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놀이 생활 속의 미술
Korea Contemporary Art Exhibition-Art and PlayingⅡ

2004. 7.23 - 8.22 예술의 전당 미술관


이번 전시는 작년에 열렸던 「미술과 놀이」전에 연이어서, 같은 주제로 열리는 두 번째 전시다. 놀이란 그 자체 내부적으로 지켜져야 할 규범이라는 약속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때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더 잘 즐기기 위한 자발적인 장치인 것이며, 그 자체 개인을 억압하는 계기일 수는 없다. 나아가 놀이가 존재하는 의미는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는 규범을 깨는 데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사회에 그어진 온갖 금들, 금기와 터부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유형무형의 계기들을 거스르고 비트는 것에서 비롯된 쾌快에 놀이는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미술과 놀이가 만나는 접점도 여기에 있다. 미술은 미술을 더 잘 놀기 위해 미술 내부에 그어진 금, 문법, 규범을 기꺼이 넘어선다. 비록 그 놀이가 새로운 금과 문법 그리고 규범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그 놀이가 미술을 해체시킬 지경에 이르기도 하지만 미술은 결코 놀이를 멈추지 않는다. 미술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곧 미술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르게는 미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미술이라는 말과도 같다. 놀이로써 미술과 삶이 만나는 것이다. 놀이는 삶에서 자기목적성을 벗어난 부분, 잉여와 여분에 해당하는 성분, 무의식적 욕망, 진정 삶에 의미를 주는 것들에 접맥되어 있다. 그리고 삶의 이러한 부분이 미술과도 통한다.


총 24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회화, 조각, 설치, 영상미술 등에서 1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유희와 놀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놀이는 미술 내적인 곳에서 놀이에 몰입하게 하고, 때로는 삶과 밀착된 상태로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관객들을 그 놀이마당에 자발적으로 동참시킴으로써 난해한 미술, 낯선 미술이 아닌 쉬운 미술, 친근한 미술을 체험할 수 있게끔 했다. 그 가장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아마도 관객이 창작행위에 직접 참여하는 상호작용미술(인터액티브 아트)이 될 것이다(안광준, 양승수, 노미리).
예컨대 터치스크린과 실버스크린, 컴퓨터와 프로젝터로 구성된 안광준의 작업에서 관객이 컴퓨터 모니터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 이미지가 프로젝터에 의해 벽면 스크린에 투사된다. 일종의 인터액티브 디지털 페인팅인 셈이다. 그리고 양승수는 전시장에 놓인 개밥그릇에 담긴 사탕을 관객이 집으면 영상 속의 개가 관객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반응하게 했다. 관객의 참여에 의해서 실재의 사탕과 영상 속의 개가, 감각적인 현실과 허구적인 이미지가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노미리의 실사와 일러스트가 합성된 플래시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관객은 직접 마우스를 조작하여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고, 기존 동화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주어진 완결된 형태의 텍스트가 아닌, 열려진 구조의 쌍방향 텍스트인 셈이다.
그리고 미술에서 놀이는 전통적으로 미술 재료로 여겨졌던 소재가 아니라 여러 일상 속의 사물들이 미술의 문맥 속으로 들어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른바 오브제 미술이 그것이다(박병춘, 최소영, 이기일, 박용우, 조채옥, 김순희, 김지혜). 일상 속에서 사물들은 언제나 기능성이나 효용성과 같은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물들이 미술의 문맥 속에 편입되는 순간, 그것들은 일종의 의미론적인 변형을 겪게 된다. 미술의 문맥 속에서 일상의 사물들이 본래의 기능성과 효용성을 상실하는 대신 심미적 대상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를 사물의 전치라고 한다. 이는 미술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소재의 폭을 증대시키고, 또한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 예를 보면 박병춘은 고무조각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산수화를 재현하기도 하고(일명 고무산수화), 청 테이프를 겹겹이 붙여 책과 같은 정물화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산수화와 정물화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장르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최소영은 흔히 청바지 천으로 불리는 데님이라는 소재를 뜯어 붙여 일종의 도시 풍경을 재구성한다. 이때 천 조각은 물론 옷에 속한 소품들, 예컨대 상표, 회사 로고, 단추, 그리고 심지어 지퍼마저 작품 구성을 위한 일부로 도입된다. 이는 옷이 해체되어 풍경화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맥락으로 전이된 것이다.
또한 이기일은 담배 갑(케이스)을 이용하여 일종의 로봇을 만든다. 한낱 담배 갑이 센서와 모터를 내장한 움직이는 유사 생명체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전시 기간 내내 전통 갑옷으로 무장한 모델을 내세워 관객들을 안내하게 한다. 말하자면 호객꾼의 역할을 연출한 것으로서, 그 이면에는 전통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주의 풍조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그런가하면 고무발포제나 포맥스 같은 산업오브제(박용우)와, 여성의 미용재료인 형형색색의 헤어롤러(조채옥) 역시 훌륭한 오브제가 된다. 그리고 오브제 미술은 거울과 어우러져 일종의 만화경 같은 우주적 공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김순희), 조명과 어우러져 촉각적인 빛, 만져지는 빛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김지혜).
미술가들은 일상 속의 사물을 차용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나아가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 널리 대중화된 이미지, 선입견과 편견으로 굳어진 이미지를 차용해오기도 한다. 소위 패러디 미술이 그것이다(권여현, 김동유, 이동재). 이처럼 미술가들이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이유는 원래의 이미지가 간과하고 있거나 은폐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캐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자기화 하는 일종의 기생논리 역시 패러디 미술에 접맥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작가들은 이미지를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이탈시켜 전혀 다른 맥락 속에 놓게 되는데, 이를 탈맥락화 내지는 재맥락화라고 한다.
이를테면 권여현은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차용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자신과 주변 인물을 모델로 끌어들여 원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연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 위에다 원화를 그대로 그린다. 이 과정에 나타난 모델과의 상호소통성 즉 연출과 연기 이 모두가 창작의 한 요소인 셈이다. 이때 모델은 단순히 포즈를 취할뿐만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함으로써 이 그림의 궁극적인 창작 주체를 모호하게 한다. 말하자면 이 그림의 창작 주체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모델이기도 하고, 둘 다 이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 모델이 많을 경우에는 창작의 주체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는 어디까지가 작가의 그림인지, 나아가 어디까지가 그림이고 또한 그림이 아닌지에 대한 물음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김동유는 마치 디지털화면에서의 픽셀과도 같은 수많은 자잘한 이미지들을 반복 재생산하는 방법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마릴린 먼로나 반가사유상 같은 하나의 큰 이미지를 재구성해낸다. 또한 이동재는 의외로 쌀이나 콩과 같은 잡곡을 일일이 캔버스에 붙여나가는 방법으로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제인 구달과 같은 이 시대의 스승들을 되살려낸다. 작은 이미지들이 모여 하나의 큰 이미지를 축조해내는 이 작가들의 방법은 부분과 전체, 집합과 해체(분해)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미술의 한 중요한 문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미술에서의 놀이는 환타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이한수, 안두진, 이용덕). 이는 현실이 비열하고 저속한 반면, 비현실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언제나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환영이 지배하는 비현실적 세계로의 도피를 꿈꾼다. 그 낭만주의적 세계관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석고로 만든 모조 천사상과 레이저 광선이 어우러진 이한수의 <복제된 천사>를 보면, 환상적인 빛과 수많은 천사들과 더불어 미지의 세계, 기묘한 꿈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미술관 바닥과 천장 등의 사이 공간을 수많은 오브제 조각들로 집적시킨 안두진의 설치작업은 화려한 색채와 환상적인 구성으로 일종의 만화적인 공간을 연출해내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포착한 이용덕의 <무호흡 유영>에서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무중력의 상태에 놓여진 듯한 비현실적 느낌을 받게 된다. 천사와 만화 그리고 무중력의 상태는 그것이 비록 현실에 근거하고 있을 때조차도 사실은 순수한 상상력의 힘에 의해 견인되고 있는 양 느껴진다.
환타지가 상처에 대한 치유 기능과 만날 때 미술에서의 놀이는 자기 치유적인 미술, 주술적인 미술로 기능하게 된다(강효명, 변시재). 강효명은 전시장에다가 별도의 공간을 하나 만들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공간에서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구성해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공간 안에서 관객들은 삶의 지혜가 담긴 경구가 적힌 메시지를 읽어볼 수도 있다. 관객 친화적인 쉼터 공간과 함께 휴식과 명상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변시재는 관객들로 하여금 커다란 풍선 속에 들어가 놀게 한다든지, 영상작업 <고무줄놀이를 하다>에서 놀이 행위를 다소 익살스럽게 재구성해내고 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적인 삶에 급급하여 그동안 잊고 지냈던 유아기적 놀이행위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것, 상실한 것, 잊혀진 것을 반추해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미술에서의 놀이는 이처럼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처를 대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상처가 유래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현실 비판적 미술, 풍자미술이 그것이다(이석영, 추은영, 이송은). 현실에서 발견된 모순을 과장하고, 극화하고, 비틀어서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석영은 역대 대통령들을 묘사한 조각상을 관객이 직접 작동시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할 수 있게 한다. 권력을 풍자한 이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관객들은 현실에서의 상실감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를 충족한다. 그리고 추은영의 <현대인의 대화>에서 현실은 소통부재 또는 소통불능의 상태로 나타난다. 목조각 작업을 토대로 만든 영상작업에서 두 개의 모니터는 각각 인간과 동물간의 일방통행식의 상호 어긋나는 대화를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는 사실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송은의 작업에 등장하는 현대인의 삶은 마치 외줄 타기를 하듯 위태롭다.
이외에도 전시에서 관객들은 입체로 재구성된 전통적인 산수화 속을 거닐어 볼 수도 있고(임택), 배터리가 내장된 개 인형이 그린 추상회화를 만날 수도 있다(이형주). 그리고 전통과 현대, 감각적인 소재와 초감각적인 소재, 아날로그적인 요소와 디지털적인 요소가 하나로 녹아있는 작품도 만날 수 있다(류재하). 미술과 놀이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미술과 대중이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통해서, 생활 속의 미술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 예술의 전당 200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