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는 사실과 환영 사이에 걸쳐있다. 산수화나 사군자를 보면 그것은 외부세계의 실제에서 형상을 따왔지만 그려진 그림은 그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닮아있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닮음과 닮지 않음 사이에서 놀이한다. 따라서 동양화를 서구미술의 재현이나 사실주의 개념을 통해 이해하기란 무척 곤혹스럽다. 동양에서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다.
이미지는 다만 이미지이기에 그것을 빌어 외부세계를 상상하고 정신적 활력을 통해 실제 자연을 연상하고 소요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매개로 기능하면 되는 것, 그림이란 일종의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라 그것들을 가볍게 밟고 나가면 된다는 얘기다. 어쩌면 그림이란 실제도 아니고 그것과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일까? 사실과 환영 사이에서 놀이하고 재현과 비재현 사이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유가의 중용적 사유와 연관 지어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분명한 대립과 구분, 차이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사물 자체가 늘 서로 다른 속성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동양적 사유의 핵심인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서구의 변증법적 논리와도 무관하다. 구상이면서 추상이고 추상이면서도 구상인 그런 경지가 동양의 회화일 것이다. 이른바 의상意象이란 개념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닐까?
이광춘은 그림을 통해 바로 그 ‘의상’을 구현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양회화의 본래적 속성과 의미를 부단히 찾아나가면서 이를 현재의 시간 축 위에 환생시키고자 한다. 동양의 회화와 서양 회화의 차이와 변별성을 찾고 그 안에서 동양회화가 지닌 매력과 서구회화의 조형적 실험 등을 융합하고 절충해내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이광춘이 그림 속에 확연히 자리한다. 그것이 작가의 그림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인 셈이다. 그는 동양화 장르가 지닌 풍부하고 융숭 깊은 전통과 서구현대미술의 참신한 조형실험과 개념적 사유를 어떻게 ‘동도서기’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자기 작업의 척추로 삼고 있다는 생각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이래 동양미술의 근대성은 바로 그런 모색과 성찰 아래 가능했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형형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광춘에게 더욱 절실한 것 같다.
중국에서 그림을 수학한 그는 유장하고 깊은 동양회화의 전통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따른 사실주의가 만나 결합된 한 형식으로 탄탄하게 무장되어 있다. 대단히 정교하고 구체적인 사실적 재현을 근간으로 한 그는 그 위에 여러 다채로운 조형실험, 그러니까 종이와 먹, 채색의 독특한 처리, 방법론을 다소 현란하게 얹혀놓고 있다. 능란하게 다룬 종이와 먹, 붓의 놀림과 사용은 잘 그림 그림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덮어 나가는가 하면 슬그머니 배면에 깔린 인물의 실루엣을 단서처럼 흘린다. 그는 너무 잘 그린 그림을 두려워하고 기교보다는 작가의 주제의식, 개념을 중시하려는 한편 동양화의 전통적 매체지만 이를 새롭게 활용하고 구사하는데 따른 표현의 확장영역을 마음껏 조율해보고자 하는 의욕의 일단을 내비친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는 중국전통화의 현대화 과정이랄까, 갈등과 모색의 경로를 그의 그림 안에 고스란히 반영하고 드러낸다. 중국의 전통화가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여러 지난한 자취들이 그의 그림세계를 규정 지웠을 것이다. 그 위에 그는 한국 현대동양화단의 상황성을 또한 겹쳐놓았다. 중국과 한국은 동일한 문제의식 속에서 서구미술을 수용하고 미술의 근대성을 체험했지만 서로 다른 측면 또한 분명히 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광춘의 그림에는 중국 전통화와 한국 전통화(동양화)가 서구미술의 수용과 영향 아래 변모되어가는, 대응하는 차원에서 행한 여러 흔적들이 겹성의 소리를 내면서 자리한다.

그는 형식과 기법에서 자유로움을 극단화하고(동시대의 다양한 형식실험과 기법 등을 적극 활용하고) 주제는 전통과 현대의 대립을 내포하거나 양자의 절충 혹은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번 근작은 크게 두 가지 소재로 나뉜다. 하나는 인체/누드를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토용, 그러니까 점토로 만든 황제의 병사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린 그림이다. 둘 다 인간의 형상에서 빌어 왔는데 하나는 현대인, 다른 하나는 고대인의 상징인 셈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문화와 전통문화의 대비와 갈등을 암시하는 한편 그것들이 해체되고 분열되어가는 과정, 혹은 봉합되어 나가는 시간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는 그가 바라보는 현대인의 초상과 내면세계, 의식구조들이 다소 신랄하게 드리워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모든 그림은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해 그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미지는 조각조각 찢겨져 있고 흔들리면서 와해되어 간다. 전통문화의 정신과 의미가 해체되는 한편 현대인/현대문화 역시 파편화되어 있다는 이런 인식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보인다. 아울러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서 동시에 그려나간 발림과 바느질 땀처럼 끊어지듯 이어지는 모필 선의 자취는 그림 전체를 아늑하고 부드럽게 감싸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상이면서 추상이자 있음과 없음 사이, 그 두 영역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그림이다. 없음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이 없음에 힘입는 구성이다.
또한 은은한 인체 실루엣, 화려한 문양과 색면 장식, 조각과 조각 사이로 빛처럼 베어 나오는 여백, 물감의 얼룩과 응고되고 번져나가는 여러 흔적들이 자아내는 다채로운 기법은 장식적이고 그만큼 시각적인 효과로 채워져 있다. 그는 표현력의 변혁은 화선지나 붓의 규격화된 수법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며 또한 그 길은 전통적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통적 수법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새로운 길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가의 상상력과 창작은 자신에게 익숙한 매개재료를 통하여 구현되기에 자신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종이와 모필, 먹이 자아내는 효과와 기법은 모든 작업이 척추로 자리한다.
동시에 그 위에 새로운 매개재료의 개발을 덧붙이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 발전함에 따라 끝없이 제기되게 마련인 필요이자 욕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광춘은 모필과 여백을 중심으로 놓고 그 위에 다양한 재료, 기법을 적극 구사한다. 단 그런 기법들은 여전히 동양화의 특성 속에서 함께 버무려지는 편이다.
전통과 미를 대변하는 토용과 누드, 현대문명과 현대인의 상황성을 암시하는 분열과 해체, 시실적인 묘사에 추상적인 효과들의 대립적 배치를 비롯해 모필과 여백을 중심으로 두드러진 여러 기법과 조형실험 등을 한데 섞어서 보여주는 근작은 결국 현재 그가 처한 고민의 도해로 다가온다. 이광춘은 동양권에서 근대 이후 처한 동양화의 여러 고민과의 진정한 대면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점, 나아가 그 고민을 솔직하게 그림의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런 고민이 의식적이거나 너무 딱딱한 개념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오히려 어느 순간 그런 고민을 망각하면서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