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공원에 갈까?
인효진은 집 앞에 위치한 일산호수공원을 관찰한 기록들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산호수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관음적 시선을 간직한 산책자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실적 삶을 늘 낯설게 받아들이면서 호기심 많고 그런가하면 허무하고 기이한 이 세상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눈 위에 렌즈를 포개어 놓았다.
그녀는 일산호수공원을 보며 “사람들은 왜, 무엇 때문에 공원에 몰려들까?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고 무엇을 보상받고 싶거나 막연한 기대와 환상에 잠기는 것 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 답을 사진으로 찾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답에 맞는 상황을 찾아 사진에 충실히 담은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포착해 가감없이 찍은 것이다. 공원에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하는 것들을 스스로 실연해나간다. 공원이라는 세트장에서 제각기 그럴듯한 연기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무심한 체 오로지 자신들만의 행복과 여유에 몰입하는 장면 및 가족과 연인간의 사랑, 동물에 대한 과도한 애정, 자연친화적인 삶의 누림 등을 시각화하는 다양한 행동양식 등이 작가의 눈에는 흥미롭고 재미있고 더러 삭막하고 낯설고 허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비근한 현실적 일상에서 빠져나와 휴일 날 제한된 장소에서 하루치의 유예된 시간동안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하고 절박한 소망은 사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이지기도 하다. 거기에는 매우 통속적인 동시대의 삶의 이상과 추구, 보상의 논리가 어설프게 흩어져있고 모조된 이미지들이 실체를 끊임없이 지워나가는 중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곳에 모며든 이들의 행복과 이상을 뒷받침해준다고 믿었던, 배경으로 충실했던 공원풍경 역시 인공화 된 허구의 자연, 가짜낙원, 결국 이미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일산호수 공원의 만화경
인효진의 사진들은 공원에 와서 누구나 찍고 가는 그런 기념사진에 가깝기도 하고 호수공원의 전경을 담으려다가 우연히 들어와 박힌 사람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우리는 작가의 시선에 붙어 어떤 가족들, 연인들, 행인들의 모습을 구경한다. 그러다보면 이 사진은 호수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관찰, 기록한 일종의 보고서로 다가온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가족 아니면 연인들이다. 혼자 공원을 찾는 이는 매우 드물다. 둘씩, 혹은 서너 명씩 모여서 자신들만의 시간에 몰입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변 경관에 시선을 주거나 호수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로 어깨를 감싸고 앉아 있거나 풀밭에 누워 있고 더러는 입맞춤을 하고 더러는 사진을 찍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여유롭다는 표정, 아니 행복해야 한다는 그런 얼굴들이다.
인효진의 사진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담고 있다. 수풀 안으로 들어가 앉아 마치 새둥지처럼 만들고 앉아 삼각대 위에 놓인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행복한 가족의 이미지가 곧 불멸로 봉인 될 순간을 기다리는 가족의 모습(딸아이는 강아지를 꼭 끌어안고 있다), 가늘고 얇은 나무 밑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있는 남녀와 가족들, 커플 티에 똑같은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부부, ‘일산호’라고 쓰여진 보트를 배경으로 예복을 갖춰 입고 촬영에 열중인 남녀, 유모차를 앞세워 걸어오는 남녀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조작하는 양복 입은 남자, 아버지와 딸이 누워 책을 읽고 뒤로는 저희들끼리 어딘 가로 가는 남녀의 보행 등이 그녀의 사진 속 장면이다. 강아지와 아이들, 유모차와 돗자리, 남녀와 가족이 이 사진의 변함없는 소재다. 하나 더 든다면 서로의 시선이 아무런 상관관계를 지니지 않는 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철저히 무심하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은 결국 공원 안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들, 그 만화경을 담고 있다. 마치 감시카메라에 찍힌 녹화테이프를 틀어본다면 만날 장면들이다.
공원에 모인 이들에게 그곳은 일종의 낙원이자 현실의 끝이며 일상의 경계 인냥 자리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가족과 연인들은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출하고 있어 보인다. 어쩌면 낙원에 와서 산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듯 하다. 나로서는 이들이 모두 부활해서 영생과 불멸의 삶을 비로소 보장받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환생한 사자(死者)들, 휴거처럼 보인다.

모형 공간 공원
도시에서 상실한 자연의 체취를 선사하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제공하는 공원은 도시민들에게 정서적인 환기와 함께 추억을 되새김질할 여유, 피로와 권태를 씻겨주는 건강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사람들은 공원에 와서 숨을 크게 들여 마시고 난후 운동을 하거나 거닌다. 공원은 여행을 대신해주는가 하면 도시를 벗어난 환각을 심어주고 원초적인 생의 리듬과 활력을 제공해준다고 믿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공원을 설계하는 조경의 기본원칙 중 하나는 자연을 모방하여 일정한 환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공원은 자연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시각을 통한 환영의 공간이란 측면에서 미술관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근대의 소산이다. 근대 도시의 산물로서 공원은 ‘순간성과 그에 따른 상실감의 체험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모형 공간’이다. 동물원, 식물원, 미술관이 결국 다 동일한 발상에서 탄생된다.
알다시피 도시 안에서 공원은 노동의 재생산과 맞물린 여가공간으로 위치 지워졌다. 여가시간을 코드화 하는 실질적 장치와 도구들을 제공하는 한편 이 공간, 시선을 통해 우리의 육체를 훈육하는 곳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개방된 야외 공간 안에 군집한 시민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통제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 삶을 생태적으로, 자연친화적으로 가꾸고자 하는 열망에, 또한 최근의 웰빙문화에 힘입어 공원과 산책, 운동과 여가가 뒤를 잇고 있다. 해서 우리들의 삶 주변으로 다양한 공원이 들어왔다. 아파트단지내의 조그마한 놀이터와 광장, 지하철 역구내, 도심 한 복판의 귀퉁이에 희미한 공원의 흔적이 있는가 하면 자연을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끌어 들이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산의 호수공원이나 분당에 위치한 중앙공원, 율동공원 등은 신도시에 계획적으로 조상된 대규모 공원이다.
일산의 주엽동, 장항동 일원에 조성된 모의인공 호수 공원은 약 30만평 규모의 대규모 인조공원이다. 이 호수공원은 물 등 자연적 요소를 도입하여 도시민들이 접하기 힘든 자연 생태계를 재현해 시민들에게 다양한 수변 경관과 호수를 이용한 다양한 레크레이션 장소로 제공되고 특히 가족 단위의 건전한 생활 휴식처로서 활용되고자 만든 곳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도시에 가설된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라고 불리는 일산호수공원의 풍경을 담고 있는 이 사진 안에는 이곳에서 여가의 생활을 즐기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들의 삶, 가장 보편적이면서 일반적이고 동시에 상투적이기까지 한 그런 삶의 얼룩이 스며있다. 공원에 온 사람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새삼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을 재인식 혹은 재발견하고 있다. 자연을 가장하여 인위적으로 설정된 공원이란 공간은 ‘군중’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른 독특한 문화 역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보이는 개별 단위의 일행들의 모습을 포착하였다. 대도시의 중심이나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여가공간은 본질적인 자연보다도 더 자연 같은 대체의 공간으로서 여가를 즐김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사공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장소다. 자연과 인공이 교묘하게 뒤섞인 일상의 환경이자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인공과 자연, 낙원과 지옥, 가족과 가정, 연인과 남녀, 몽상과 현실의 접점에서 절박한 이들의 삶이 잠시 유예된 공간,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공원이다.

인공낙원
인효진의 ‘천국의 섬’시리즈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일산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3년 동안 진행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그녀는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서, 우리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읽어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일종의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란 일종의 사회연구,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 해당한다. 인효진의 사진 역시 그런 목적에 비교적 충실해 보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그녀가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는 이력이 이 사진적 시선의 배후에 들러 붙어있음을 본다. 작가는 일종의 산책자가 되어 부유하듯 공원을 거닌다. 공원 안을 한가롭게 거닐며 찰나적인 힐끗 보기를 통해 너무 낯선 타인들의 삶, 생의 욕망, 행복과 사랑, 가족과 부부, 연인관계를 읽어나가면서 그들의 앞날을 점쳐보고 지금의 순간을 통찰해보고자 한다. 그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풍기는 인생의 아이러니 등도 엿본다.
이 사진 속 공원풍경은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어쩐지 작위적이고 모조, 어색함, 키치적 환상, 인공의 자연, 무료함과 삭막함, 쓸쓸하고 통속적인 삶에서 잠시 허용된 궁색한 일탈이나 협애화 된 낭만으로 물들어있다. 경쟁적이고 불안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소모되는 도시 공간과는 달리 이 ‘공원’이라는 공간은 마치 천국같이 여유롭고 풍요한 낭만을 선사해주는 듯도 하다. 현대인들에게 공원은 도시문명에 대한 일탈의지로 보인다. 그들은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과 함께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애쓰지만, 어쩌면 모든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곳에 찾아든 가족들과 연인들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과 사랑을 서로 자위하고 위무한다. 그녀의 사진에는 동시대 한국 가족주의와 연인들의 풍속이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펼쳐져 있다.
그녀의 사진은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고 신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럽다. 우리네 삶의 이 견딜 수 없는 코믹함, 빠져나올 수 없는, 떨어질 수 없는 희극적인 생의 드라마 말이다.
공원을 돌아다니는 이 관찰자는 쾌락과 죄의식이라는 관음증 특유의 이중 감정을 느끼면서 소요한다. 그렇게 해서 찍힌 사진은 공원에 대한 일종의 임상의학적인 보고서 같기도 하지만 이 공원풍경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재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동시에 깨닫기도 한다. 그만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 공원에 몰려든 사람들이 모습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징후는 너무 넓고, 깊고, 아득하다.


가족과 개
인효진의 사진 안에는 대부분 가족, 연인이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는 일은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무척 기이한 일이기도 하다. 공원안에는 가족의 행복, 연인들의 사랑이 부채처럼 펼쳐져있다. 이 장소는 이성애적이고 가족주의적이며 가정의 화목과 남녀간의 사랑을 낭만적으로, 환영적으로 증폭시켜놓는다. 가족이란 육체로 감각되는 일상적 현실이다. 가족을 단순히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집합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어떠한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기타 긴밀한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과 함께 얽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도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은 따라서 하나의 육체가 자신의 욕망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회관계들 속으로 뻗어 나가는 곳이며, 또한 역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힘과 권력 그리고 이념과 상징들이 스며 들어오는 장소를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족적인 존재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가족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족은 인간 삶의 근원적인 구조이다. 가족이라는 지점은 개인의 육체와 욕망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매개하는 경계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철저하게 혈연주의적 배타성을 보이는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계급적 차별화의 재생산 기제로 작동한다. ‘단란한 가족’이란 (남녀로 구성된) 부모가 모두 존재하고 아들딸의 비례가 맞는 가족의 특정한 유형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의 표면을 이루는 혈연주의는 동질적 집단끼리의 배타적 권력에 대한 애착의 표현이다.
인효진의 사진 속 가족들이 보여주는 낭만적 풍경은 그들이 그리워하는 유토피아적 가족사의 자발적 연출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강고하고 질긴 이데올로기가 표상화되고 있다.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언제나 개인의 유일한 위안처이며, 최초이자 최후의 근거지가 가족이라는 믿음은 견고하고 견고한 만큼 이 절대적인 자연풍경 앞에 기념되어야 할 것으로 다가온다. 가족은 다양한 사회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에 온통 맞닿아 있지만 이것들과 결별함으로써 언제든 ‘가족 자체’로 재생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족은 현실적으로는 사회적이지만 이상적으로는 비사회적 또는 반사회적이다. 사진 속 가족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족에게만 몰입해있다. 타인들은 가족의 경계 밖에서 위험한 존재로 상정된다. 우리사회의 이 이기적 가족주의는 지나친 가족의 집착과 가족에로 인한 폐해를 은닉한다. 동시에 이 사진들에는 한결같이 개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개’란 존재는 동시대의 또 다른 가족사의 시뮬라크르를 보여준다. 휴일 날 일산호수공원에 모여든 이들 대부분은 개를 데리고 나왔다. 애완견들이 대부분인데 그 개들은 대개 작고 깜찍하다. 주인을 닮은 패션을 하고 품에 안겨서 혹은 발발거리면서 가족들의 뒤를 쫓고 있다. 그 개들은 기꺼이 가족의 일원으로 보호되고 사랑받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개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파트너로서 사랑을 받는 애완동물의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생동감과 자발성을 지닌 동물을 친밀한 대화 파트너로 삼고자 하며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현대의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가 익명성을 지닌 채 생동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짜여진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이 표현된 것일 수 있다. 인간이 현대 사회의 소외 조건들로 인하여 갈수록 고립되어 외로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는 애완동물이자 자녀의 대용물로 격상되고 있으며, 그 붙임성 덕분에 인간의 일상생활에 활기를 넣어주는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시대에 처한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상호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조건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으로 파고 들어와 대체된다.

다큐멘터리 사진
호수공원에서 휴일을 즐기는 그들의 풍경이 작가에게는 동시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물론 그들의 감성, 욕망, 가치관의 변화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거대한 문화적 풍경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모두 역사적으로 해석될 가치가 있는 이 문화적 풍경은 그 가치를 담보하고자 사실성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 다큐멘터리로 기록된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총체적 자각이자 그것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그것은 세상 읽기이며 사회를 해석하고 문화를 해석하는 하나의 실천적 방법론이다. 그래서 그것은 특별한 해석이 요청되는 현상적인 사진이다. 작가는 일산호수공원을 찍은 이 사진들이 지금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현재 무엇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가와 휴식, 가족주의와 연인들 간의 사랑, 전원과 공원생활에 대한 한국인의 이상적 관념과 그 관념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서구에 대한 상상화 된 환상, 어떠한 가치판단도 보류한 채, 한국인의 무의식적 욕망에 침투한 허상을 기록한다. 그 허상을 담은 사진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그것이 환상의 기록이기에 그만큼 매혹적이기도 하다.
이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형식을 통해 모델의 정체성과 그가 사는 시대를 우회없이 접근하려는 시도의 방법론이다. 이곳의 풍속을 대변하는 공간에 다큐멘터리 사진의 생산에 부과된 시선의 엄격성, 의학적 냉정함을 견지하면서 카메라의 앵글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증적 자료로서의 이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자 객관적인 기록물이면서도 또한 자의적으로 해석된 작가만의 풍경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작가로서의 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는 풍경만을 선택해서 보여주고 있고, 작가 스스로 자연의 빛과 컴퓨터를 동시에 이용하는 적극적 행위로 이미지에 색감이 개입함으로서, 작품의 의도를 더욱 생생하게 형상화시키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초현실이 묘하게 교차하는 이 드라마틱한 풍경들은 부분적으로 과장되거나 혹은 전체적으로 조절된 색채로 인해 더욱 극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색채에 대한 개입행위와, 마치 연출한 것과 같은 영화적 풍경들은 이 작품들을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위로 올려놓고 있고, 객관성과 주관성의 사이를 걷게 만듦으로서 다큐멘터리라는 단일한 의미에서 약간 비껴 서있게 만들어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 풍경들은 객관적 사실을 담보하면서도 완전하게 사실적 풍경은 아닌 것이며, 그렇다고 그 의미를 훼손시킬 정도의 왜곡도 없기에 자의적이면서도 사실적 풍경인 샘이다. 그렇다면 디지털매체의 출현은 다큐멘터리라는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 다큐멘터리 작업이 가지는 정체성을 위협하기보다는 오히려 적절한 매체의 출현으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주체의 시선을 리얼리티와 환타지가 혼재하는 분열 공간 안으로 산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쇠라와 효진
인효진의 사진을 보다보면 마치 조르주 쇠라(1859~1891)가 그린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19세기의 쇠라와 21세기 효진의 랑데부! ‘교촌 치킨’ 광고에 등장하는 그 그림은 당대의 풍속화자 점묘주의에 따른 그림이란 점에서 유사점이 많다. 인효진의 사진도 디지털로 재현된 이미지, ‘점’(Dots)로만 이루어진 그림이다. 그러니까 동시대의 과학적 산물에 힘입어 재현된 풍경이자 동시대의 풍속를 반영하고 있고 비판과 풍자적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점에서 공유성을 만난다.
19세기를 살았던 보들레르는 당시의 ‘모던 생활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다. 동시대 파리의 모습에서 주제를 정하는 그림들을 중요시한 것이다. 여기서 모던 생활의 회화란 좀더 깊은 차원에서는 미술에서 ‘모더니티(modernity)’의 특성을 찾자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에는 삶의 양식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의 생활리듬이 전통사회와 같이 자연적인 생활리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며 이는 생활양식의 합리화라는 전반적인 문맥 속에서 노동과 여가의 분리라는 혁명적인 변화를 표상한다. 노동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경쟁주의, 업적주의라는 생활원리와 자본의 운동논리에 따른 경제적 강제는 전반적으로 사회적 스트레스 지수를 높임으로써 건강해소와 기분전환의 기능을 가진 여가가 생활에 있어서 친화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 결정적인 계기가 19세기에 만들어진다. 19세기 후반에는 도시 중심의 새로운 여가문화가 탄생한다. 이를 반영한 그림의 최초의 예가 바로 당시 인상파 화가의 대표적 존재인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블로뉴 해변에서, 1869년>다. 당시 사람들의 여가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강변풍경은 기존의 자연주의적 기법에서 벗어난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삶의 풍경을 기록하고 있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1869년 끌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린 <라 그르누예르>풍경은 파리 외곽의 샌 강변에 있는 보트와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기록하듯 그렸다. 이의 결정판이 바로 쇠라의 그림이다. 쇠라는 19세기말의 과학적 방법에 확신을 가졌으며, 미술을 과학과 유사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다. 당시 색채와 광학에 대한 새로운 과학지식을 그림에 도입한 그는 우선 십자형으로 교차해 가볍게 붓질하는 방법을 시도했고 다음으로 1883년경에 색을 붓으로 아주 작게 찍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점묘주의 기법이다. 그의 대표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점묘로 이루어진 그림이며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디지털이미지’다.
미술사학자 클라크(Clark, T.J.)가 묘사한 바와 같이 이들은 서로의 교류가 없이 고립되어 있다. 색채의 대조와 결합을 통한 화음과 질서의 통제된 세계에서 부자연스럽고 딱딱하게 서로 고립된 채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알다시피 인상주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화면에 담았다. 파리라는 도시와 그 근교 그리고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였다. 자연과 함께 했던 삶에서 이탈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인들은 두고 온 자연을 갈망하게 되고 결국 그에 대한 대체가 여행, 여가문화, 정원, 경마장, 식물원, 동물원 등이었으며 그것들은 부지런히 그림에 담은 것이 인상주의자들이었다. 기본적으로 휴일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쇠라 역시 인상주의 주제를 계승하고 있지만 인상주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이 그림은 가족이나 친구, 또는 중산계급들의 모임이 아니라, 다양한 연령과 성별 중소계층과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섞인 사회의 축소판을 반영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쇠라가 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 새로운 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는지 아니면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가 그 목적인지는 사실 불분명하다는 생각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일산호수공원에 모여든 한국의 도시인들, 뒤늦은 후발근대화의 주자들이 공원에서 만들어내는 삶의 만화경을 보고 있노라면 쇠라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과 겹쳐지면서 야룻한 층, 결들이 생겨나고 또한 미끄러진다. 인효진의 사진 역시 외형적으로는 동시대의 쇠라적인 그림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나 내용은 상이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차이야말로 매우 의미있는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공간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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