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와 해체론에 의해서 생겨난 개념의 재편성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이는 서로 무관하고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립적이기조차 한 것들이 서로 만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계 자체와 그 세계를 명명하는 개념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개념으로써 세계를 재편하는 것으로 현상한다. 이때의 개념은 세계로부터 소외된 주관의 소산도 아니고, 또한 세계를 해명하는 객관의 산물만도 아니다. 오히려 주관엔 이미 그 속에 객관이 내포돼 있으며, 객관 또한 이미 그 속에 주관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관과 객관, 주체와 세계, 개념과 세계는 서로 맞물려 있다. 따라서 모든 과학적 사실, 실증적 사실은 나와 만날 때에만 비로소 그 존재와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렇듯 사실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다. 세계는 일단 내 속으로 불려 들어온 이후에 재차 내뱉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뱉어진 세계, 개념으로 덧칠된 세계는 그러므로 더 이상 순수하지가 않다. 공감할 수는 있어도, 공유할 수는 없는 세계인 것이다.


세계와 대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을 세계와 대지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 예술이란 바로 작품에다가 진리를 세우는 일로서, 이때 세계는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반면, 대지는 진리가 드러나지 않게 숨긴다. 여기서 진리 자체는 숨겨져 있을 때 진리인 것이며, 그것이 외부로 드러날 때에는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다. 또한 숨겨져 있는 진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외적으로 드러난 진리는 진리의 주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드러내기와 숨기기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조율에 있다. 숨김으로써 진리를 내장하는 한편,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에 내장된 진리는 최소한의 암시, 상기, 단서의 형태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진리를 매개로 해서 세계와 대지, 은폐와 비은폐, 드러내기와 숨기기, 그리기와 지우기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되는 긴장과 관련이 깊으며, 그 긴장을 통해서 예술작품 고유의 진리를 발견하는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어떤 고정된 물질적 실체이기보다는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의 상호작용성, 운동성, 역동성 자체로부터 암시되고 상기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정적인 실체이기보다는 현재진행형의 동적인 실체에 가깝다. 이러한 세계와 대지와의 관계는 예술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놀이
놀이는 그 자체 지켜야 할 룰 즉 약속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더 잘 즐기기 위한 자발적인 장치로서, 그 자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계기일 수는 없다. 나아가 놀이가 존재하는 의미는 오히려 이러한 룰을 깨는 데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사회에 그어진 온갖 금들, 금기와 터부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유형무형의 계기들을 거스르고 비트는 것에서 비롯되는 쾌(快)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놀이가 만나는 접점도 여기에 있다. 예술은 예술을 더 잘 놀기 위해서 예술 내부에 그어진 금들, 문법들, 규범들을 기꺼이 넘어선다. 비록 그 놀이가 새로운 금과 문법 그리고 규범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그 놀이가 예술을 해체시킬 지경에까지 이르게도 하지만 예술은 결코 놀이를 멈추지 않는다. 예술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르게는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라는 말과도 같다. 놀이가 예술과 삶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놀이는 삶에서 자기목적성을 벗어난 부분들, 잉여와 여분에 해당하는 성분들, 무의식적 욕망들, 진정 삶에 의미를 주는 것들에 접맥돼 있다. 그리고 삶의 이 부분이 예술과 통한다. 놀이는 예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체성
햄릿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절규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어떻게 이 인간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라고 절규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과 구토를 느낀다. 카뮈는 자신조차도 낯설어하는 이방인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하이데거는 자기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에 일방적으로 내던져진 존재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말라르메는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그리고 마침내 랭보는 자신이 공공연한 타자임을 인정한다. 이 모든 물음과 인식들 속에는 정체성이 내재돼 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다국적 문화, 이주, 이민, 국제결혼이 보편화되면서 더 일반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가상현실 속의 가상적 커뮤니티들은 국가와 민족의 물질적인 경계에 속한 개인의 정체성을 빠르게 변질시키고 해체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페르소나(퍼셔널리티)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정체성 논의는 결국 예술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접맥돼 있음을 말해준다.

<시간
시간에다가 물질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가시화 하는 것, 시간과 더불어 시간을 체험하는 것, 시간 속에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시간을 가로질러 그 흐름에 역행하는 것,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역류시키는 것, 시간을 휘저어 일종의 감각적 패닉 상태를 불러오는 것,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압축시키는 것, 시간을 비틀어 왜곡시키는 것, 시간을 고체와 액체 그리고 기체로서 결정화하는 것, 어떠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의 매개도 없이 시간을 그 자체로서 체험하는 것, 모든 결정된 감각적이고 개념적인 시간의 틀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 시간을 분절시키고 분쇄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시간의 부정을 통해서 시간을 긍정하는 것, 시간의 지양을 통해서 시간을 지향하는 것, 시간에 구멍을 내고 주름을 만드는 것, 시간을 매개로 하여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그리고 과대망상증적 징후를 실험하는 것, 시간을 욕망이 자기를 실천하는 도구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시간은 공간에 연속돼 있고, 공간은 개인의 실존에 연속돼 있다. 엄밀하게는 그 시간은 그 공간에 연속돼 있고, 그 공간은 그 개인에 연속돼 있다. 이처럼 그 개인에 연속된 그 시간과 그 공간은 공감할 수는 있어도 공유할 수는 없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다른 시간이며 다른 공간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실존적 시간, 개인의 실존적 공간은 자가 증식하는 박테리아와 리좀의 형태로 나타난다. 시간은 전통적으로 공간예술로 여겨지던 미술의 지평을 시간예술에로까지 증대시켜준다.


캐릭터
흔히 문학과 연극 그리고 영화에서는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캐릭터 중심인가 아니면 플롯 중심인가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결정된다. 여기서 캐릭터 중심은 주로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으로 나타나고, 플롯 중심은 작품 전체를 끌어가는 구조와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캐릭터가 중심인 작품에서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서사가, 그리고 플롯이 중심인 작품에서는 현실에 바탕을 둔 서사가 주요 동력이 된다. 따라서 캐릭터는 플롯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성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캐릭터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대변한다. 당대적인 문제의식과 시대정신을 상징하고 암시한다. 그리고 감각적 현실이 간과하고 있는 행간 읽기를, 억압적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이면 읽기를 요구한다. 이 독서 과정에서는 심지어 무의식의 읽기마저 요구된다.
캐릭터는 일련의 이러한 서사예술은 물론이고, 상품의 전략 속에도, 광고의 욕망 속에도, 그리고 나아가서는 스타쉽의 열광 속에도 있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시대에서의 캐릭터는 소비자의 욕망을 파고드는 심리적인 기제가 되고 있고, 따라서 캐릭터에게는 문화의 얼굴을 한 자본의 욕망을 퍼트리는 첨병의 역할이 주어진다. 이처럼 하나의 캐릭터에는 당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여러 이질적인 맥락들이 교차한다. 미술 역시 예외는 아닌데, 미술에서의 캐릭터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서사논의와 욕망이론으로부터 그 당위성을 얻고 있다. 캐릭터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여타의 물화된 인격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스트리트 퍼니처
거리의 가구라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가구는 실내 환경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인테리어와 인퍼니처 개념이 그것이다. 여기서 스트리트 퍼니처는 소위 아웃테리어와 아웃퍼니처 개념을 실천함으로써 가구의 범주를 실내 환경으로부터 실외 환경 곧 거리 바깥으로까지 확장한 것이다. 일상을 그 자체 잠재적인 예술의 한 계기이자 장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작게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설치하는 환경 조형물에서부터 크게는 도시 계획까지 아우른다. 이를테면 형형색색의 간판들, 지면에서 공간 위로 돌출된 육교와 다리와 고가도로, 지하철 출입구 지붕 장식(차양)과 환기구,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환풍기와 노랗고 파란 물탱크들, 그리고 나아가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 등 도시의 인공적인 풍경을 이루거나 도시의 인위적인 스카이라인 등을 광범위하게 포함한다. 이 가운데 특히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는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제 3의 사회와 장소를 의미하는 헤테로토피아 개념에 그 맥이 닿아 있고, 그 자체가 장소 특정적 개념과 함께 소위 도시 사회학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스트리트 퍼니처는 그 자체 하나의 결정적인 장르이기보다는 기존의 전형적인 장르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적 개념이고, 학제간(學制間) 개념이다. 사이와 경계 위에서 제 3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선 현재진행형의 개념이다. 굳이 말하자면, 도시계획과 사회공학 그리고 디자인이 하나의 경계를 축으로 해서 서로 맞닿아 있는 어떤 지점을 암시한다. 이는 스트리트 퍼니처가 야생의 자연환경 대신 인공적인 도시환경에, 그 중에서도 특히 거리와 가로 그리고 광장의 개념에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디자인은 파인 아트와는 구분되는 생활미술 혹은 응용미술이라는 좁은 의미로서보다는, 예술가의 사념과 관념 그리고 아이디어를 의미하던 본래의 더 폭 넓은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스트리트 퍼니처 개념은 순수미술과 삶의 현장성과의 경계를 허물어서 진정한 생활미술, 삶의 미술을 실현한다는 강력한 실천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스트리트퍼니처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여타의 환경조형 작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공원
공원은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점령한 회색의 도시 속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의 한 자락이며, 그 도시에 일말의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이며,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일상 속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온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요량으로 모여드는 쉼터이다. 쉼터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휴식을 위한 사적 공간도 아니면서(모든 사적 공간은 프라이버시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일상 속의 이해관계에 맞물린 공적 공간도 아니다. 공원은 이러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서로 면해 있는 공간의 특이한 위상을 말해준다. 또한 광장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공원에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자체로써 삶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공원이 그려 보이는 이러한 삶의 풍경은 도시공학의 샘플링을 위한 구실을 제공하며, 이는 그대로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공원이 특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가하면 최근에 공원은 노숙자의 삶의 터전(집)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공원은 예컨대 재건축 프로젝트처럼 현대미술에 나타난 장소 특정성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샘플이 되고 있다.

2004년 현대예술가협회 가을 세미나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