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동양화를 전공한 이들은 전통적인 동양화를 서구의 현대적인 미술개념 속에서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이념을 상실한 형해화 된 전통회화가 장르개념 아래 시각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상대적 거리에서 동양화 장르의 유장한 역사, 전통이란 맥락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어떤 식으로 계승, 전환할 것인가를 작업의 화두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은 일정한 죄의식과 소명감 같은 것들이 착찹하게 겹쳐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동양화의 전통이나 본질 같은 것들을 나름대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작업의 알리바이로 삼았다. 어떤 이는 문인화 정신으로 어떤 이는 수묵정신으로 어떤 이는 채색화로, 민화로, 혹은 고구려벽화에서 찾기도 했다. 그 외형을 빌어, 혹은 정신성이란 관념의 그늘에 묻혀 인테리어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순간적인 비약으로 떠버려서 아찔한 정신세계를 되뇌이며 너무 강한 아우라를 드리우기도 했다. 그런 저런 풍경이 동시대 동양화단을 모자이크 하고 있다. 곤충의 겹눈으로 포착된 풍경 같은 것들 말이다.
결국 전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도상 몇 개를 조합해 인테리어를 하거나 노. 장자 사상 같은 세계로 날아가 버린 작가, 그 두개의 양극단이 현재 막강한 양 진지를 구축해 보인다. 저마다 전통에 대해 열심히 말은 하지만 누구도 그 전통이란 것의 실상에 머리를 처박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양화다 서양화다 하는 협소한 경계나 구분에서 훌쩍 떠나 그냥 그림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작가들도 별반 없다. 왜냐하면 동양화란 것을 어떤 식으로든 부여잡고 그 장르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어야 동양화가로서의 삶이 가능하기에 그렇다. 결국 동양화란 장르를 팔아 기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다수 동양화가들이란 대부분 실체도 없고 잘 가늠되지도 않는 유령 같은 존재에 기대 기생하는 숙주들 같다.

그런 막막한 풍경 속에서 김성희 그림은 기존의 상식적이고 진부해진 동양화 개념에 붙어있지도 않고 현학적인 사상, 정신세계로 마냥 부양하지도 않으면서 동양화에 대한 견고한 인식과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전통에 대한 성실한 학습이 단단하고 치밀하게 결구된 세계로 자존한다. 쉽게 말하자면 비로소 동양화란 것이 무엇이며 그 내부를 지탱하는 문화적 사유와 형식적 특질 같은 것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이를 조금씩, 조금씩 물에 불리듯이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가란 생각이다. 여기에는 가벼움도 경망스러움도 과도한 자기 주장도 지나친 무거움도 없이 그저 평정심 속에서 그윽하고도 깊은 그리기가 있을 뿐이다. 이 작가는 동양화의 전통이란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인가를 일단 정확히, 제대로 알자고 말한다. 정확한 필법, 특질 그리고 그 밑바닥을 지탱하는 이념과 정신의 현실적 풍경에 대한 천착이 그것이다. 거칠고 가벼운 수사로만 떠들지 말고 온 몸으로 체득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낭만적이면서도 너무 경박해 보이는 도사 같은 제스처와 정신세계로 뜨지 말자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라고 너무 순진하게 믿어버리는 그 도상의 차용과 장식성에서 혹은 모필이나 매체에 과도하게 따라붙는 관념의 더께도 좀 치워보자는 것이다. 종이의 물성이나 붓질, 천연 색채와 한지 혹은 유희나 무위, 무슨 무슨 정신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서 그림 자체로 말하고자 하며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그간 김성희는 잘 드러나지 않고 헤아리기 힘든, 쉽게 보여지지 않는 그림들을 그려왔다. 동양화의 근간에 대한 철저한 체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근자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물음을 던지는 작가의 작업은 시류나 화풍 내지 특정한 이슈나 주제가 모두 물러나 침묵으로 잦아든 자리에 고독하게 빛난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에는 그림 이외의 것들이 살지 않는다. 그림 속에 의미와 내용이 있고 전통과 현실이 녹아있고 모든 기법이 혼재하며 활성화되고 있다. 실제 대통이 있고 계곡과 산이 있고 이끼가 서식하며 달이 뜨고 지고 빛이 번지고 안개가 자욱하며 숲과 숨이 교호하고 사계절의 순환이 있고 생멸이 수시로 몸을 섞고 있는 자연계가 있다. 혼돈스럽고 카오스적이며 생성적인 이 풍경 안에는 시간의 변화, 세월의 침잠 아래 숙성하고 발효하는 생명체의 기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한 작가의 몸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육화되어 자립한다. 대나무, 대통과 사람, 생명, 자연, 시간, 순환, 변화 등등은 분리되거나 개별적이지 않다.
그녀는 대나무를 화두 삼아 그림을 그렸다. 대나무를 기르고 대숲을 뒤지고 대통을 구해다 놓고 관찰하는가 하면 대나무의 속성과 성질을 궁구하고 그 생김새와 섭리를 이해하고 이를 빌어 동양인의 자연관과 세계인식, 생명에 대한 이러저러한 생각의 자취를 철저하게 그려 보인다. 사군자라는 화목의 상습적인 소재화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 대 자체의 본질로 육박한 선에서 이루어진 이 대 그림은 또한 그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소동파가 오잠의 녹균현(綠筠軒)이란 곳에서 살고 있는 한 스님의 삶을 보고 지은 시중에 다름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밥상에는 고기가 없어도 되지만, 사는 곳은 대나무가 없으면 아니되네. 고기를 안 먹으면 여윌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속스러워 진다네..”
서울대학교 연구실에 마련된 작가의 작업실은 비좁지만 무척 오밀한 배려 속에 사물들이 가득차 있었다. 햇살이 부시게 파고드는 창가 쪽으로 이끼를 가득 담은 투명한 반구형접시와 메마르고 쩍 쩍 갈라진 몇 개의 대통이 있었다. 이끼를 키우고 보살피면서 대통을 수시로 헤아리는 시선이 자뭇 번성하다. 이끼의 생과 대통의 삶은 동일하게 식물의 존재성을 강하게 각인한다. 그러니까 근작은 이끼와 대가 화두인 셈이다. 지난 그림들을 떠올려 보면 그녀의 그림은 화두 하나를 던져놓고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다시 치밀하게 이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왔다. 작가가 공들여 그린 대통 안에는 달이 뜨고 정원이 펼쳐져 있다. 대의 마디는 굵고 두툼하게 겹쳐있어 질감이 두드러진다. 그 마디는 시간과 생의 매듭이고 생멸이 진행되어오는 것이자 모든 호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삶의 순간이 거기 엄정하게 서려있다.
대나무는 텅 비어 있지만, 마디마디에 응어리가 있다. 그냥 허무하게 비어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꿰뚫는 지혜와 실천하는 흔적이 비어있는 마음에 남아있다. 그것은 또한 항상 푸르러서 흡사 선지식의 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도 같다.




작가는 대나무를 단순히 소재로 취하기보다는 옛사람들이 진정 대나무를 가까이 하고 이를 빌어 식물성의 사유로 삼아 삶을 추스리고 아울러 우주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헤아리던 마음의 한 자락을 종합해 한 화면에 올려놓고자 한다.
새삼 나는 그 ‘식물성’을 생각한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작용이 식물의 생명현상이다. 식물의 역사, 대의 역사는 제 몸 속에 온전히 기록된다. 대는 대통의 표면에, 마디에 자기 역사를 스스로 새긴다. 그것은 대나무가 평생 내뱉고 빨아들인 호흡의 결과로 응어리져있다. 그래서 그 매듭은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생명의 선이며 리듬이다. 그런가하면 대나무의 표면은 과거를 온전히 지녀가고 있다. 갈라지고 터진 자국, 바래고 스러진 색감 등이 대의 역사와 시간의 두께, 깊이를 증거한다. 외부로 열려있는 이 생의 궤적은 그만큼 엄정하고 거짓이 없다. 아울러 대통 속은 텅 비었는데 그 무위와 적막이 대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로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 준다. 나는 그 비어있음이 마냥 놀라웁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대나무는 죽는다. 그러니까 대에게 공, 비어있음은 존재의 뼈대다. 그런가하면 분명한 매듭은 한 숨이 멈추고 새로운 숨이 시작되는 접점이다. 그 매듭이 없이는 다음 생은 없다. 또한 대나무의 껍질은 외계와 마주한다. 나무는 낡고 허름한 외양으로 쩍 쩍 갈라지면서도 그 안쪽에서 태어나는 새로움을 보호한다. 모든 대통의 피부, 껍질은 나무가 겪어내는 고난의 무늬이자 시간의 자취다. 그 모든 생멸의 과정이 이 대통의 피부에 서려있다. 이렇듯 대통 하나를 보는 일은 곧 자연, 식물, 생명현상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것은 기존의 사군자 식으로 한번 ‘치고 말 것’이 아닌 것이다.

김성희가 장지에 모필로 대나무를 그리고 그 대나무를 빌어 달이나 연못, 이끼 등을 겹쳐 올려 그린 근작은 기묘한 비경 같다. 대통 안에 자연풍경이 겹쳐있고 그것은 안으로 또 다른 공간을 아늑하게 펼쳐놓는다.
삶의 때가 잔뜩 끼여 있는 대통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자연이자 대나무이고 우주이자 바다이고 달이면서 땅이다. 사람의 육신이면서 마음이고 정신이자 의식이고 의지이자 번뇌다. 그러한 잠시 대통 안에 달이 뜨고 지고 스러지고 다시 환하게 살아난다. 오래된 정원에 이끼가 자욱하다. 이끼는 경건하다. 모든 사물의 피부에 붙어 호흡하고 번식하고 그 피부를 눅눅한 습기로, 자신이 몸으로 덮어나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가물해지면 이 세상은 온통 이끼로 가득 덮일 것이다. 빈틈을 메꿔나가는 잡초처럼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이끼는 산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세월을 시각화시킨다. 끊임없는 변모, 순환을 겪는 풍경이 그 대통과 겹쳐진다. 대통은 알을 품듯이 달을 안고 있고 스스로 호수나 연못이 되고 오래된 정원이 되었다. 마치 실제 장지 위에 녹이 슬고 이끼가 덮히고 시간의 때가 서식하듯이 오래 매만진 온갖 질감과 비릿한 색채가 가득 절여있다. 투명하면서도 견고한 이 질감은 물감과 모필로 이룬 색과 질감이 아니라 그저 시간과 바람에 의해 가능한 그런 느낌처럼 자연스럽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기 이전에 그 자체다. 일정한 시간의 변화, 순환의 구조 속에 그림 역시 그렇게 지속적인 변모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 한 켠에 역으로 순간에 내리그은 모필의 선으로 그려진 대가 공존한다. 여기서 선은 다양한 맛과 느낌, 깊이와 강도, 리듬과 변화 등을 거느리면서 강직하고 은근하게 자립한다. 장난 같고 유희성이 짙은 이 붓 놀림은 일거에 성취되는 선의 묘미로 홍건하게 적셔있다. 먹의 뉘앙스와 붓질에 의한 선의 자취가 지어내는 표정이 매력적이다. 이 그림 안에는 즐거운 시각적 체험이 경쾌하게 도약한다. 대의 칸 칸은 감칠맛 나는 채색, 붓질의 경쾌하고 감각적이면서도 소박한 회화적 매력으로 슬그머니 머물다 멈췄다. 여기에서 나는 필의 쓰임과 색채의 혼융의 조화로운 한 경지를 감각적으로 만난다. 이런 식으로 채색이 먹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새삼 접한다. 아니 채색화가 이렇게 구사될 수 있음을 본다.
한 쪽에 드리운 다소의 진지함과 그 한 쪽에 바짝 붙어있는 이 유머와 여유로움 역시 고도의 중심 잡기다. 그런 면에서 김성희는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곳에서, 삶이나 그림 그리기에 있어 나름의 중심을 잡으며 평정심 속에서 그림만의 미덕과 매력을 조심스레, 진지하게 조율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그 지점이 가장 기본이면서도 그만큼 드물다는 점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