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바라보다


세상에 사로잡힌 눈들이 비로소 풀려나는 순간은 하늘을 볼 때다. 인간이 땅에만 속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꺼이 알려주는 하늘은 그러나 전적으로 눈으로만 가 닿는다. 언제나 고개를 들어 바라보아야만 하는 대상, 동경과 염원으로서의 대상이다. 그곳은 망막을 자유롭게 한다. 보아야만 하고 알아야만 하는 대상이 부재한 하늘에는 인간이 만든 사물이 지워져있다. 비어있는 것 같지만 실은 공가와 구름, 태양과 달과 별, 바람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인간이 가장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들이다. 근접을 허용하지 않기에 늘상 궁금증과 호기심, 동경을 부추켜 왔다. 여전히 신비스러운 영역이다. 해서 유난히 신화와 관련되어있고 전설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하늘, 우주다. 아마도 하늘이란 공간은 죽음이란 사건과 함께 인간을 사유케 하고 상상력을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땅과 하늘 사이에 있다. 늘 두 세계의 중간지점에서 균형을 잡는다. 이상이나 희망이 부재하면 추악해지고 현실에 대한 천착이 박약하면 공허로워진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두 발로 설수 있게 만든 건 별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옛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을 지금의 우리와는 무척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별들이 그려내는 갖가지 모습에 매혹당하고 넓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의 자취를, 그 점들을 이어가면서 어떤 형상들을 떠올렸을 것이고 거기에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이다. 별을 보고 낮에 보았던 현실게이 대상을 기옥하고 반추하면서 유사함을 느꼈던 이들, 그래서 그 별에 이름을 지어 주고 별들이 그려내는 그림을 감상했던 이들이야말로 최초의 화가들이었을 것이다. 밤하늘은 거대한 화폭이었다. 넓은 밤하늘에는 무한한 상상이 펼쳐지고, 별자리에 얽힌 사연이 있다. 고대 문명에 관한 지식을 이해하려면 천문학과 점성학, 그리고 별의 신화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옛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태도로 자연과 세계를 대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 생명과 언제든지 교감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대칭적 사유는 짐승과 별과 대화를 서로의 생명을 인정해주는 세계관에 다름 아니다.
우리 한국인에게 하늘은 특별한 대상이었다. 이른바 우리는 하늘백성이다. 선조들은 자신이 죽으면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무덤을 ‘하늘사다리’라고 불렀다. 고구려인들은 무덤 안에 우주를 그려 넣은 이들이다. 해와 달과 별자리가 가득한 천장 아래에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 영생하리라고 믿었던 이들이다. 그런가하면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고, 비와 눈이 내리는가 하면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그야말로 신비롭고 권위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그 하늘에는 인간사를 주제하는 초월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옛 선조들은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이 명령을 받아 잘 받들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변화를 관찰하여 인간. 사회. 국가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이다. 점성술은 하늘을 공경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하늘의 심오한 뜻을 읽어내려 했던 것이다. 반면 서구 근대사회의 기계적 자연관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직접적 상관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개별화되고 파편화되었으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되었다. 그러니까 근대 이후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더 이상 하늘과 우주는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술가들은 잃어버린 낭만과 동경에 대한 갈망을 그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우주와 별을 그리고 저 너머의 세계를 마냥 꿈꾸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별은 ‘고독의 안식이며, 무한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별들을 공부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성을 공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별을 그리다

하늘의 별들은 반짝이는 하나의 점이다. 나와 별 사이는 너무 멀어 내게 다가온 별은 그저 유동하는, 점멸하는 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문득 별을 그린 이들을 가만 헤아려본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저 먼 세계, 오로지 상상으로만 가능한 그 세계를 꿈꾸던 이들의 감동의 구현을 본다. 캔버스 표면이 내부로 하나하나의 점들이 적셔 들어가면서 별과 추억을 그려보였던 김환기, 아크릴 물감을 잔뜩 묻힌 붓을 일정한 거리에서 화폭을 향해 힘껏 뿌려 생긴 점들의 집적이 자연스레 별. 혜성. 은하계를 보여주는 오병욱의 그림, 수묵의 번짐과 관능적인 선들로 얽힌 우주풍경을 그린 오숙환, 그런가하면 자잘한 자개로 집적된 가상의 우주풍경을 보여주는 김유선도 떠오른다. 작가는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이 과연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가를 묻고자 그런 작업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오경환만큼 일관되게 별을 그리고 별의 아름다움, 별을 통한 사유, 평생 그 별을 쫓아다녔던 여정을 기록한 작가를 알지 못한다. 한때는 그의 별 그림이 지나치게 트랜드화되거나 마치 김창렬의 물방울처럼 소재화 되고 있는 것, 지나치게 낭만화 된 허무적 상념 등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런 인상을 가볍게 지워나가면서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여러 작업들을 산개시켜 보여주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예술에 대한 열정, 낙천적인 성격, 여행광, 그림이 안되면 매번 절망하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 대장암을 이기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바라본 세상의 개안을 즐거이 그리는 오경환이 그 간의 화력(화업 40여년)을 총괄해서 보여주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이고 만들고 그리고 제작한 자취를 뒤집어쓴 그간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일상에 굴러다니는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이미지를 찾아 자기 흔적을 얹혀놓는 이다. 예술이 생활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이 자연스레 일상이 되고 있음을 만난다. 타고난 화가의 운명과 행동반경이 고스란히 손에 잡히는 작업들은 그대로 그의 인성과 사유를 닮은 또 다른 분신이 되어 출현한다. 특정 양식이나 형식, 매체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작업의 주제 역시 옹색하거나 제한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에서 겪어내는 모든 일들을 자유롭게, 거침없이 조형화하고 그 안에서 인생의 깨달음과 삶의 유유자적을 솔직하고 소박하게 올려놓는 매력은 그만의 힘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작가상을 만나기 힘들다.

나로서는 안국동 갤러리 157에서 열렸던 작은 소품들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인문주의자로서이 화가 상 같은 것들이 뚝 뚝 묻어나는 그림들이었는데 그 안에는 세상을 견인하는 자유로움과 타고난 작가상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로서는 그의 작업세계가 몇 가지 힘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는 인상이다. 어린시절에 즐겨 보았고 충격을 받았던 우주과학만화, 4.19세대, 휴전선 최전방에서 군대용 망원경으로 적의 초소를 살피던 군복무시절의 경험, 69년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사건, 무수한 여행체험과 방랑벽, 투병체험, 불교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분리되거나 흩어지지 않고 아마 그때그때 섞이고 스며들어 전 작업에 일관되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별을 쫓는 여행

그는 잘 알려진 여행 광이다. 평생토록 지속되는 여행은 우주와 함께 그의 그림의 두 축이다. 그 여행이란 것 역시 별을 좀더 잘 보기 위해서하고 한다. 그러니까 그에게 여행은 별과 별을 쫓아 다니며 사유하는 시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다니는 것은 생각을 찾아 방랑하는 것이다. 헤매는 것이다. 이 적극적인 헤맴은 두려움을 지우고 고이거나 정체되는 것들을 흔들어댄다. 사유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여행이다. 평생을 생각을 찾아 여행하고 여행지에서의 생각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우주를 통해 새삼 땅위의 자잘한, 우글거리는 생명을 보고 다시 저 머너 우주를 본다. 그에 의하면 우주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으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그것이다. 그는 우주에서 상응과 상관, 공허를 본다. 모든 것은 서로 상관관계로 얽혀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불교의 연기(緣起)이자 공(空)이다.

“하나의 사물은 전 우주와 관계가 있습니다. 일체만물은 서로 형제이고 우리는 우주의 자식입니다. 부처님께서 살생을 금한 것도 모든 만물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와 일상의 연결고리를 그림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현대불교, 2005.11.9)
그러니까 그가 형상화 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란 지구라는 작은 별에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라는 인식이고 그것은 결국 우주적 공허이다.
동일한 음성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기엔 인간은 별의 부분이며 이 공간 속에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시간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필시 시간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니 우리의 존재란 공허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공간의 일부를 점거하다 사라지며 없어진 후 어디에든 흩어 머무르리라는 가설은 근거 있다.”

얼마 전 작가는 페루에서 별을 실컷 보고 왔다고 한다. 8개월간 있으면서 강렬한 별빛을 마음껏 쐬고 왔다는 것이다. 그곳은 이 세상에서 별을 가장 크게,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에게 하늘은 꿈이 담긴 공간이고 추억이 담긴 공간이며 별이 있는 것이다. 별은 우주의 생명체처럼 떠돌며 살다 죽기를 반복한다. 그가 40여 년간 줄곧 우주를 그려온 계기는 어릴 때 본 우주만화에서 시작된 우주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1969년 인간이 달나라에 도착하게 된 사건은 우주에 모든 것을 걸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심오하고 무게 있는 주제인 우주가 어린 시절 한편의 공상과학만화로부터 발원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사실 그는 만화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다.

우리들 모두는 어린 시절 눅눅한 만화방에서 이런 저런 만화를 독파해가면서 꿈도 키우고 무료한 일상을 견뎌내기도 하고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도 갈망해보았다. 어쩌면 만화 안에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이기고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꿈을 실현해주는 힘들이 내재해있을 것이다. 만화나 그림이나 결국 작가들에 의한 허구의 산물이며 동경과 꿈의 이미지이자 이야기고 텍스트다. 오경환은 어린이나 어른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우주공간을 보여준다. 대형 캔버스에 검고 짙푸른 우주공간과 화려한 빛을 발하는 행성들, 별과 운석을 응용한 이 작품들은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적인 그림, 리얼한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그리는 우주란 풍경 역시 만화적 상상력과 허구로 짜여진 그림이며 일종의 공상화다. 나로서는 그가 50,60년에 접했던 공상과학만화가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이 공상과학만화는 1960년대에 접어들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산호의 <라이파이>가 가장 대표적인 공상과학만화였는데 아마도 이 만화는 거의 신화적이다. 공상과학만화가 성격상 이야기이 설정이 허황하기는 하지만 이 만화는 매우 과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서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 무렵 공상과학만화는 대부분 일본 만화의 모작이나 아류들로 채워져 있었다. 반면 일본의 데즈카 오사무는 종전 후 일본만화사상 최초로 SF만화작품을 선보였던 이로서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로스트 월드>,<넥스트 월드>,<메트로 폴리스> 3부작을 그린 그는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지구를 본 적은 없었지만 이 만화가의 상상력은 현실의 우주여행 훨씬 이전부터 이를 묘사했고 다른 천체로부터의 이주를 생각해내기도 했던 사람이다. 1951년에는 그 유명한 <아톰대사>연재가 시작된다. 대부분이 공상과학만화가 그렇듯 그 내용 역시 세계가 2대 강국인 스타국과 우란 연방이 대립하고 있고 지구상에는 원폭실험이 행해지고 있으며 점차 지구 최후의 날이 도래하고 있다는 등등이다. 이는 당시 2차대전 후 시작된 미소 냉전과 핵전쟁의 불안을 크게 반영하는 한편 원폭의 피해를 입은 일본의 심정 역시 드리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데츠카는 “우주인의 시각으로 지구를 보아라” 라는 메시지를 만화를 통해 던져주었다.






우주에서 일상으로, 거시에서 미시로

가장 넓은 우주와 가장 작은 원자는 사실상 똑같은 원리와 모양이다. 그는 우주를 그리는가 하면 일상 삶에서 흔히 보는 작은 사물들도 그 옆에 함께 그려 넣었다. 이제 우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장승포 앞바다의 아름다운 항구도 그리고 소소한 사물들을 모아놓는 정물화나 농담과 유머가 섞인 낙서 같은 드로잉, 그림과 글씨가 어우러지고 장난 같은 연출로 감행된 오브제작업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이제 자기 앞에 놓인 모든 것들에서 우주를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일상의 풍경. 삶의 모습은 눈에 가까이 보이는 현상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우주의 흐름에 궤를 같이 하는 방대한 움직임인가 하면 역으로 티끌 같은 자신의 존재를 우주와 등치시키기도 한다.

그는 운명론자이다. 그는 그렇게 주어진, 만나는 모든 것들과의 인연을 중시한다. 그림도 역시 그 운에 따라, 인연에 따라 그저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