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옆에 위치한 저수지에 갔다. 뒷머리가 아프고 몸이 힘들어 바람을 쏘이고 싶었을까? 천천히 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차고 날이 추웠다. 어느덧 12월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몇몇 등산객들이 저수지를 끼고 산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침묵 속에 바라보았다. 이내 산은 사람들을 감추고 사람들 또한 자신의 몸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 수면은 더욱 차가운 물빛 색으로 완강하게 흐른다. 그리고는 오리 몇 마리가 서로 모여 고개를 날개 죽지에 파묻고 가만 떠있다.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마치 부표처럼 떠있는 오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겨울날 물가에 오는 사람들은 드물다. 난간에 기대 겨울 물가를 바라보는 이는 나 혼자다. 쇠락한 풍경 역시 온기를 잃고 앙상하게 헐벗어 보인다. 냉기가 자욱한 자연은 그만큼 숙연하고 적막하다. 절대적인 고요가 이 풍경을 느닷없이 비현실적인 그 무엇으로 변화시킨다.
<그러한 잠시 나는 한 해가 기울어 가는 시간에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내 잠잠해지기도 한다. 자잘한 파문을 닮은 마음과 생각들이 몸을 떠나 자기네들끼리 흘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있다.
그러한 잠시 나는 한 해 동안 부산했던 모든 일들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물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듯이, 시간 속에 소멸되는 모든 것들을 환생시킬 수 없듯이 말이다.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마원이 그린 물 그림이 생각난다. 그러한 잠시 동양의 ‘인물산수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물을 바라보는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흐르는 물을 가만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선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그런 그림을 그리고 감상했을까?
옛 사람들은 그림을 서재에 걸어두었다. 그들은 책에 눈을 파묻다가 행간을 지나온 눈들이 피곤에 지치고 시리면 그때 홀연 고개를 들어 그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생각에 잠기게 하며 깨달음을 주는 그림, 삶의 시름에서 순간 벗어나 자연을 소요하는 듯한 환영에 빠지게 하는 그림 말이다. 특히나 물은 순환하는 우주 자연의 이치를 고스란히 이어주는 메타포이기도 하지만 더없이 마음을 청정하게 다스리고 애욕을 가라앉히며 모든 시욕을 죄다 무로 돌려버리는 매력이 있다. 그렇게 바라보던 그림들이 선비들의 서재에서 즐겨 바라보았던 그림들이었을 것이다. 삶이 수양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을 그림들!

<순간 올 한해 내가 보았던 적지 않은 그림들이 떠오른다. 전시장에서, 작업실에서 혹은 도판으로 책자에서 이런 저런 이미지들을 만났고 그와 관련된 글을 읽었는가 하면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 몸 속으로, 기억으로 들어와 미술에 대한 생각의 덩어리를 부풀려주기도 하고 반성을 던져주는가 하면 부지런한 정진을 자책처럼 안겨주기도 했다. 많이 볼수록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그림 보는 눈 또한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올 한해 어떤 그림 앞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서있었을까? 무엇을 보았을까? 의무감에, 시급한 마감에 쫓겨, 또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글을 쓰기 위해 전시장을 찾고 급한 마음에 바삐 걸으면서 이미지들을 대충 눈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오래 머물 그림이 그만큼 부족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림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고 무척 빨라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주 게으른 독서와 한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는 감상이 이젠 드물어진 것이다. 그런 시간에 대한 죄의식과 부채감을 이 저수지의 수면을 오래도록 응시하면서 대신하고 있다. 바람이 불고 날이 더욱 차다. 주위는 어느덧 어둑해졌다. 저쪽으로 불이 하나씩 둘씩 켜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