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환경을 통해 본 현대미술
조형예술에 있어서 빛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매체미술 이전에 조형예술가들은 색채를 매개로 해서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써 빛을 표현해왔다. 그러니까 자연광에 대한 감각적인 재현과 함께, 종교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밝혀주는 성스러운 빛의 형태(이는 특히 이코노그래피 즉 종교적인 도상학에 나타난 성인의 후광과, 마치 천상의 빛을 대면한 듯한 중세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의 실체를 암시해주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빛의 형태로 현상했다. 이후 인상파에 와서 색채란 다름 아닌 빛에 연유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빛에 대한 형식실험이 그 진정한 근거를 얻게 된다. 그런가하면 이후 각종 매체를 도입한 영상미술에서 빛은 조형예술가가 자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한 요소로서 자리 잡는다.
현대미술에서 빛은 물질적이고 조형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로서 나타나기도 하고, 무의식과 욕망 그리고 영적인 존재와 같은 비감각적인 실체를 상징하고 암시하는 의미론적인 요소로서 현상하기도 한다. 이는 여러 형태의 조명기구, 네온과 레이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 발광성 소재를 아우르며, 나아가 모니터나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 자체를 빛의 한 형식으로 보기도 한다.
빛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총 21명의 영상매체 설치작가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빛은 때로는 질료의 한 요소로서, 그리고 때로는 의미론적인 한 요소로서 나타난다. 물론 영상 자체를 빛의 한 형식으로 본 경우도 있다. 빛의 성질 자체를 겨냥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주제의식을 풀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빛을 도입한 예가 많다.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우선 김태곤, 채미현과 닥터 정은 빛 자체의 성질을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김태곤(은하수)은 빛을 반사하는 수백 가닥의 실을 설치해서 일종의 가상적인 은하수를 연출하고 있다. 은하수는 어둠 속에 흐르는 빛의 줄기 혹은 다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채미현과 닥터 정(생명의 빛)은 레이저를 소재로서 도입하고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의 예기치 못한 비정형의 운동성을 수반한 레이저의 불빛을 통해 인간존재가 내재한 생명력과 그 삶의 몸짓을 형상화한 것이다. 관객들은 이를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방법으로서보다는 직관적이고 즉물적인 방법으로써 추체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둠 속에서 발하는 빛 자체가 생명의 한 형태로서 제시된 것이고, 이는 그대로 태초의 빛, 시원의 빛, 근원적인 빛으로 어필된다.
레이저의 이러한 도입은 이한수의 작업(달리에 대한 경의)에서도 나타난다. 달리의 수염과 외계인의 귀를 가진, 가슴에 구멍이 뚫린 형광 불상이 블랙라이트가 켜진 공간 가운데에 놓여 있다. 공간에는 레이저가 설치돼 있고, 이로부터 마치 부처의 후광과도 같은 다양한 문양들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불상 곁에는 일종의 변형 비너스와 함께, 비너스의 상반신과 곰 인형의 상반신이 결합된 변종 비너스가 누워 있다. 변형 비너스를 관통하는 수 개의 노랑 형광등이 불안전하게 깜박이며, 달리의 환상과 불안한 악몽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달리를 주제로 한 3D 애니메이션이 빔프로젝터를 통해 벽면에 투사된다. 부처와 변형 비너스와 같은 각종 모조 조각상, 레이저 광선과 형광불빛, 그리고 3D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작가의 작업은 환상적인 빛의 효과를 연출해내는 한편, 보는 이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 기묘한 꿈의 세계와 만나게 한다.
그리고 빛은 여성적인 감성의 공간을 연출하거나, 생명체의 비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도입되기도 한다(김지혜, 이은숙). 김지혜(만져지는 빛)는 도기를 소재로 하여 각종 과일과 꽈리 모양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그 속에다가 전구를 내장해 천장에다가 매다는 방법으로 설치했으며, 이는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형형색색의 불빛들로 나타난다. 이로부터는 촉각적인 빛, 감촉 되는 빛, 환상적인 빛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 빛의 성분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이성에 대한 상징의 한 형식으로서의 빛이기보다는 여성적인 감성의 공간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은숙(생명체)은 투명한 폴리에스터를 소재로 하여, 그 속이 비어 있는 구조물을 만든다. 막대 모양의 구조물을 기본 모듈로 하여 이를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연이어진 비정형의 구조물 속에다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 발광성 소재의 형광섬유 조각들을 마치 패치워크처럼 덧댄다. 블랙라이트로부터 발하는 은근한 빛(거의 어둠에 가까운)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는 이 구조물들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 분열하고 증식하는 원형생물의 세포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생명체의 비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그 비감각적인 존재에다가 일정한 형상화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문주의 작업(여명의 풍경)에서 빛은 고도로 미니멀한 형식 속에다가 일종의 암시적인 풍경을 함축해낸 형태로서 나타난다. 작가는 나뭇잎 모양을 투각한 알루미늄 박스 속에다가 붉은 빛을 내는 LED를 내장했는데, 이때 LED로부터 발하는 빛 자체는 매체 특유의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그리고 차가운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는커녕 그 빛은 오히려 해질녘의 어스름하고 은근한 빛을 닮아 있으며, 또한 그 빛으로 붉게 물든 나뭇잎(문양)에서는 가을의 조락한 낙엽이 느껴지기조차 한다. 이 빛에 비해서 알루미늄 박스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매체 자체로부터 발하는 인공적인 빛과 알루미늄의 물질성을 대비시킨 이 작업에서 작가는 미니멀리즘의 형식논리와 전통적인 재현의 논리가 만나는 접점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그리고 양만기의 작업(관계의 언어)은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묻는 물음에 맞닿아 있다. 작가는 보통사람들을 소재로 한 일종의 집단 초상화를 보여준다. 순수한 영상으로 나타난 이 집단 초상화에서 작가는 이질적이고 다중적인 언어체계(예컨대 아날로그 언어체계와 디지털 언어체계와 같은)간의 소통가능성을,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가능성을 회의한다. 그러니까 주체 혹은 타자가 비감각적이고 비물질적인 디지털의 체계로 나타나고, 질료적인 근거가 희박한 순수한 영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그 실체가 없는 주체간의 대화는 그대로 가상현실 속의 익명적인 주체간의 대화와 통하는 것이다.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관계의 망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접촉을 결여한, 그 자체 불완전한 방식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강애란(디지털 북 프로젝트)은 책이 꽂혀 있는 서가의 이미지를 실사로 보여주는 디지털 프린트를 벽면에다가 설치한다. 이때 거의 실물 크기로 재현된 이미지가 실재감과 함께, 가상현실 속의 버추얼 공간을 암시한다. 이 이미지를 배경으로 해서 또 다른 벽면에다가 각각 그 속에 자기 발광성 소재를 내장한 투명 폴리로 떠낸 책장정본들을 설치한다. 이를 통해서 정보의 형태로 압축된 책, 감각적 질료를 결여한 책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의 달라진 책의 존재 의미와 그 위상을 묻는다. 그 이면에는 켜켜이 중첩된 시간과 역사의 단층이 놓여 있으며, 책들이 내장한 은근한 조명이 그 흔적(아우라)을 머금고 있다.
김영진(유체)은 작가 자신이 직접 고안해 만든 프로젝터로부터 스크린에 투사된 액체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물처럼 점성이 없는 액체와 글리세린처럼 점성이 있는 액체가 서로 침투하기도 하고 서로를 밀어내기도 한다. 느리게 흐르는 물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물길을 만드는가 하면 빠르게 흐르는 물이 화면 바깥으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물방울들이 모여 화면을 팽창시키는가 하면 미세한 물 입자들로 흩어져 화면에 얼룩을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치 정적이기도 하지만 물은 한순간도 정지해 있는 법이 없다. 그리고 한순간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 자체는 시간을, 그 속에 생명을 잉태한 양수의 이미지를, 모든 존재가 기원한 원형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존재의 원형과 존재의 상처(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쾌락의 음료(주이상스)와 같은 인간의 언어로는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젬마는 사방이 온통 지퍼로 된 벽으로 막혀 있는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공간 안쪽 벽을 스크린 삼아 영상을 투사한다. 공간 안쪽에 영상이 상영되고 있고, 그 영상은 벽에 의해 외부 공간과 단절된 것이다. 말하자면 영상은 드러내 놓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은밀하게 드러나도록 설정된 셈이다. 이렇게 숨겨진 영상은 지퍼를 열어 그 틈으로 볼 수 있도록 관객을 유도하며, 이러한 설정 자체는 관객을 일종의 훔쳐보기와 관음증의 주체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그 주체는 지퍼로 열린 틈을 통해서 명화 속에서 차용된 여자 누드의 연속적인 이미지들을, 그리고 또 다른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는 무수한 눈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포르노그라피에서 채집된 신음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지퍼로 된 벽 자체는 이중적이다. 외부와 통하면서 단절된, 보여주면서 은폐된 그 벽은 공간을 일종의 사적인 방, 무의식의 방, 욕망의 방으로 탈바꿈시킨다.
김창겸(섬)은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싱글채널비디오를 내놓고 있다. 섬을 여행하면서 느낀 나른하게 흐르는 시간과 따사로운 햇빛을, 그리고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간 경험을 기록했다. 삶의 현장을 기록한 일종의 기록물이면서, 이와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심영철(기념비적 정원)은 인공적인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표면에다가 영상을 투사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신의 성전을 재현한다. 마치 무대 장치처럼 설정된 이 설치작업에서 신의 성전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는 그리스도의 초상을 중심으로 해서, 그 좌우에 불기둥이 타오르고 있는 형태로 현상한다.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여러 형태의 가시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불기둥은 출애굽기에 나타난 신의 현신을, 그리스도의 초상은 인류의 죄를 대신한 희생양(희생양에 대해서는 고대의 희생제의에서 그 전범을 만날 수 있다)을,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가시관들은 천국에서 주어질 보상을 각각 상징한다. 이로써 작가는 일종의 종교적인 도상학을 실현하고 있다.
박성태는 그 결이 미세한 알루미늄 망사를 소재로 하여 여러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형상을 떠낸다. 이로써 그 속이 비어있는 껍질로 화한 인간군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형광물질과 블랙 라이트를 이용해 설치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진정한 존재와 그 실체를 묻는 한편, 생성과 소멸, 실상(실제)과 허상(허구)과의 미묘한 경계를 다루고 있다. 그 이면에는 불교에서의 공(空) 개념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공 개념은 단지 감각적으로 비어있는 것으로 인식될 뿐, 실제로는 그 속이 꽉 찬 충만 공간인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는 비감각적 개념으로서, 존재론적 개념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존재를 일종의 껍질 혹은 허물로 이해하고 이를 조형화한 경우는 서상호(신세계를 꿈꾸며 만들었다)의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작가는 한지를 조형화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긴 팔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팔들을 손이 아래쪽을 향하게끔 천장에다가 매달아 설치했다. 내용물이 없는 껍질뿐인 빈손들이 그 실체를 결여한 공허한 주체, 익명적 주체를 떠올리게 한다. 공간에 설치된 늘어트려진 손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주술적이고 명상적인 계기로 유도하며, 공수래공수거 즉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의 비의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메디컬아트로 범주화할만한 작업들도 있다(박지은, 한기창). 박지은(낭만적 치유)은 그 속에 조명을 내장한 다양한 형태의 등을 소재로 하여 정신적인 치유에로 유도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천을 소재로 하여 알약이나 캡슐 형태의 의약품을 본떠 만든 부드럽고 유기적인 등으로부터 발하는 은근한 빛이 우호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각종 의약품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질병과 치유, 중독과 해독, 결벽증과 공포증과 같은 신체를 매개로 한 생물학적 위생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부드러운 조각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한기창의 <뢴트겐의 정원>은 치유라는 주제의식에 접맥돼 있다. x선 필름을 이용하여 인체와 동물 그리고 식물의 이미지를 재구성한 콜라주 작업으로서, 이를 그 속에 조명을 설치한 라이트 박스와 결합하는 형식으로 설치했다. 여기서 x선 필름에 투사된 뼈는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를 조합하여 재구성해낸 인체와 동식물의 형상은 삶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죽음의 이미지와 삶의 이미지, 죽음 충동과 삶의 충동,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에서 바니타스(인생무상)를 넘어서는 화해의 몸짓이 읽혀진다. 이렇듯 이 작업은 죽음의 계기 속에서 삶의 계기를 찾는다는(뼈를 찍은 x선 필름들을 조합하여 유기체를 재구성해낸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려 있는 순환론적 자연관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발광(發光)하는 유기적 형태가 이런 순환론적 자연관에다가 일말의 존재론적 아우라를 더한다.
그런가하면 이번 전시에서 이상현과 금중기는 연출된 사진작업을 내놓고 있다. 이 가운데 이상현의 <자아이탈적 명상>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자아이탈에 대해서 명상 중인 작가 자신의 초상사진을 보여주며, 이는 그대로 자기 정체성 물음에 맞닿아 있다. 여기서 자아이탈은 진정한 나로 부를 수 있는 실체에 대한 회의로 나타나고,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여장한 남자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남자이면서 여자이기도 하고, 여자이면서 남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넘나드는 나는 누구인가. 남자와 여자란 한낱 사회, 제도, 관습이 개인에게 요구해오는 정체성의 이름, 그 실체가 없는 이름(허명)일 뿐이 아닌가. 작가의 초상사진은 이러한 자기 외부로부터 호명된 정체성의 요구로부터 떠나있을 때 비로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진정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금중기의 작업(느슨한 충돌)은 사진과 설치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 이면에는 일종의 신화적인 상상력, 문명사적인 상상력이 깔려 있다. 가방과 목마 그리고 양철로 만든 물뿌리개와 같은 손때가 묻은 물건들, 자동차 미니어처와 소화기와 같은 인공물들,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불려나온 듯한 로봇과 캐릭터 인형들, 마치 박물학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 미니어처들, 여기에다가 먹다 버린 사과와 같은 유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질적인 사물들이 우연적으로 결합한다. 앤틱적인 감수성과 팬시적인 감수성이 충돌하고, 자연에 속한 것과 인공의 산물이 부닥친다. 이 모든 이질적인 것들의 우연한 결합 자체는 상호간 영향사에 바탕을 둔 문명의 생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로부터 시간(역사)의 흔적을 보는 듯한 시적인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외에도 이윤아(가상 혹은 실제)는 눈이 부실 만치 하얀 도기로 만든 돌고래 소 조각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돌고래 조각을 가는 철봉을 이용해 공중에다 띄워 마치 돌고래들이 떼지어 바다 속을 유영하고 있는 듯한 장관을 연출해낸다.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바다 속 풍경을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채송화(여정)는 마치 수조를 연상시키는 철제로 된 사각 박스를 만들고, 이를 골격 삼아 그 내부를 가녀린 철사로 얼기설기 연결한다. 그리고 철사의 망에다가 전구를 설치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물고기 모양을 재현하고, 그 바닥에는 원형을 그리며 촛불들을 설치했다. 여기서 철제로 된 사각의 틀은 삶을 상징하며, 그 가운데 걸려 있는 물고기 형상은 그 삶을 살아내는 주체를 상징한다. 그리고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있는 줄은 그 주체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예기치 못한 인연을 암시한다. 이로써 작가는 하나의 주체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나 그 여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영호(명상 - 아우라)는 철을 용접해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써 실물 크기의 나무를 재현했다. 그리고 그 속에 조명을 설치해서 이음새의 벌어진 틈으로 가녀린 빛이 새어나오게 하는 한편, 그 빛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레이저의 산발적인 빛에 조응하게 했다. 이때 나무로부터 발하는 빛의 줄기는 나무가 내재한 영적인 기운을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신목을 형상화한 것이고, 그 이면에는 모든 존재에 깃든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범신론과 물활론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다.
이번 전시는 빛을 주제로 한 전시와 함께, 야외 공간을 배경으로 한 전시도 열렸다. 환경을 주제로 한 이 전시에는 총 9명의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이는 여러 다양한 형태의 환경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환경의 한 요소로서 빛을 도입한 작업도 있고, 본격적인 환경조형물의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 그 면면을 보면 오상욱(빛의 정원)은 그 속이 빈 기둥 속이나 기둥 위에 다양한 형태의 네온을 설치 조형하는 방법으로써 흔히 천편일률적이고 무미건조하기 마련인 가로등에다가 다양한 표정을 부여한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금속 질감과 네온이 발하는 빛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구조물이 빛의 기둥으로 재생된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환경인만큼 자연을 소재로 한 작업들이 많다(오세문, 장진연, 황남진, 송운창). 우선 오세문(나무)은 직선과 원으로 나타난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의 스테인리스스틸 구조물에다가 네온을 결부시키는 방법으로 나무를 형상화했다. 나무의 감각적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에 이를 최소한의 형태로 구조화한 작가의 조형물은 일종의 환원주의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이는 소재 특유의 강한 물성과 함께 미니멀하면서도 기념비적인 인상을 준다.
또한 장진연(꽃)은 꽃이 봉오리를 열고 그 속의 수술과 암술을 힘차게 밀어 올리는 형상을 통해서 생성과 생명으로 나타난 봄의 이미지를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황남진(합으로부터 - 생명)은 생화로 꾸며진 정원 속에다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조형화한 인공의 선인장을 배치해 이를 대비시킨다. 자연 소재와 금속성의 인공 소재가, 유기체와 무기물이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진정한 생명이란 다름 아닌 이질적이고 대비되는 것들의 조화(합)로부터 비롯되는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송운창(물 - 검룡소)은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써 평면성이 강한 입체설치조형물을 내놓고 있다. 물을 소재로 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물 자체를 조형화하기보다는 물을 쏟아내고 있는(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판들을 중첩시켜 늘어트리는 방법으로 암시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의 수도꼭지 형상을 재현함으로써 이를 우회적이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이며, 이는 특히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검룡소라는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과 만나면서 그 의미가 강화된다.
이와 함께 권치규에게서 환경은 <도시에서의 삶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그 표면을 채색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구조물을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시키는 방법으로써 도시의 기하학적인 풍경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 구조물에다가 인간의 체형을 모티브로 한 형상을 투조 형식으로 결부시켰다. 여기서 인간은 서로 단절된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관계의 매개체로서, 그리고 주체가 속해 있는 세계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연결하는 소통의 매개체로서 드러난다.
그리고 권석만(내면의 집짓기)은 탑을 재해석한 집 모양의 철 구조물 내부에다가 조명을 설치했다. 동양적인 이미지와 모던한 건축 이미지를 결합하는 방법으로써 일종의 내면에 떠오른 집을 지은 것이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는 직립의 구조물이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어주는 세계의 축(世界樹)을 암시하며, 이는 조형물에다가 일종의 기념비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박근우(재생)는 그 표면이 편평한 큰 돌 다섯 개를 오각형(원형의 변형된 형태)의 형태를 이루게끔 배열하고, 각 돌의 가운데를 갈라서 그 벌어진 틈으로부터 빛이 새어나오게 했다. 여기서 오각형이라는 포맷 자체는 전래하는 오방(동서남북과 가운데를 포함하는 오방은 곧 세계를 상징한다)의 상징적 의미를 떠올리게 하며, 그 자체가 세계의 중심을 가정한 제단을 상기시킨다(모든 제단은 세계의 중심이다). 돌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줄기가 제단의 영적인 환기력을 강화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작가는 각 돌의 표면에다가 인간의 지문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는 돌에다가 인간의 존재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철판을 접붙여 만든 하유진의 구조물은 다양한 형태로 읽힌다. 즉 그 구조물은 마치 지상에 착륙한 우주선 같기도 하고, 그 자체가 중심성이 강한 구조와 함께 높이 치솟은 형태로 인해 불을 밝히기 위한 제단 같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마치 긴 다리를 가진 거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여러 이질적이고 다양한 의미들이 교차하는 다원적인 형태를 통해서 작가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염원과 함께,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만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