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자의식의 흔적들
모든 그림은 어떤 흔적들이다. 그것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비존재적이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들이다. 아니 있음에서 출발해 결국 없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흔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호이기도 하고 이미지이기도 한 것, 외부세계를 표상하면서도 자족적인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는 것, 그것이 그림은 아닐까?
어떠한 재현도 실제가 될 수 없고 어떠한 추상도 실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미술은 운명적으로 그 사이에서 유랑한다.
정윤정은 누드와 풍경 이미지를 그렸다. 작가가 그린 대상들은 모두 현실에서 취한 것들이지만 그림 속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들은 비현실적인 존재-비존재가 되어 있다. 누드이면서도 누드의 재현이나 특정인의 몸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연꽃이나 나무를 그렸지만 역시 꽃이나 나무의 구체적인 묘사에서 슬쩍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누드, 꽃, 나무를 추상적인 조형요소로 환원시킨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 몸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남긴 그림이다. 연꽃과 나무로부터 출발해 그 존재 위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고 감정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그림들은 모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몽롱하기도 하고 꿈이나 몽상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달콤하고 쓸쓸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하고 단호하다.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연원해 그것을 또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거나 탈바꿈시킨 것이다.
작가의 손끝에서 누드와 꽃, 나무들은 작가의 심성을 닮은 또 다른 분신들로 화했다. <좋은 그림은 누구도 아닌 오직 그 작가만의 톤으로 물들어있는 것이다. 그것을 개성이라고 할 수 도 있겠고 또는 독특한 조형적 특질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톤은 특이한 방법론이나 특별한 대상의 선택, 구성 등에 연유 한다기 보다는 결국 그 작가의 심성에 자리한다. 그것은 논리나 조형적인 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 ‘멘탈리티’는 작가의 총체적인 몸에서 발아한다. 그가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선의 깊이와 폭, 마음과 기억이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자존시킨다.
정윤정의 그림 역시 자신의 삶에서 마주한 대상, 생명체를 바라보고 느낀 감정과 기억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생각과 감각의 단편적인 유출과 복합적인 상념, 본능적인 기호에 조응하는 자신의 내부에 대한 응시의 기술이다.
절제된 색상,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블루와 연한 바이올렛, 노랑과 흰 색 톤이 지배적으로 물든 화면에는 두드러진 평면성과 여유로운 빈 공간의 강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의 간결한 형상, 집약된 선의 쓰임 및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이 느낌은 분명 색상에서 연유한다. 서정적이고 침묵적인 소재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도 있다. 화면 한 가운데에 홀로 자리한 정적인 누드의 포즈, 연꽃과 직립한 나무 등은 다분히 적조하다. 배경은 대부분 생략되어 몇 가지 색상으로 덮여있는데 인근 색들끼리 경계 없이 흐르듯 섞여있다. 커다란 색 면이 슬그머니 혼융된 그런 형국이다. 그러한 색상의 흐름은 다분히 유동적이고 동적인 기운을 가시화한다. 따라서 선으로 강조된 형상들은 여백 같은 배경을 바탕 삼아 다분히 정적이면서도 내면적 활력이 감지되도록 조율되어 있다. 동양화적인 느낌을 받는 이유가 그로부터 연유하는 지도 모르겠다. 유화물감이 수묵처럼 구사되거나 두터운 발림이나 물감의 물성이 강조되는 촉각적 표면보다 평면적이고 얇게 발려진 피부 역시 그렇다.
특히 작가의 그림은 파스텔 톤이라고 부르는 그런 중간 톤과 맑고 투명한 색채들이 무척 얇게 물들어있다. 특히 바탕 면을 혼합재료를 섞어 마치 프레스코 벽화를 접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치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짙게 베어 나온다.
다소 거칠지만 비교적 고운 입자를 머금은 이 캔버스 표면은 얇은 물감 층을 투명하게 반사시키며 여백효과를 효과적으로 만들어준다. 물감만으로 뒤덮인 화면과는 다른 색다른 맛을 전해준다. 그것은 점성의 유화물감의 물질성과 촉각성을 지우고 차분하고 적조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맑고 밝게 자리한다.
전체적으로 작가가 선호하는 색상들이 가득 펼쳐져있고 핵심적인 주제가 되는 형상이 화면 중앙에 자리하는 이 구성은 간결한데 그 간결성이 그림을 얼핏 개념적으로 이끈다.
작가는 아주 작게 그려진 등 돌린 누드, 하나의 연꽃과 연잎이 자리한 수면풍경, 뒷산과 이러저러한 형상들을 어둠 속에 묻어놓고 서있는 나무 한 그루만으로 이야기를 한다.
<작가는 특정 색채를 선호한다. 앞서 말했듯이 블루, 바이올렛 등이 그렇다. 그리고 흰색도 항상 개입한다. 무엇보다도 ‘프러시안블루’엔 깊은 마력이 있는 것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블루는 늘 이상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색이다. 그것은 초월적이며 몽상과 관련된다고 알려져 있다. 화면은 대부분 푸르스름하다. 연꽃과 창포를 형상화 한 그림에서 그런 색상으로 인한 분위기가 더욱 강조되어 있다.
연꽃과 창포는 흔한 꽃들의 하나지만 작가에게 그 꽃들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림의 관습적인 소재라기보다는 은유와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자리한다. 작가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특히 청색의 창포가 주는 독특한 느낌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이를 대상화했다고 한다. 식물을 대칭적 존재, 생명체로 여기거나 존재의 은유화 혹은 식물성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추출하고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험은 동양적 사유의 보편적인 양상이다. 작가는 연과 창포의 곧게 뻗은 대에서 반듯한 힘을 느끼고 청초한 기운을 접한다. 아울러 꽃은 인체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선이 있어서 그것을 그렸다고 한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식물이란 대상에 두루 있기에 이를 즐겨 그린 것이다.
작가가 그린 나무 역시 자신의 존재의 투사, 자화상에 가깝다. 아울러 그것은 현실적 삶과 인생에 대한 은유적 대상이기도 하다.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한결같이 같은 모양을 한 나무가 하나도 없이 모두 다르다. 어쩌면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작가는 나무를 그리면서 자신을 그리고 또 다른 존재를 형상화했다.
그런가하면 나무를 화면 한 쪽으로 쏠리게 배치했는데 이는 다분히 외골수적인 작가 자신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나무에는 몇 개 안되는 잎들이 부착되어있는데 그것은 다분히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그 잎들은 나무가 작가 자신에게 주는 어떤 메시지를 뜻한다.
정윤정은 이렇듯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의 자의식과 감정이 투사되는 분신으로서, 그 대체물로서 대상을 그렸다. 그림의 소재란 결국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의 감각과 기호에 호소한다. 그림은 작가의 느낌을 하나의 자취로 물들여 놓은 것이다. 그 흔적은 결정적이면서도 모호하고 구체적이면서도 더없이 애매하다. 그러나 그 자취, 흔적이 모든 이미지의 숙명이다. 이미지는 현존할 수 없다. 그것은 그 무엇인가의 흔적, 그림자에 가깝다. 분명 그림은 작가의 사유를 형상화시켜 놓은 의미의 결정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의미를 분병하게 전달하고 형상화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명쾌하게 포착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미지들은 이해의 그물에서 빠져나와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한다. 그러니까 그림이란 의미를 지향하는 기호이기도 하지만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불투명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림은 무엇보다도 관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미지로서 미적 차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윤정이 그린 연꽃과 창포, 나무 한 그루 역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감성에 호소한다. 한 작가가 소망하는 존재의 열망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 고백 같은 것들이 묻어 있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