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정체성 되묻는 전시들/“영상 시대의 시각적 비판과 대안”


회화란 일정한 평면에 눈속임(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장치를 말한다. 땅바닥에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을 둘러친 데서 회화의 기원을 찾는 그리스인들이나, 가볍게 찍힌 새의 발자국, 그 음각화한 ‘상처’를 보고 상형문자와 그림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동양이나, 회화·이미지는 실재를 연상시키는 부재, 추억과 상기를 진정시켜 주는 가상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환영에 불과하지만 그 환영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실재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세계와 내가 관계 맺는 매개로서 이미지는 기능한다.

서양의 경우 회화는 그 자체로 세계가 되고자 열망했다. 원근법과 유화 물감, 캔버스 등의 발명을 통해 이룩된 사실주의와, 나아가 사진과 영화의 발명은 동일한 궤적에 놓여 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제 회화와 조각의 임무는 사진에게 넘겨주면서 회화의 종말론이 무성하게 번져나갔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화가 죽은 것은 아니다. 다시 추상으로, 개념주의와 설치 등으로 회화는 해체되고 확장되어 갔다.

아주 오래 전에 들린, 오래도록 들었던 ‘회화는 죽었다’는 말이 멀티 미디어 환경으로 전면 개편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도 유행하더니 지금도 간혹 들린다. 한편으로 미술의 위기에 대한 논의도 짝을 이루어 무성했다.

1990년대 들어 우리 미술계에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중 문화 등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하고 이에 걸맞는 첨단 매체들이 조명되기 시작할 때, 성급한 사람들은 회화가 고급한 예술이며 보수적인 매체라는 이유로 회화는 죽었다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다들 영상 작업과 설치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새삼 미술의 위기를 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달라져야 할 미술의 개념에 대한 논의 촉발이 더욱 요구되었어야 했다. 우리의 경우 지나치게 서양 미술에 의존하면서 그곳에서 논의되는 것들을 순식간에 우리의 문제인 양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이고 그에 처져서는 안된다고 악을 써대는 모습이 조금은 희화적이고 더러 슬프고 그렇다. 그런 상황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실 세상은 변하고 확실히 회화가 이전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20세기 현대 미술에 와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결코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 회화라는 것을 그만큼 고민해 보고 ‘죽었다’고 말해질 만큼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회화의 위상과 문화 환경이 변하고 세상도 변했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제대로 파헤쳐져 본 적이 없는 회화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장이다. 좀 거칠게 말해본다면 우리에게 회화는 기껏 서양 재현 회화의 외피만 흉내낸 어정쩡한 구상 회화 내지 서양 형식주의 미술의 ‘짝퉁’에 불과한 추상 미술 등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회화 복원을 예고하거나 예감하려는 듯한 몇몇 전시들과 회화 관련 특집들이 미술 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회화에 관한 젊은 작가들의 흥미로운 작업들 역시 자주 눈에 띈다는 생각이다. 현재 진행되는 그 회화들의 특성은 오늘날 급변하는 문화 환경 속에서 회화의 향방과 화가의 위상을 질문하는 기류를 은연중 반영한다.







회화의 위상에 대한 반성 담은 전시 늘어

따라서 그것은 그림에 대한 그림, 일종의 ‘메타-그림’이라는 성격을 띠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개념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며 감정을 자극하는 회화의 오랜 전통 또한 밑자락에 깔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설치 미술이나 컴퓨터 아트로 전환하지 않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 작품을 고수하는 것은 회화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만 아니라면 회화의 역할과 위상을 새삼 질문해 보고 그 의미를 추려낸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회화는 영상 매체의 확산 과정에서 점진하는 탈신체화 경향에 대해 효과적인 시각적 비판과 대안을 구성하는 데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 여전히 인간 육체와 환경 간의 생태적 관련 속에서 회화야말로 인류가 지속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무한한 문화적 행위이자 인간적 삶의 실천을 매개하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나온다. 그런 인식이 최근 회화를 새롭게 부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그리기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타진하는 회화들이 ‘스터디로서의 회화’로 이해된다. 그것은 회화의 힘과 그리기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와 함께 한다.


- 시사저널 2004,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