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2557
문인화 신세계 연 현재 심사정 전시회
현재 심사정 전시회/중국 남종화 재해석해 ‘조선화’로 토착화
* 매화를 사랑한 맹호연의 이야기를 그린 <도교심춘(渡橋尋春)>(왼쪽). 위는 심사정의 대표작 중 하나로 두꺼비와 어울려 노는 신선의 모습을 그린 <해섬자희(海蟾自戱)>.
한해에 단 두 번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 그래서 언제 어떤 전시가 열리는지 항상 주의해야 하는 곳.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 전통 회화의 엄청난 보고이자 그 보고를 잘 엮어내는 이 미술관은 일제 시대에 우리 미술 사랑에 대한 간송 전형필의 열정과 그 성과를 체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 이곳에서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현재대전>(10월31일까지, 02-762-0442)이 열리고 있다. 산수화·인물산수화·화조도·초충도·사군자 등 다양한 소재의 빼어난 그림 100여 점이 줄을 잇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모두 잘 그린 이는 거의 드물다. 우리가 미술 교과서에서 자주 보았던 그의 <딱따구리>는 조선 시대 걸작을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명작이다. 새가 나무를 쪼는 순간을 능숙하고 대범한 붓 자국으로 절묘하게 포착한 이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 시적 여운, 세련된 화면 구성에서 압권이다. 자연계와 생명체를 깊이 관찰하고 그 정취를 가감 없이 올려놓는가 하면, 흐트러진 멋과 아련한 운치를 능란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현재 심사정만이 가능한 경지이다.
심사정은 조선 시대 문화의 황금기인 영조 연간에 활동한 사대부 출신 선비 화가이다. 숙종 33년에 태어나 영조 45년에 사망했으니 영조 시대를 온전히 겪었다. 그의 집안은 명망 있는 사대부 가문(당시 왕실과 사돈 관계로 맺어짐)이었으나 영조 즉위후 역모와 관련된 사건으로 결딴이 났다. 조부는 극형으로 죽고, 그 형제들은 모두 귀양살이를 했다. 당시 현재의 나이는 18세였다. 이같은 가정사의 충격은 이후 그의 일생을 좌우했다. 그는 서울 안산 기슭 초라한 초가에서 어렵게 살면서 그림에 전념했다.
현재는 극심한 가난과 주변의 외면 속에서 오로지 그림을 그리며 빈한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염할 비용조차 없어 주변 사람들이 비용을 추렴해 겨우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의 이같은 삶이 전형적인 문인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그는 아홉 살 때 당대 최고의 화원인 겸재 정 선(1676~ 1759)에게 사사했으며 표암 강세황과도 깊이 교류했다. 당시 현재의 그림을 가장 높이 평가한 이가 바로 표암이었다. 현재는 그와 함께 화첩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 그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중국 역대 명화 ‘방작’ 통해 창작 실험
현재는 ‘중국의 남종 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하는 데 성공한 분으로 관념적 화풍의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의 국제적 조응력을 한층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유학·주자학이 이 땅에 수용되어 오다가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조선성리학으로 뿌리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중국 그림을 모방해 답습해 오다가 겸재 정 선과 현재 심사정을 거치면서 조선의 화풍을 일으켜 세웠다. 특히 현재의 그림은 겸재와 달리 유교 이념을 도상화한 중국의 문인화를 조선 문인화로 토착화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는 중국 역대 명화가들의 작품을 화첩을 통해 수없이 방작했다. 방작(倣作)이란 임모처럼 옛 명화를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재해석하면서 자기화한 창작을 말한다.
현재는 평생을 중국 그림을 보고 방작하면서 그 위에 조선인 사대부로서 자기 인성과 감수성을 올려놓아 조선 문인화의 한 방향성을 추출하고자 했다. 나는 그의 여러 그림 중에서 <도교심춘(渡橋尋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지팡이를 든 선비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아주 작은 작품이다. 이 그림은 현재는 물론 모든 문인들이 희구했던 세계상이었을 것이다.
- 시사저널 784호 2004.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