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우연히 접한 도록에서 발견한 도판(그림)하나가 내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다. 다분히 직관적으로, 감각적으로 좋다고 느껴 기억의 갈피에 접어둔 것인데 기회가 되면 전시기획을 하거나 책을 쓸 때 참고할 작품이라고 혼자서 짐짓 단정짓고 간직해둔 것이다. 이런 작품들 대부분은 수업시간에 슬라이드교재로도 쓰이는 편이다. 이렇게 스스로 작품들을 관리(?)하고 소장하고 기억하며 그 의미를 부여하고 감상하는 일이 나의 직업이자 은밀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2002년도에 그려진 유승재의 ‘바람’도 그런 작품의 하나였다.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처럼 나무와 바위를 닮은 어눌하고 소박한 형상, 끄적거린 연필선, 자유롭다못해 심심하기 그지없는 화면구성, 선염으로 머문 색채의 그 순박한 처리는 묘한 여운을 동반했다. 이 의도적인 무심함과 수식을 최대한 덜어낸 그림은 기존 동양화들이 대부분 지나치게 많이 그리고 채우는 것에 반해 상대적으로 숨통 같은 신선함을 환기시켜주는 편이었다. 아울러 나로서는 그런 그림에서 진정한 산수화의 맛을 새삼 체득 받는 듯 했다. 호흡이 통하고 공기가 넘나들며 빈곳도 아니고 채워진 곳도 아닌, 현실도 아니고 환영도 아닌,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그린 것도 아니고 그리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경지가 문득 멈춰서버린 세계다. 한지를 마당 삼아, 공간 삼아 나무였다가 바위였다, 선이었다가 색채였다가, 또는 글씨(기호)인가 싶으면 그림이기를 넘나들거나 그 모든 것들이 고요히 혼재된 순간이 돌연 침묵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것은 결국 그런 마음에서나 가능한 그림이다. 기존에 동양화를 하는 많은 이들의 그림이 마음보다는 시각적 열망과 보여지는 것에 대한 결과로 치달으면서 그 욕망에 잠식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반해 이 그림은 그 시욕이 상대적으로 가볍다. 시욕을 은근히 누른 자리에 마지못해 삐죽하고 피어난 꽃이나 풀들을 닮은 그림이다. 그저 유희에 순응한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희란 아무렇게나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재미 삼아, 흥에 따라,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적(自適)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문예적 번안일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2004년, 최근의 그림들을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근작은 대부분 연꽃이 가득한 연못풍경이 화면이 되고 그 안에 줄기와 연대 등을 소재로 다양하게 축약된 형상, 선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추출되는 그림이었다. 자연에서 자연스레 선이 나오고 서예가 이루어지고 그림이 나온 역사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이 행로는 새삼 식물의 육신에서 그림을 다시 생각하고 가다듬는 호흡이 느껴진다. 자연에서 추출한 형상을 드로잉하고 있는 그림이다. 장지에 채색, 먹이 주로 쓰이고 콘테를 동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검은 색상의 변화와 뉘앙스가 독특하다. 바탕은 콩기름 막으로 처리한 것도 있다. 따라서 뿌옇고 흐린 듯한 분위기로 얼룩진 작업들이 더러 보인다. 그 그림들은 마치 영상적인 이미지의 흐름과 유동을 닮았다. 무척 감성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분명 연꽃과 연못이 소재가 되었지만 기호화된 산수의 느낌이 더 강하다. 산수화가 이런 식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편이다. 연못과 연꽃 하나에 깃든 자연과 생명체의 의미를 조심스레 바라본 이 시선은 그 안에서 산수화를 그려내는 시선으로 확장된다. 생과 사의 단락이 결정되는 장소에서 한 획의 시작과 끝을 가늠하는 모든 일들의 벌어지고 있음을 본다. 연꽃의 일생이, 삶의 주기가 순환하고 있는 장소가 그 연못이다. 수면을 경계 삼아 피어난 연과 그림자, 쇠락한 줄기와 스산한 잎사귀를 바라보는 일, 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동일한 관점이고 이는 다분히 전통적인 예술관과 동양적 사유관에 닿아있다.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소통하고 밖에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음이다.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이 서 있는 품은 멀리서 볼 것이요, 다붓하여 구경하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연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한다.”(주돈이)
서예가 일종의 기호이듯 유승재의 그림은 자연을 기호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선들이 짓는 다양하고 무궁한 변화 상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꽃이 보이고 사이사이로 나무와 집과 자동차, U.F.O 등도 있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연못과 연꽃사이로 만물상이 다 들어있다. 사물들은 마치 지도처럼 배열되어 있다. 모든 존재는 평면 안에서 모두 평등하게 펼쳐져 자존하는 것이다.
특히 작가는 연꽃의 모습을 보면서 온갖 선의 묘미를 추출해 낸다. 볼륨과 입체감을 지우고 오로지 선과 붓이 지나간 자취로 결정화된 연못 자연계는 다양한 생명체의 수런대는 소리로 부산하고 리드미컬한 선들의 자태, 다양한 색상으로 번성하다. 아울러 연꽃이 가득한 연못에서 벌어지는 만상을 모티브로 해서 동양의 선 맛과 자연에 대한 인상을 축소된 산수화 형식으로 번안하고 있음도 흥미롭다. 연꽃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다양한 형상과 선들은 더러 신기하고 경이롭다. 그 생김새를 따라가는 붓질, 작가 자신의 몸과 감각은 다름아닌 자연과 생명의 경외감과 신비감을 새삼 추체험하게 한다. 거기서 나온 선은 그 신비한 체험의 반응이다. 따라서 하나의 선을 긋는다는 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 존재의 모든 비밀을 다시 일러 받는 깨달음이자 학습의 차원인 셈이다. 동양화의 선,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담아내는 몸을 그리는 것’(寫形而寫神) 말이다. 무엇보다도 동양화는 선의 예술이다. 특히 서화는 선을 매개로 하는 데 있어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 모든 생명체가 지닌 기의 흐름과 운동을 포착, 이를 선으로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이 작가에게 중요한 관심사인 듯 싶다.
먹과 붓의 쓰임은 소박하고 어눌하다. 의도적인 이 고졸함이 종래의 멋들어진 필법들의 화려함을 은연중 잦아들게 한다. 어느 날 작가는 연꽃이 무성한 연못에서 자연을 상상하고 그 수런대는 활기찬 생명의 소리와 부산한 움직임, 온갖 미생물과 함께 섞여있는 연못의 안과 밖을 즐거이 떠올려보았다. 모든 자연계가 서로 연이어있고 존재의 사슬로 얽혀있는 것이다. 그 소리와 진동, 미세한 기운에 몸을 맡겨 선으로 따라간 것이 그림이 되었다. 밝고 경쾌한 색을 배경으로 혹은 어둡고 눅눅한 색상을 공간 삼아 가늘고 긴, 혹은 굵고 짧은 먹 선들이 음영을 드리우며 퍼지는가 하면 흡사 지렁이처럼, 뱀처럼, 바람처럼 지나간다. 그러다가 문득 멈춘 곳에 연꽃이 부풀어오르고 연잎이 머물러있다. 솟아오르다가 이내 구부러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연밥의 씨앗들이 팝콘처럼 터져 사방으로 퍼진다. 상형문자나 기호를 닮은 이 놀림들은 붓의 유희와 장난스러움, 유머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그 천진함이 이 작가의 미덕이자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