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수가 보여주는 인간의 몸은 사지가 절단되고 피투성이가 되었거나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변질된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인지 죽었는지 혹은 불구인지 정상인지 쉽게 가늠이 안된다. 캄캄한 흑연을 짙게 압착시켜 그려낸 드로잉 연작에서 물감으로 형상화 시킨 페인팅, 나무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일으켜 세운 입체물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주는 것은 온통 훼손된 몸, 징그러운 신체뿐이다. 그는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 놀이를 하듯, 인형을 갖고 놀 듯 인간의 몸을 가지고 다양한 상상력과 여러 매체를 동원해 별별 상황을 죄다 연상해낸다. 항구적이고 바닥없는 주제인 인간의 몸은 그에게 서구미술의 이론이나 형식에 끌려갈 수밖에 없던 한국현대미술의 흐름에서 비로소 그를 구원해주었고 지속적으로 심화해나갈 마르지 않는 주제를 선사해주었다.
표정 없는 남자와 여자의 얼굴, 내장과 장기를 다 드러내거나 식도에서 항문까지 절개되어 드러난 몸통, 덜렁 드러난 성기, 토막난 팔과 다리,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범벅진 작품을 보노라면 마치 인체해부학시간이나 부검 현장에 온 듯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현장에 우리는 서있다. 그런데 이 같은 인간의 몸의 훼손은 실상 실시간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현장에서 토막 살인이나 범죄공간에서, 전쟁과 자폭테러사건에서 그토록 수많은 인간의 몸이 잘려지고 찢겨지며 피투성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들 삶의 공간이다. 아울러 영상매체를 통해 신체의 잔혹한 파멸은 일상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온전하고 아름답고 미끈한 육체를 창백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그에게 납득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가하면 겉으로는 ‘사지가 멀쩡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적이고 잔혹한 온갖 변태의 초상이 잠복하고 있다는 작가의 생각이 도해되어 있다. 사지는 잘려진 체 발가벗겨지고 속 내장은 다 드러나고 발기되고 드러난 성기를 지닌 체 떠돌아다니는 인간이 모습이 그런 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인간의 몸을 빌고 있다고 모두 인간이라고 해야 하는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은 인간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 혹은 인간의 몸과 짐승의 몸의 차이는 무엇인지도 무척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우리가 편의상 부르는 인간이란 명칭은 정복수가 보여주는 몸들을 포괄하는 단어로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정복수가 보내온 이 몸을 보면 그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복수의 칼끝이 얼마나 강하고 질기며 잔인한지 알 것도 같다. 그는 인간의 몸을 요모조모 분석하고 절개하고 해체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그의 작업실 공간은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가 작성되는 연구실이나 동시대 인간의 상황과 위선과 불모성에 대한 항거의 복수가 소리 없이 진행되는 곳이다. 작업실 공간에서 그는 세상 모든 것에서 수신되어 온 인간과 관련된 잔혹한 사건 소식들을 접하고 이를 작업으로 끌어내 온갖 말/복수를 감행한다. 전적으로 ‘복수는 그의 것’이다. 반면 복수가 깊다면 애정도 깊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나에게, 모든 인간에게 애증으로 점철된 존재들이다. 인간끼리 죽도록 사랑하고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고 절단하고 서로가 서로를 서서히 갉아먹어가는 존재들, 서로가 서로에게 숙주가 되어 기생하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복수의 작업은 좀 역설적인 편이다.
<정복수는 인간들을 살피면서 스스로 그 모든 복수와 애증을 작업을 통해 대체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인간의 몸은 인간의 재현이나 실존적이고 자기 연민 속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인간과는 좀 다르다. 최근 그의 작품은 아브젝트 화가 더 강렬해졌다는 생각이다. 이전에 비해 좀 더 많은, 과잉의 피가 등장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차돈의 목에서 솟구쳤던 피들이 사방에 뿌려진다. 이차돈을 희생양 삼아 불교를 포교하고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연결 짓고자 했던 신라의 왕을 위해 그의 몸은 시각적 대상으로, 제의물(희생양)로 바쳐졌던 것은 아닐까? 잘려진 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본 모든 이들은 그 폭력의 힘과 육체를 통한 공포의 극대화 속에 복종을 내재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사회에서 모든 형벌은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중동지역에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자폭테러 역시 그럴 것이고 차에 뛰어들어 자신의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자해공갈단원의 몸도, 자신의 몸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폭력이나 육체적 고통, 심리적 상처를 안기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는 이들에게 공포와 권력을 가시화하기 위해 ‘몸’은 그렇게 시각적 오브제가 되어 왔다. 인간에게 절대적인 공포,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큰 공포는 그 몸에서 비롯된다.
사실 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인간은 별 차이는 없다. 아마도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몸을 다룬 미술, 일종의 아브젝트 미술은 정복수로부터 비롯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초기작은 매우 이른, 너무 빠르면서도 놀라운 어떤 징조처럼 다가온다. 근작은 몸을 다루고 표현하는 상상력의 극대화가 고양되고 풍성해져가는 도정을 풍선처럼 부풀려 보여준다. 매체도 다양해졌고 표현기법도 화려해졌다. 인간이란 존재와 그 착잡한 몸에 대한 그만의 복수도 연륜이 꽤 깊어갔다. 그런데 복수의 분노에 비례해 잔인하면서도 화려해진 기법에서 어떤 힘겨움, 지루함도 느껴진다. 고립된 작업실에서 세상을 향해 인간의 몸을 자해하는 그의 복수는 이 세상에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