 그 색상이 고전적인 세계를 덮어버렸다. 그러나 그 분홍빛으로 차마 덮지 못하고, 메꿔버리지못한 고전적인 세계는 여전히 의미를 지닌 체 남아있어 보인다. 두드러지게 강조된 집과 배의 형상이 그렇다. 가볍고 비명료한 분홍산수를 통해 새삼 고전의 세계, 동양의 산수화에 대한 이해를 자세히 살펴보게 하는 기묘한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