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과 전시기획에는 성격상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비평이나 전시기획을 직접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거나, 사물을 서로 비교하여 보다 좋은 것을 가려내는 언표(言表)와 행위 속에는 미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기준(criteria)이 전제된다. 그것을 미학에서는 미적 판단의 기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자리는 미학의 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비평과 전시기획에만 국한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비평가를 의미하는 영어의 ‘critic’과 위기를 뜻하는 ‘crisis’, 이 두 단어의 희랍어 어원은 공교롭게도 ‘krinein’이다. 이 ‘krinein’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분리하다(separate)’ 또는 ‘구분하다(discern)’가 되는데, 체로 모래를 걸러내듯이 나쁜 작품들로부터 좋은 작품을 분리해 내는 일이 바로 ‘krinein’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사장의 인부가 모래더미를 체로 쳐서 모래와 거친 자갈을 가려내듯이, 비평가와 기획자는 다같이 쓸 만한 작품에만 관심을 갖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리게 된다. 마치 공사장의 인부가 자갈을 버리듯이.
얼핏 차갑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바로 비평가와 전시기획자가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주례비평이니 정실비평이니 하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런 말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작품을 비평가가 추켜세웠을 때 나온다. 이 말 속에는 또한 누구에게나 그 나름대로의 보는 눈, 즉 미적 판단의 기준이 있다는 뜻이 함유돼 있다.
전시기획자가 전시를 기획할 때, 맨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이 비평적 시선의 개입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기획자는 실제의 작품을 보고 비평하면서 전시장에 내 걸 작품을 선별하게 된다. 이 때 주제는 그/그녀에게 있어서 칠흙처럼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위한 등대의 불빛과도 같다. 그/그녀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머리 속에서 가상의 전시장을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도상(圖上) 연습이 필요하며, 때로는 축소된 전시실에 작품의 이미지나 모형을 배열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평가와 전시기획자는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여기서 누가 형이냐 아우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전시기획을 하지 않는 비평가는 생각할 수 있으나, 비평 행위를 하지 않는 전시기획자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점이 다르다. 전시기획자는 업무상 도록이나 홍보, 혹은 보도자료에 쓸 글을 쓰면서 늘 비평적 행위를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드시 전문적인 비평적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판단하고 비평하기는 매일반이다.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보다 큰 규모의 전시일 경우, 서문격으로 쓰는 전시기획자의 글은 흔히 전문적인 비평적 글쓰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때로는 각주가 줄줄이 달린 학술 논문의 형태를 띠기도 하나, 그것이 법조문이 아닌 이상 어딘가에는 필자의 비평적 시선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비평가가 판단하고, 평가하고, 기술하는 것처럼 전시기획자도 유사한 행위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평가와 전시기획자의 비평적 행위를 어떻게 구분(discern)하고, 분리(seperate)할 수 있단 말인가?

61개국에 약 8천여 명의 회원을 지니고 있으며, 유네스코 산하의 공식 비정부기구(NGO) 가운데 하나인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Critiques dArt:영어명: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Art Critics:IAAC)는 1948년에 창설된 세계 최대의 전문 미술비평단체다. 이 협회의 정관 제2조는 회원의 자격으로 여러 조항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전시기획과 관련돼 있다. 2003년 11월 16일 마르티니끄(Fort de France, Martinique)에서 열린 제37차 총회(General Assembly)에서 채택되고 현재 개정 절차를 밟고 있는 이 조항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d) 주요 목적이 본질적으로 상업적이지 않은 뮤지엄이나 갤러리를 위한 학술적 혹은 비평적 텍스트의 생산을 포함하여, 교육적이거나 학술적 목적을 위한 전시기획이나 분석

d) Curatorial work and analysis for educational or scholarly ends, including the production of scholarly or critical texts for museums or galleries, whose principal aim is not essentially commercial


이 조항은 변모된 비술비평의 지형도를 말해준다. 오늘날처럼 전시기획이 날로 힘을 얻어가는 상황에서 미술비평만이 독야청청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특히 1990년대 초반 이후 미학, 예술학, 미술사, 전시기획, 박물관학, 문화기획 등등의 각종 미술이론 전공자들의 배출이 증가하면서 미술비평은 전시기획에 밀리는 형국이 역력해졌다. 미술이론 전공자들의 미술계 진출은 때마침 일기 시작한 국공립/사립미술관 및 갤러리의 설립 붐과 정확히 타이밍이 맞아 떨어졌다. 비록 미취업 전공자가 여전히 많다고는 해도 각종 미술관과 갤러리에는 몇몇 명문대학의 미술이론 출신 큐레이터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들이 앞으로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권력화해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이 스크럼짜기는 아주 해묵은 폐습이지만, 미술계가 존속하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작가와 큐레이터 간의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는 그것이 순기능으로 작용하면 미술계의 발전에 보탬이 되지만, 역기능으로 작용하면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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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비평은 날로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 후광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미술계 내에서 비평가의 지위는 아직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게 사실이다. 이는 비평의 권위가 약화되기는 했어도 사회가 그 기능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비평과 전시기획을 병행하고 있는 50대 초반 이상의 몇몇 비평가들은 80년대 중반 이후 전시기획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그 이전의 한국현대미술사는 집단운동의 미술사요, 작가 주도의 전시기획사였다. 몇몇 선각자적 전시기획자 겸 비평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권을 지닌 독자적인 전시기획과는 무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비평가 겸 전시기획자들이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시기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몇 년 간이다. <광주비엔날레>(1995)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1998), <미디어_시티 서울>(2000)과 같은 대형 국제전이 경쟁적으로 열리면서 국내의 기획전문가들에 대한 수요가 증대했다. 이제 비평가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재 미술현장에서 활발하게 전시기획을 하는 전시기획 전문의 큐레이터들은 이 무렵엔 학창생활의 낭만에 젖어있거나, 유학을 하거나, 아니면 직장을 잡기 위해 갤러리를 기웃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미술이론 전공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이후 전시기획자들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들은 신속하게 화랑이나 미술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보의 빠른 유포와 다양한 담론의 생산이 비평가보다는 전시기획자들로부터 비롯된다. 전시기획자는 전시장이라는 미술현장에 보다 밀착돼 있기 때문에 생산된 담론을 직접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은 편이다. 작가가 비평가보다 전시기획자와의 접촉을 더욱 선호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전시기획자가 지닌 현장성의 매력, 또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문화적 파워에 있다고 여겨진다. 비평이 서재에서 고독하게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전시기획은 보다 액티브하면서 동시에 피드백이 빨리, 그리고 훨씬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평이 전시기획에 밀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파급 효과에 있다. 비평은 효과 면에서 볼 때 마치 군불을 때듯이 은근히 드러나지만, 전시기획은 작가를 상품화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스타로 만들 수도 있다. 전시기획자가 문화권력으로서의 유혹을 받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비평은 전시기획에 비해 순발력이 떨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보조적 기능에 그치고 마는 예가 허다하다.
그러나 비평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생명력이 길다. 비평가는 특유의 직관적 촉수로 시대에 대해 말걸기를 계속한다. 그것은 고독한 행군과도 같다. 패트런이 없어도 묵묵히 가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비평가의 숙명인 것이다.

비평(criticism)은 그 어원에서 보듯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위기의 진원지는 과연 어디인가? 분리하는(krinein) 데서 온다. 이것은 명백한 역설이다. 비평과 전시기획이 분리되고 상호 소통이 없는 데서 같은 문화생산자로서의 동지 의식이 서서히 엷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시대적 상황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비평적 위기의 심연이 너무도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