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인간을 최초로 비쳐준 거울, 자신을 비로소 볼 수 있었던 화면이었다. 나와 타인의 다른 생김새를 알게 되면서 자아와 타자에 대한 개념이 생겼을 것이고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생각들도 갈래를 쳤을 것이다. 나르시소스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했다. 그가 죽자 무엇보다도 나르시소스의 눈을 통해 비친 자신의 모습에 역시 도취했었던 호수가 그 누구보다도 매우 슬퍼했다고 전한다. 이후 사람들은 수면에 비친 영상을 그림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서구미술은 그림이 거울에 비친 상처럼 완벽한 모방, 재현이 되고자 욕망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결국 그러한 욕망은 사진과 영화 등으로 실현되었다. 서양미술은 물, 수면을 의식하면서 시작되었고 수면이 되고자 했다가 이후 수면으로서의 기능은 기계에 돌리고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나가고자 했던 것인 현대미술이다.
동양인들 역시 물은 모든 사유와 철학의 근간을 제공했다.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농경문화와 주어진 자연조건 속에서 그 같은 인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이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을 제공했던 것이다. 덧붙여 물에서 자양분을 제공받는 식물은 특별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뿌리 은유로서 사용되었다. 그래서인지 물을 그린 그림, 물이 들어간 그림이 전통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함축하고 있는 존재며 인간사유와 행동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동양화란 결국 물을 이용하고 물의 속성과 섭리를 잘 이용해야만 가능한 그림이다. 동양화가 그려지는 형국을 들여다보면 마치 대지에 물이 스며들어 온갖 작물과 생명체를 길러내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종이는 대지가 되어 수평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위로 먹이 물을 만나 붓에 실려 종이 안으로 스미고 번지면서 산이 되고 나무와 풀,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 형국은 고스란히 자연의 형성과 질서를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산수화란 그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알리는 동시에 산과 강(물)의풍경에 의해 상징된 우주 안에 한 사람을 묘사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일러주는 그런 그림이다. 물에 대한 철학이 도상화 되어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물을 그린 그림이라면 단연 중국 남송 시대의 마원(馬遠1190-1225)이 그린 여러 가지 형태의 물 그림이 떠오른다. 그는 파도와 물결만을 화면 가득 그려놓음으로써 물 자체를 응시하고 이를 통해 인간 존재를 상대적으로 겸허하게 바라보고 끊임없는 순환과 고갈되지 않는 물의 미덕 등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그림이다. 견주어보자면 겸재 정선 또한 수많은 물 그림을 남기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금강산의 폭포와 동해 풍경일 것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산수유람이 문화가 절정을 이루고 따라서 산수유람을 그림으로 담아낸 산수화(기유도 紀遊圖)들이 풍성하게 제작되었는데 그 대표적 존재가 바로 정선이다. 당시 문인들은 명산명수를 몸소 누비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으며 산수유람 후 그 여정을 시문과 그림으로 풍성하게 제작하였다. 산수를 통해, 아울러 물을 빌어 자연의 천기(天機,자연운행 속이 숨어있는 기밀 그 자체)를 감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에 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온통 물로 채워진 바다는 그 물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내 몸의 대부분인 액체와 몸의 기원인 양수 속에서의 체험이 바다를 보노라면 슬그머니 되살아남도 느낀다. 바다는 그저 물뿐이다. 아니 물과 함께 여러 생명체가 공존하고 있겠지만 현상적으로는 오로지 액체성으로 가득 차있다. 텅 빈 바다는 가물가물한 수평선만을 던져줄 뿐 우리의 눈을 잠시 공허에 빠뜨린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다는데 그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실측과 시측의 경계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시작과 끝을 한 눈에 보여주지 않기에 인간은 다만 그 한 자락을 단서로 무한함을 체득한다. 광막함은 그래서 일종의 공포를 동반한다. 그 무서움은 측정할 수 없는 두려움, 깊이와 한계가 없는 데서 만나는 숭고함에서 기인한다. 근원을 알 수 없다는 곤혹감이 막아서는 바다는 일종의 원 풍경이고 가장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장면일 것이다. 가슴속에 오래 살아남아 추억이 되는 이미지들은 이렇게 본원적인 힘을 지닌 것들이다.
사람들이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고 이를 그림과 사진으로 담아두는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에 그럴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무(無)를 바라다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 회귀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무엇보다도 낯선 곳의 하늘과 바다에 경탄한다. 거기에는 어디에선가 떠나온 자신의 절대적인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는 투명함이 빛난다.
바다는 넓고 깊고 아득해 보인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가 예시하는 세계 창조에 대한 원초적 상상력의 근원으로서의 바다를, 그리고 거대한 모성적인 물의 상징 - 바슐라르의 <물과 꿈>의 인용에 따르면, “바다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크고, 항구적인 모성적 상징중의 하나이다.”- 으로서의 바다를 새삼 떠올린다.
바다는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증발의 방향으로 나아가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물의 실체인 것처럼 바다는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바다를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바다에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의 사이를 오가며 바다는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것으로서 뒤척이는 바다의 몸, 물 자체가 손에 감촉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색상을 지녔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바다의 색상은 그저 희희낙락할 뿐이다.
이름을 지어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모른다는 얘기다. 어렴풋하게 ‘블루’를 건져 올린다. 나는 그 색채를 감각적으로 즐긴다. 그 정도의 사치는 허용될 것이다. 특히나 ‘울트라마린’ 색상에 근사한 바다의 칼라가 좋다. 그것은 수평선 너머의 세계를 꿈꾸게 하는 환영과 몽상으로 눅눅하다. 바다를 고향으로 둔 모든 미술인들은 평생 그 블루를 재현하는데 갈망한다. 수화 김환기가 그 대표적인 화가다.
온통 푸른색으로 적셔진 바다는 사실 두렵기도 하지만 위안을 줄 정도로 아름답다. 내 눈이 거기서 적셔지고 비로소 세상에서 놓여나 자유로이, 어떠한 목적지나 고정 없이 떠돎을 허용한다. 그 자유와 권태가 좋다. 오로지 뒤척이는 바다, 물만이 흔들린다. 호화스런 물 비늘을 만드는 태양 광이 반짝인다. 그것은 익숙하게 보아온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떨어진 느닷없이 마주하게 되는 매번 새로운 바다의 초상이다. 그런가하면 바다는 지상의 모든 인위적인 수직의 욕망을 가라앉힌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수평만이 존재한다. 동양에서 수평, 자는 바다, 물에서 기원한다. 수직의 의지에 반하는 수평의 의지는 휴식, 가라앉음, 누그러뜨림, 평정, 사색, 한가함, 호흡 등을 떠올린다. 바다에 도착하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맑아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각광받고 있는 설치란 결국 수평에의 의지를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수직의 기념비적 조각, 벽면에 걸리는 그림, 직립한 인간의 눈의 욕망에 조준되어 있는 모든 시각이미지들을 잠시 대지에 일치시키고 바다의 수평선과 동일하게 배열해 인간의 눈을 아래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전략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미술이 이상과 관념, 개념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삶의 토대인 지표와 수평선을 의식해보도록 권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시대 삶의 문화가 보여주는 현란함, 가파른 질주,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세속적인 욕망의 버선을 죄다 가라앉히는 반성의 힘이 바다, 물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바다에 가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다를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