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2602
사람과 책
어린 시절 한달에 두어 번 들리는 화장품 외판아줌마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누추한 살림에 어머니의 화장품은 절박한 내핍 아래 소박했다. 어쩌다 벼르고 별러 하나를 사면 덤으로 샘플들을 잔뜩 얻곤 하셨다. 아주 작은 병에 든 그 샘플용 화장품을 애지중지 쓰시던 어머니의 빈한한 화장대가 슬프게 떠오른다. 그 옆에 함께 얻은 하얀 가재손수건도 가만히 부감된다. 지금도 나는 그 하얀색 가재손수건이 강렬하게 추억된다. 어머니의 눈물을 찍어 바르던 손수건, 내 콧물을 닦아주던 손수건 말이다.
정작 내가 화장품 외판 아주머니를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니라 화장품 선전책자 때문이었다. ‘향장’이나 ‘쥬단학’ 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작은 책자의 표지에는 항상 화가들이 그린 여자얼굴이 가득했다. 당시 이름 있는 화가들이 사실적으로 잘 그린 인물화였다. 나는 그 표지에 실린 그림들을 하나씩 모아 스크랩을 해두고 즐겨 감상하기도 하고 가끔씩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화장품 선전 책자의 표지가 당시 내가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시/책이었던 셈이다. 그런가하면 달력에 실린 인상파화가들의 풍경화나 정물화, 인물화 또한 그랬으며 아버지가 보시던 ‘현대문학’의 표지그림이 그러했다. 나는 그 책과 달력을 통해 비로소 그림에 관심을 갖고 불충분하나마 그림 수업을 하곤 했다. 사실 그때부터 그림이 들어간 인쇄물이나 지난 달력, 책표지 등을 부지런히 수집하는 한편 미술관련 책자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고 이에 대한 글을 쓰는 미술평론가가 되었다.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화장품 책자와 달력을 어렵게 구해보고 애써 이를 따라 그리던 내가 지금은 비교적 여유 있게 다양한 미술서적과 도록을 사서보는가 하면 직접 책을 써내고 있다. 가끔 나는 어린시절 그림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 주던 그 향장과 쥬단학이란 잡지를 그리워한다. 그러니까 그 잡지의 표지들은 전시장을 대신해서 내게 그림을 보여준 최초의 공간인 셈이다. 동시에 최초의 미술서적이기도 했다.
우리가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전시장에 가야 한다. 전시장은 그런 면에서 이미지가 서식하고 있는 공간이자 이미지가 책처럼 진열되어 있는 서점에 해당한다. 우리는 전시장에 가서 내 눈앞에 실재하는 이미지들을 감상하고 이를 가슴에 담아둔다. 전시장에 가지 않으면 작품을 만날 도리가 없다. 시간이 없거나 형편이 안 될 경우 사람들은 대신 화집이나 미술 책자를 사본다. 이제 그림은 납작한 종이에 축소, 굴절되어 인쇄되었다. 본래 이미지가 살고 있던 장소에서 떨어져 나와 책이란 형식 안으로 편입되어 온 것이다. 모든 이미지들은 이제 책 속에서 불사와 불멸의 삶을 살게 되었다.
원래 미술관이나 화랑 혹은 다양한 공간에 전시되는 미술작품들은 특정한 전시기간 동안 의 유한한 생애를 살고 있다. 박물관 등에 상설 전시되는 작품이라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가 된다. 또한 미술작품들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멸되고 사라질 것이다. 대신 책이 살아남아 그 이미지를 온전히 저장해주고 있다. 연장된 전시, 혹은 영원히 봉인된 이미지의 저장소가 미술책, 화집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란 직업으로 인해 나의 일과의 상당부분은 이른바 전시장이란 곳에 있는 그림을 보러 다닌다. 인사동이나 사간동이 주로 다니는 장소다. 그곳에 가면 꽤 많은 전시장들이 도열해있다. 길가에 혹은 골목에 납작하게 엎드려있는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던가? 전시를 둘러보면 인상적인 이미지가 있게 마련이다. 기억 속에 가만 가둬두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기억할 수 없다. 그때 내 눈과 마음을 구원해 주는 것은 전시도록이다. 물론 전시장에 나온 작품 모두가 도록에 실려 있지는 않지만 몇 개만이라도 도판에 실린 이미지를 통해 나는 전시장에서 느낀 감흥이나 인상을 비교적 오랫동안 내 것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모은 전시도록이 수천 권은 족히 될 것이다. 반면 전시도록은 본래의 작품에서 무척 많이 왜곡되고 변질된 것이다. 크기가 무화되고 작품의 질감과 공간에서 직접 만날 때의 분위기와 느낌이 사라진 상태며 아울러 사진 및 인쇄상태에 따라, 종이의 질과 보관상태 등에 의해서 무척 다른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미술책 또한 부득이 그런 아쉬움에서 자유로울 수 는 없다. 앙드레 말로가 지적했듯이 사진인쇄로 인한 미술책의 등장은 전시공간과 미술작품의 운명과 위상을 완전히 탈바꿈 시켜놓았다.
그러나 분명 미술책의 등장은 수많은 대중들에게 이미지를 좀더 가깝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키는데 꽤 큰 영향을 끼쳤다. 미술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이미지가 일상 삶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동시대에 미술서적, 혹은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자리한 책들이 부쩍 많아졌는데 이는 그만큼 미술에 대한 관심의 보편화 및 미술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의 이미지 향유에 대한 욕망이 그만큼 강렬해지고 일반화되었음을 증거한다. 현재 미술관련 서적의 출판은 이전에 비해 가히 급성장했다. 매주 새로운 미술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미술아카데미나 관련 교양강좌 등도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다. 신문 문화면에는 어김없이 한 주간의 볼만한 전시소식도 실린다.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샤갈전시에는 기록적인 인파가 몰렸다. 이제 미술전시도 일종의 불록버스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 같기도 하다. 전시관람과 미술서적의 독서는 우리시대의 중요한 문화가 된 것 같다.
서양미술사나 미술을 대중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책자도 그에 비례해 부쩍 늘었다. 다양한 미술전공자들이 필자로 등장함과 동시에 타전공자들 내지는 일반인들도 미술관련 책들을 다채롭게 펴내고 있음을 본다. 미술사가나 미학자, 평론가는 물론이고 미술관 관장, 화가, 법학자나 의학자, 국문학자, 불문학자, 사학자 및 소설가, 시인, 주부 등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와 작품에 대해, 즐겨본 그림들에 관한 에세이를 써내고 있다. 아울러 자신의 전공과 관련지어 이미지를 읽어내고 이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왜들 이렇게 이미지에 대해 말을 건네고 글을 쓰고 싶어 할까? 이미지를 보고 감상하고 그에 대해 말을 건네는 행위가 오늘날 중요해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져본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이미지가 모든 사유의 중심대상이 되었던 것도 흥미롭다. 가장 영향력 있는 푸코나 바르트, 데리다, 들뢰즈 등의 철학가들은 한결같이 이미지에 대한 중요한 글들을 쓰고 이에 대한 사유의 확장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견인해나간 자들이다.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의 분석을 통해 서양미술에서의 재현의 문제를 다루었는가 하면 바르트는 사진이미지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한 통찰(카메라 루시다)을 남겼으며 아울러 사이 톰 블리, 앤디 워홀의 그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글을 썼다. 데리다의 시선에 관한 글, 들뢰즈의 프란시스 베이컨 회화에 관한 분석 등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들이 탈모던 사유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이들의 저서를 통해 이미지가 단순히 미술영역에 국한되거나 미술사나 미학의 범주에서만 머물지 않는 매우 중요한 사유, 철학, 인문학의 대상임을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미술비평과 만화에 관한 뛰어난 글을 남긴 불문학자 김현이 바로 그 선두에 서있었다. 이런 현상은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자극이 되며 고무적인 현상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영역의 전공자들이 보여주는 미술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이해를 통해 미술은 확장되고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아울러 일반대중들에게 미술을 쉽게 이해시키고 교양적인 차원에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는 도서의 출간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도 같다. 현재 나온 책들은 한결같이 서양미술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한편 이른바 걸작, 명화라고 일컬어지는 유명한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에 대한 교양적 수준의 글들을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이다. 상당수 글들이 다소 피상적이고 소박한 상식의 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지나친 감상주의에 물들고 있다. 이는 미술을 여전히 신비주의적이며 순수주의적 관점에서 다루는 한편 철저히 서구미술중심주의에 사로잡힌 관점을 무의식적으로 노정한다. 동시에 미술 감상을 틀 잡힌 이론이나 정형화된 해석에 갇힌 체 바라보게 한다. 자기 눈으로 보기 보다는 책에서 다룬 내용을 주입해 그 잣대로 그림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감상체험과 무관할 수 있다. 누가 그렸고 어떤 그림이며 그를 둘러싼 연예담이나 소소한 에피소드가 마치 그림감상의 절대적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상업적인 출판시장의 추이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번 쯤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미술에 대한 이해,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의 균형 잡힌 시각, 오늘 우리에게 미술이란 무엇이며 어떤 작품이 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등이 흥미롭고 잘읽히는 문장으로 쓰여진 그런 책들이 좀더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분명 여러 우려가 존재하긴 하지만 근자에 좋은 책들이 무척 많이 출간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책꽂이는 한 주만 지나면 신간 책으로 그득하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미술책이 부재했던 시절, 그래서 ‘향장’의 표지를 기다리던 유년을 추억처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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