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2004년만의 독자한 흐름이나 특정한 경향, 주목할 만한 기류가 있었냐 하면 그렇지는 못하지만 아무런 움직임이나 의미도 없다고 할 수는 분명 없다. 인상적으로 얘기하자면 동양화 분야의 모색들이 좀 더 활발하고 중요한 보폭들이 있어왔으며 전통에 대한 해석들의 발랄함과 연결고리에 대한 모색이 주목된다. 필자로서는 몇몇 동양화 전공자들의 발랄하고 신선하며 유쾌할 정도의 보폭과 그 결과물들을 흥미롭게 만난 한 해였다. 서양화 분야는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다소 침체된 느낌이다. 젊은 작가들의 회화작업은 손의 수고로운 노동과 개념적 성찰, 회화와 관련된 여러 물음들을 던지고는 있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이야기되거나 실험된 것들을 은연중 끌어들여 자기 고민인 것처럼 늘어놓는 제스처가 아쉬웠고 다소 무모해 보이는 극사실주의(새로운 포토리얼리즘인가?)로 회귀하면서 정작 회화의 초점, 그리는 이유를 잃어버리는 회화작업도 양산된 한 해였다. 그리고 추상보다는 구상, 형상화가 우세한 한 해였다.

그런데 그간 회화의 복원이 이야기되고 주목받으니까 이를 오로지 열심히, 공들여 그리는 손의 노동과 기교로만 버무려내려는 자세들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를 마치 진정한 회화의 복원과 미덕인 양 이야기하는 평론이나 큐레이터, 전시 기획자 들의 안목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유사한 작업들이 덩달아 양산되고 들떠 있는 지경이다. 분명한 가늠과 질적 판단, 차별이 절실하고 필요해졌다. 덧붙여 말하자면 최근 나름대로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의 회화작업 상당수가 외국의 유명 작가들의 회화를 유사하게 끌어들이고 있는 경우도 자주 본다. 특히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작가들의 페인팅이 그런 경우다.

꽤 몇 년 동안 ‘회화의 부활’이 많이 회자된 것과는 달리, 정작 A급 회화 작가는 드물더란 평이 중론이다. 이는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그러니까 최근 부쩍 회화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고 있고 이를 테마로 다룬 전시들이 줄을 잇고 여러 작가들이 새삼 회화에 몰두하고 이를 전시로 부단히 내밀고 있긴 하지만 딱히 성과로, 혹은 한국 근ㆍ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진전된 변모를 보여주는 작업을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좀 더 분발이 필요한 대목이다.

1. 회화

올 한 해 회화 분야에서는 유독 이 손의 노동과 기교에 대한 주목과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개념적인 회화, 신체와 회화의 관계 등에 대한 주목, 역설적으로 영상과 테크놀로지 시대에 손의 회복 등과 맞물린 측면도 있고 침체된 미술시장에서 여전히 상품성을 지닌 회화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이재삼(2.4~29, 갤러리 도올)의 그림은 그리기와 손의 미덕 혹은 매력들이 진부하거나 상투화되지 않으면서 경이롭게 환생한다. 측량하기 어려운 시간의 누적이 잠재되어 있는 화면은 오로지 한 인간의 손, 육체가 그 시간에 그만큼 그려놓은 과정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색상과 묘사에 힘입어 결정화되어 있다. 그는 목탄화를 회화 자체로 격상시킨다. 그로 인해 기이한 명상의 세계, 환상이 가득한 자연/대숲이 펼쳐진다. 새삼 이 컬러와 영상 시대에 흑백의 손으로 공들여 그린 회화를 선사하면서 기이한 정신적 비경으로 유인한다. 동일한 맥락의 작가가 바로 오병욱(5.7~29, 스타타워갤러리)이다. 그는 가로로 길게 이루어진 캔버스 화면에 물감을 무수히 뿌려 올린 자국으로 바다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자잘한 점들이 부딪치고 흐르고 엉긴 자취들, 요철을 이루는 물감의 덩어리들이 얹혀진 하단이 어느덧 하늘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붓의 방향과 각도를 달리하면서, 물의 농도를 조율하면서 뿌려지고 그렇게 섬세하게 밀착되어 올려진 입자, 점들이 모여 이룬 이 바다는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한 개인의 섬세한 신경줄과 섬약할 정도의 민감한 정신의 지진계로 포착한 이 바다의 풍경은 전적으로 빛과 색에 의지해 드러난다. 빛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 작가의 관심은 재현 대상이 아니라 빛 자체이며, 그 상황의 체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명하고 극복해보고자 하는 것 같다. 자연을 통한 그 같은 접근은 김보중(9.8~24, 덕원갤러리)에 의해서도 발견된다. 숲과 사람의 심장, 혹은 또 다른 존재가 겹쳐진 그 그림은 초상이 겹쳐 있는 숲이나 나뭇가지들이 뒤얽혀 성애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비롯하여, 숲 자체가 몸의 일부처럼 보인다. 신체 내외부의 기관들이 걸쳐 있는 숲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몸 풍경이 되는데, 그의 작품에서 몸은 ‘세계를 형성하는 재료’가 되는 식이다. 아울러 바탕그림과 오려붙이기로 이루어진 이중적인 화면은 서로 일치할 수 없는 것들, 가령 실재와 상상, 신체 내부와 외부 공간, 밤과 낮의 시간대를 공존하게 하는 동시에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을 통해 그의 풍경화는 평화롭고 감상적인 관조보다는 불편함과 낯섦, 긴장감을 조성한다. 또한 여러 차이와 갈등, 교차가 이루어지는 장이기도 하다. 흡사 영성(靈性)이 내재된 듯한 그의 풍경에는 신성한 힘으로서의 종교성이 내재한다.

서용선(6.11~7.18, 일민미술관/6.15~26, 노화랑)의 그림은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에 근거해온 작가의 관심사에 대한 지속적인 천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오브제와 조각, 설치의 문맥으로 표현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 시대에 ‘신화’와 사라진 ‘역사’의 의미가 어떻게 유효하게 복원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의 이미지들은 ‘과거의 허구적 아이콘의 복구나 회상의 범주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밑그림, 가이드라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이미 그려진 이미지의 역사를 해체하여 화면에 재구축, 재조립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주입적 학습의 기억과 관성의 비틀기’를 시도하고, 신화나 역사에 관련된 단편적 자료와 기록을 상상적 비약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미술계에서 찾기 어려웠던 ‘서사성’이 강조되는가 하면 김선일 씨의 죽음과 이라크전 파병 반대 등으로 고조된 전쟁에 대한 관심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신화 등 이야깃거리도 풍부하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어쨌든 그의 회화는 역사와 신화에 대한 본격적인 그리기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쟁,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을 몸 풍경으로 보여주는 김재홍(11.1~24, 사비나미술관)이 있다. 세파에 지쳐 힘없이 늘어진 주름진 늙은 몸, 그리고 그 핏기 없는 몸을 파고들어 상처나 질병처럼 펼쳐진 오래된 풍경들이 그것이다. 역사와 죽음에 대한 우울한 기억을 자꾸 떠오르게 만드는 그 풍경은 사색적이면서도 공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두운 바탕에 하얀 붓 터치로 구축된 주름과 세세한 피부 질감 및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밀착시켜내는 구성력이 여전히 그만의 틀로 구사되고 있으며 핍진한 묘사력과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힘이 조금은 늘어져 보인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2. 추상
추상작업은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재미있게 본 몇몇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감각의 표층에서 이뤄지는 시각적 현상을 겨냥한 일반적인 옵아트와는 달리 탐리(3.19~4.17, 마노갤러리)의 그림은 이보다는 근본적인 심층에서 이뤄지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무형상에 형상을 부여한 것으로 흥미로웠다. 그것은 흡사 인간 내면의 영적 울림, 에너지, 소리, 파동, 리듬, 호흡, 기(氣)의 흐름과 동세(動勢)의 기록 같기도 하다. 옵아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질감을 갖는 화면은 부드럽고 잔잔하며 명상적이다. 그는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방법을 통해 밑그림과 윗그림을 상호작용시키고 그럼으로써 표층의 의식과 심층의 무의식이 하나의 결로 짜인 듯한 느낌을 준다. 동시에 그 울림, 파동은 시각적인 잔상과 여운을 동반하는 동시에 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해 공명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회화로 등장한다. 단순한 형태의 반복과 섬세한 색채의 뉘앙스로 장식된 이 추상은 한순자(8.25~9.12, 토탈미술관)의 작업에서도 검출된다. 미니멀리즘의 외양에 그것과 어긋나는 우연적, 생성적 내면을 담고 있는 가장 단순한 원의 형태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다양한 매체, 재료, 또는 형태의 차이, 그 다른 맛을 살리려는 동시에 ‘각기 다른 리듬, 호흡, 긴장 들을 한 덩어리로 통일’시키려는 이율배반적인 조형의지에서 출발하여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 도달하고 있다. 작가는 “세상 전체가 동그라미들로 보인다”고 말한다. 캔버스라는 전통 사각틀을 벗어나 원형 캔버스를 사용하고, 원형에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점차 밝고 강한 색을 쓰면서 화면을 ‘동그라미만의 얽힘, 그들만의 상호관계, 그들 안의 흐름, 그들의 감수성’으로 가득 채워놓고 있다. 또한 기하 추상의 남성적 특징이 직선적이고 단호하고 객관적이라면, 그것의 여성적 대립항은 곡선적이고 은밀하고 주관적일 텐데 한순자의 추상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탈모던적인 동시에 여성적인 추상언어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회화의 한 경향, 태도라고 할까 혹은 그림에 대한 생각의 낯섦을 잘 보여준 작가가 바로 문영민(6.21~27, 가나아트스페이스)이었다. 매우 매력적인 회화였는데 그의 그림은 감각적이며 시각적인 것이 이지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추상으로 다져진 구상, 구상으로 다져진 추상, 혹은 그 둘의 부정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생성되는 비순수 추상, 성(性), 살과 페인트, 욕망과 기계 등을 모티브로 한 그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것들에 대한 고찰이며 변주이다. 그는 특히 고장 나서 버려지고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 브레이크라는 소재를 화면 가득,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브레이크는 육체적 임포텐스 혹은 정신적인 메마름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뭉침, 얽힘, 끈적거림, 떨어짐, 거리 유지하기, 건강함, 동물성, 유쾌함, 조울증, 이에 대한 기억들, 삶과 살과 껍질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설원기(11.9~22, 이화익갤러리)의 그림 역시 우리 화단에서 보기 드문 회화를 보여준다. 깊은 서정성에 느닷없는 위트, 섬세한 감각에 충동적인 사고의 다발을 펼쳐놓거나 추상적인 그림이지만 제목과 맞물려 빚어내고 연상되는 문학성과 이야기의 전개는 그림을 보는 즐거움과 읽는 재미를 한꺼번에 전해주는 편이다. 추상적인 붓질과 그 위에 얹힌 실루엣 같은 선들은 특정한 대상의 윤곽을 연상시키다가 흐려지고 멈춘다. 그것은 사고와 감정의 유출과 흐름, 연상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바로 이런 것이 ‘회화’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시킨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극단적인 목적에 있지도 않고, 어설프고 비루한 장식성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그럴듯한 개념이나 논리의 현학적 놀이에 지치지도 않은 채 어떤 공백이나 틈 같은 곳에서 서식한다. 그 지점이 그만의 매력이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3인전 중 정수진과 박미나의 회화(6.30~7.21, 국제갤러리)가 주목되었다. 정수진의 회화는 과밀한 화면에 과중한 레이어를 자랑하는 독특한 것들이었는데 최근 들어 그것들이 점차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박미나는 색띠로 구성된 회화들을 제작했는데, 이것들을 메타 회화의 프로토 타입이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미니멀 컬러 컬렉션일 것이다. 그러니까 박미나는 시중에서 레드, 화이트, 블랙 등의 명칭이 들어간 모든 아크릴 물감을 사 모아 각 색명별로 색띠의 미니멀 회화를 완성하였는데 그 색상들의 편차가 드라마틱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울러 각 그림들은 한국에서 소통되는 가장 일반적인 가구들의 사이즈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점도 주제와 결부된다. 이 두 작가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상상력과 추상, 구상을 넘어서는 기이한 세계를 환상적으로 창출하는 회화의 흐름이 돋보인 한 해다.

이에 반해 구체적인 현실, 일상의 천착 역시 한 쌍을 이루면 번성했다. ‘김氏의 하루’라는 부제를 가진 김태헌(7.7~20, 갤러리 피쉬)의 그림은 일상을 지극히 작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지나치게 에피소드적이고 일러스트나 삽화 같은 그리기로 일상을 장식해내는 젊은 작가들이 대부분인 데 반해 그의 일상은 가장 모범적인 한 사례로 기억된다. 그림 하나하나에 문기(文氣)가 배어 있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화가의 손길이 돋보였다. 그는 자신의 일상적 삶을 그림의 원천으로 삼아 소박하고 쉽고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예리하고 감동적인 인식을 끊임없는 그리기로 분출하는 힘의 소유자다. 동일한 맥락에서 박형진(10.15~30, 노화랑)도 돋보였다. 최근 회화는 거대담론이 아닌 자신의 일상적인 삶과 주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적절하게 풀어내는 작가는 찾기 힘들다. 박형진은 그림으로 자신의 일상을 탁월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의 일상을 소곤소곤 이야기해주는 듯한 ‘삽화’ 같은 그림이고 읽기 위한 이야기 그림이자 서술적 형식이다. 그것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기보다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꿈이고 희망이며 따스한 마음이다. 그래서 잔잔한 감동을 던져준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윤정선(11.17~23, 관훈갤러리)의 그림 역시 자신의 개인적인 일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풍경과 정물은 작가 자신과 구체적인 접촉, 만남, 기억과 관련된 대상들이다. 간략한 형태와 은은한 파스텔톤의 색채구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회상하는 과거로 보는 이를 끌어들이고 있다. 시간의 흔적과 장소의 기억을 쌓아가면서 캔버스는 그에게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준 것이다. 그녀에게 화면, 캔버스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간이 되었고 기억을 재생하고 호명하는 장소가 되었다. 캔버스 안에 남겨둔 하얀색 그림틀과 영화 필름의 테두리 같은 형태가 현재를 의미한다면, 기억 속의 사물과 장소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발자취는 과거에 대한 그의 단상들인 셈이다. 아울러 물감 자국을 반복하는 작업은 그 둘을 연결하는 또 다른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작가의 회화는 사람과의 관계처럼 그가 접촉하였던 사물과 풍경들은 하나의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으로서만 존재되고, 객관적 관점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기억나는 회화작업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임자혁(7.20~8.1, 금산갤러리)은 상상이나 기억의 세포가 증식하는 것을 나뭇가지가 뻗어가는 것에 비유해 그렸다. 나뭇가지에 달린 것들은 자동차, 발가락, 신발, 행글라이더, 멧돼지 같은 짐승, 낙지, 알갱이 뭉치 등인데, 이들은 모두 작가의 ‘느낌’과 ‘기억’이라는 도구로 걷어 올린 상징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불규칙한 리듬으로 지속성을 가지고 뻗어나가고 증식한다. 작가는 가벼운 날것의 재료, 즉 실, 종이 테이프, 고무줄, 습자지 등 거의 일회용으로 쓰이는 재료들을 가지고 기억의 발산, 사라지는 시간, 순간적으로, 산발적으로 채집되는 기억을 가시화한다. 그래서 전시 공간은 바람이나 호흡처럼 유동하는 작가의 몸, 의식, 기억과 시간을 실득력 있게 화면/벽에서 만난다. 유사한 지점에서 이순주(12.1~31, 사루비아다방) 역시 특정 공간, 벽 전체를 자신의 의식과 기억으로 치장했다. 올 한 해 가장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전시로 기억되는데 작가의 이 <흠>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갈등이 뒤섞여 있다. 전시 공간 전체가 하나의 화폭이 되어 ‘캔버스에서 공간으로 이주한 낯선 회화작품’들이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 공간을 헤매고 다니면서, 찾아다니면서 탐색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대상들은 주어진 조건과 특이한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 실제와 인식의 차이, 체험과 기억의 차이, 유희와 의식의 차이, 회화와 건축의 차이, 여백과 그려진 것의 차이, 개인과 사회의 차이’ 등등이 서로 갈등을 빚고 있는데 작가는 이들의 갈등을 빌려 ‘보고-더듬고-연상’되는 회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상당부분 성공한 듯하다.

전통적인 회화체계를 관통해가면서 새로운 그림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려는 시도를 보여준 작가로는 민정기, 송필용, 정주영 등이 떠오른다. 민정기(10.2~11.14,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가 생산한 이미지들은 세계의 의미를 재생성하고 그것을 겹쳐놓고, 그가 본 세계의 시간과 공간은 작품 단위로 끊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이어져 있다. 시간성, 겹침, 영화적 연극적인 요소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회화는 의미가 두텁게 깔려 있다. 사실 회화는 육체적이다. 그림이란 세계에 관한 육체적 기록이다. 그러므로 회화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개인적이고 창조적이다. 회화는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세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탁월한 통로’이다. 민정기는 회화를 통해 회화의 가능성과 미덕을 진지하게 말해온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회화라는 매체에 관한 본격적인 탐색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의 그간의 작업들을 총괄적으로 살펴본 이번 전시는 올 한 해 중요한 전시의 앞줄에 기록될 것이다. 송필용(6.30~7.13, 학고재)은 유동적인 물의 세계, 흐름을 그렸다.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의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를 개념화하는 데 주요한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송필용의 그림은 현대판 산수기행화첩, 일종의 기유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풍경은 기이한 산수풍경이자 전통 산수화의 유채적 번안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물을 보던 시선과 사유, 물 그림을 오늘날 다시 환생시키고자 하는 동시에 전통회화와 서양화적 재료체험의 접점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지가 눈에 밟힌다. 정주영(10.27~11.16, 갤러리 피쉬)은 ‘나’를 중심으로 360도 둘러쳐진 풍경의 공감각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요소들인 대상과의 간격, 공간의 울림, 공기의 움직임, 부피 등을 몸으로 감지하며 자신의 인식의 변환에 따라 다양한 현상들을 제시하였다. 서울 주변의 산들을 그린 최근작들은 대상들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날것’ 상태의 붓질이 마냥 중첩된다. 그러니까 필의 감각적 운용(운율)이 일정한 리듬을 갖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리듬을 깸으로써, 나와 대상의 간극에서 발생되는 혼돈이 확대되는 느낌을 전해준다. 대상(산)의 외형이 아닌 ‘속’의 부분을 바짝 잡아당겨 바위, 나무 등이 얽혀 있는 세부적인 것들을 생략하고 골격의 형태와 외형상의 느낌을 혼합시켜 그려낸 것이다. 보여지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형태 이전 혹은 넘어선 그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흔적들의 생생한 감각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곽남신, 김지원, 함명수 같은 이들은 회화를 개념적으로 성찰해보는 중요한 작업들을 섬보였다. 곽남신(4.7~20, 금산갤러리/10.29~11.15, 덕원갤러리)은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그의 ‘그림자’는 형태적으로 현란한 동시대의 이미지 세계에서 회화의 추억을 소박하게 환기시킨다. 그는 그림자를 통해 이미지의 본원적 목적을 드러내 보이는데 즉, 우리가 애착하는 영상 이미지가 그림자 조작에 불과하며, 나아가 이미지 세계의 진정한 본질은 본시 허상 그림자였다는 식이다. 아울러 김지원(12.8~23, 갤러리 피쉬)이 그린 맨드라미는 색과 형태의 성실한 재현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 된다. 다시 말해 회화는 재현적 묘사와 내적 표출의 포착 사이의 섬세한 갈등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 작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는 것/그리는 것에 가려지는 것’을 동시에 껴안아왔고 때로 ‘자신이 그리는 것’과 ‘그리는 자신’을 통시적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를 보여왔다. 그러니까 맨드라미와 그것의 내적 속성과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인식을 하나의 공간에 함축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회화의 핵심일 것이다. 아울러 함명수(12.18~28, 갤러리 상)도 비슷한 맥락에 위치해 있다. 그는 “그리기가 지니는 미묘한 매력”, 그리고 그 매력을 성취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흥미를 유발하는 테마라고 말한다. 회화로부터 ‘그리기’ 이외의 모든 다른 코드들을 배제하고 있는 작가는 이 같은 자신의 방법론을 ‘투어 페인팅(tour painting)’이라고 부르며 회화를 실험하고 있다.

3. 드로잉

올 한 해 드로잉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들이 있었는데 우선 윤향란(6.9~18, 동산방)의 그림이 떠오른다. 작가는 미술의 가장 기본재료인 목탄, 파스텔, 종이 등을 사용하여 단순하고, 간결하고, 자유로운 선으로 작가의 내면 세계, 세상에 대한 반응을 탄력적이면서도 더없이 간결하고 매력적인 직선, 사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캔버스 위에 종이를 붙이고 잎을 연상시키는 식물 이미지와 불규칙한 사선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이후에 캔버스에 드로잉 된 종이에 물을 묻히고 그것을 불려서 캔버스에서 다시 뜯어낸 후 뜯어낸 종이를 원본의 이미지와 최대한 유사하게 새로운 캔버스에 다시 구성하는 작업은 완성과 해체, 필연과 우연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아주 이질적인 드로잉을 선보인 류승환(10.19~29, 가모갤러리)은 인생, 언어, 침묵, 신화, 미래세계, 환상, 역사 등의 화두를 가지고 작업한다. 그는 긴 두루마리 작업을 하기에 1년에 30m 정도 진행되며 현재까지 230m 정도 완료되었다. 전파, 인공영상, 진동, 레이저, 디지털, 시뮬레이션, 고대문화, 언어, 미생물, 상대성, 소리, 지리적 특성, 이동수단, 수학과 기하학, 조직…… 등등 이런 것들을 촘촘히 그려내는 작가의 드로잉은 문명권(서구)의 세계가 밝혀온 로고스(이성) 중심, 언어, 과학 중심의 세계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것이 마치 전부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밝혀지지 않은 더 큰 보이지도 감히 느낄 수도 없는 세계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다. 아울러 원석연(10.13~25, 아트사이드)의 회고전 역시 팔십 평생을 연필 하나로 삼라만상을 표현해내었던 작가의 집요한 그림세계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연필로 가능한 놀라운 힘과 조형성을 드러낸 몇몇 작품들은 경이롭기도 하다. 조해준의 드로잉(12.15~30, 갤러리175) 및 김을(9.3~24, 갤러리 피쉬)의 작업 역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김을의 이번 드로잉 전시는 감동 그 자체였다. 김을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그는 드로잉이 보여주는 진정한 힘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의 드로잉 중에 “나의 그림은 가치가 있을까?” “도대체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고 반문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긴 그림은 올 한 해 본 그림 중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동양화 분야에서는 매우 젊은 작가들의 선전이 돋보였다. 우선 심리적인 풍경에 해당하는 그림을 선보인 작가로는 백진숙(4.28~5.11, 대안공간 풀)이 떠오른다. 작가의 그림은 모호함의 연속을 보여주는데 어떤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그 대상의 판독이 안 된 채 계속 미끄러져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두리번거리는 식이다. 이런 명확과 불명확의 경계에서 ‘혼돈스러운 자기 정체’를 발견하고 이를 그린다. 사물의 놀라운 관찰과 자신의 존재를 그 바라보기의 거리에서 건져 올리는 상상력이 뛰어나다. 근거리에서 김정욱(6.9~23, 갤러리 피쉬)이 그린 얼굴이 존재한다. 작가는 (얼굴)대상과 (관람)주체 간의 즉자적 만남을 형성하면서 단계별로 우리에게 존재의 성찰을 제안하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녀가 그린 얼굴은 기이하고 무섭고 귀엽고 풍만하다. 화면 가득 얼굴 형상으로 채워진 익명적 얼굴들은 미세한 털과 같은 것으로 눈동자나 얼굴 전반을 가리기도 하고, 무표정하거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은폐하기도 한다. 그래서 배반, 비웃음, 이중성과도 같은 적나라한 인간 존재의 부정적인 면까지 은근히 표출하는, 일종의 숨겨진 폭로 효과를 지니는데 따라서 우리에게 존재의 이중성을 경험하게 하는 한편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얼굴을 다시 보게 한다.

일상의 풍경을 다룬 정재호(7.28~8.6, 갤러리 피쉬)는 어느 시민아파트 한곳을 집중적으로, 더구나 내부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그렸다. 작가는 철거를 앞둔 아파트의 낡은 몸체를 소요하면서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비현실적인 풍경을 그렸다. 유동적이며 영상적인 화면, 더없이 충격적인 한국의 공간/풍경을 동양화로 소화해내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인 작업이었다. 유사하게 민재영(10.25~11.3, 아트포럼 뉴게이트) 역시 자신의 일상 풍경을 그렸다. 어디론가 몰려 지나가는 군중들의 모습을 공중에서 잡은 시선으로 종이 위에 줄을 긋는 방법, 주사선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유동하는 신체의 흐름과 속도감 있는 도시 공간의 시간이 감촉되는 한편 찰나적이면서도 치명적으로 가슴과 눈에 다가와 박힌 이미지의 기억, 그 떨리는 잔상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보인다. 세계에 대한 자기 몸의 반응과 감각, 기억과 감동에 밀착된 그리기의 모색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사진이나 비디오, TV 등의 미디어들을 통해 파생되어 나오는 화학 이미지, 디지털 이미지들과 매우 유사한 시각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쉽다. 동시에 간결하고 축약적이긴 하나 일종의 내러티브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 내러티브는 시지각 특유의 유동성과 불안함에 하나의 지지대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안구의 경련 운동과 이미지의 연속성을 유지시켜주는 편이다.

영상적인 화면은 유근택(10.6~24, 사비나미술관)의 그림에서 수시로 출몰한다. “가끔 아주 평범한 대상이 엄청난 힘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에 당황해”한다(1996)는 작가의 말은 그의 회화관을 잘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세상의 풍경을 잡아낸다. 시간과 속도, 감각적인 붓질이 동원돼 화면이 입체적으로 지각되고 있는 것이다. ‘화가가 포착한 한 장면에서도 각 대상들의 고유한 속도감과 그것이 관찰자에게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속도를 종합하여 모필 터치로 달리 표현함으로써 그림이 영화 장면처럼 지각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상의 속도 차와 운동은 유근택의 회화에 ‘시각적 인지의 확장된 장’을 열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회화/동양화는 문제시된다.

반면 강경구(11.17~30, 학고재)는 현실, 일상의 천착에서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는 다소 다른 시각을 보인다. 늘상 자신의 현재 지점을 파악하려는 역사적 안목과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 구체적인 삶의 풍경을 관찰하거나 좀 더 깊은 시선으로 그(서울이란 공간, 숲) 내부를 들여다보았는데, 이번에는 문득 그의 시선과 몸이 물에 닿았다. 물과 인생, 삶을 은유적으로 연결시키고 그 물을 통해 우리네 삶을 반추하고 투영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에게 그림은 그렇게 자기 시선이 맞닿아 만난 대상을 헤아리는 지점에서 부풀어오른다. 그는 지금까지 동양화를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풍경 속에서 역사화하거나 인문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왔다. 그런 면에서 그를 인문주의적 화가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사의(寫意)가 아주 관념적이거나 거창하거나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부단히 그림을 그려내면서 인생과 역사와 미술의 문제를 여전히 물어보면서 갈 뿐이다. 그렇게 깨닫고 느끼고 만나고 생각이 깊어진 것을 그림으로 그려낼 뿐이다.

전통의 해석을 시도한 작가로는 단연 김성희(10.28~11.7, 금호미술관)가 눈에 들어온다. 동양화에서 전통과 현대 그리고 ‘나’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와 그 실천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전시였는데 그의 작업은 근대미술의 지평선상에서 전통의 계승과 혁신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작가는 전통적 사군자 중의 하나인 대나무를 소재로 해서 전통적 필력의 이해를 드러내는 한편 사의적 표현을 드러낸다. 작가가 선/대나무를 통해 정체성을 인식하는 한편 끊임없는 전통에 대한 진지한 재해석을 실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유사한 지점에서 이은숙(11.17~12.5, 갤러리 도올)은 필과 먹의 쓰임을, 대상에 대한 인문적 자세를 구현하고 있다. 장지에 먹을 앞뒤로 스미게 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진 바탕으로서의 화면은 중성적 톤이지만, 먹이 물과 아교와 섞여 용해되는 과정의 변화무쌍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자연의 속성을 작업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조형기법으로 수용한 숙련된 작가의 경험은 그와 대비되는 일필(一筆) 역시 화면 위에 과감히 얹을 수 있는 자신감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 출처 : <2005 문예연감> 미술-평면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