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매혹, 두 얼굴을 지닌 숙명의 여인
-에드바르트 뭉크, [마돈나], 1895-1902년, 채색석판화.
-에드바르트 뭉크, [마돈나], 1895-1902년, 채색석판화.

19세기 말의 문화적 황혼기를 살아간 화가 뭉크는 이 작품에서 그 시대 특유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마돈나는 단순히 종교적 도상이기 이전에, 각 시대의 이상적인 여인상을 압축하는 이미지였다. 넘쳐흐르는 모성애와 아늑한 온기를 품은 전통적인 마돈나와는 달리, 뭉크의 마돈나는 나르시시즘적 자태 속에서 성과 죽음이 연결된 기괴한 형상이다. 화면의 테두리를 가로지르는 정자들은 여인의 복부로 스며들지만, 좌측 하단의 죽은 태아의 모습은 종(種)의 위협을 예시한다. 영양을 공급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대신에, 상대를 유기하거나 먹어 삼키는 환상이 무의식을 뚫고 나온다. 린다 하트에 의하면 그녀는 파멸의 길로 유혹하는 위협적인 여자,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존재인 요부(femme fatale)이다.
요부가 지닌 무서운 힘은 사랑에 응해주지는 않으면서 상대를 유혹하고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 매혹적인 인물은 주체성의 퇴행과 통제 불가능한 충동을 내포한다.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남성 또한 그것을 제압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두려운 존재이다. 이 그림에서 마돈나는 질을 관통하는 남근같은 형상을 띄며, 길게 파동치는 머리칼은 상대를 휘감아 깊은 욕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19세기 말에 여성이 섹스와 죽음의 코드가 겹쳐지는 대상으로 나타나는 점은 문화사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발흥하는 여권운동에 대한 일부남성들의 피해의식의 산물이기도 했다. 전통의 사슬을 끊고 해방된 여성들은 매혹적이지만 위협적이고 불길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남성의 욕망을 위해서 붙잡을 수 없는 것으로 생산되어야 할 여성은 죽음으로서 고착된다. 죽음과 연결 된 여성성은 이러한 죽음의 불꽃에 접근하여 스릴을 느끼고, 이에 맞서 살아 남는 남성성의 표상을 동시에 내포한다. 모든 생이 향하는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경험이 죽음의 여인을 통해 보여지는 점은 19세기 말 상징주의 문화의 특징이다. 자궁과도 같은 깊은 어둠과 침묵의 배경 막은 죽음의 공간을 드러낸다. 분업화되어 가는 근대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 가는 예술가들에게 죽음이란 친숙한 주제였다. 작가는 삶 속에서 끝없이 자신의 죽음과 만나는 존재로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성적 주체가 접근할 수 없는 불분명하고 모호한 영역에 거주하는 것이다. 블랑쇼가 지적하듯이 작가는 죽음에 가까운 극단적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 놓음으로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무의미의 실체를 활성화하는 존재이다. 이 극단의 가능성을 통해 획득된 비전은 근대가 분열시킨 인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을 출현시킨다.
뭉크 역시 죽음을 통해 선취되는 삶, 죽음의 그림자와 더불어 더욱 선명해지는 생의 모습을 포획하고자 했다. 뭉크를 포함한 세기말의 예술가들은 생산지상주의와 합리주의 사회에 대항해서 맹목적 자연에 자신을 내맡겼다. 이들은 메말라진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연의 온기 속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여성은 본능적 자연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자연에 함몰되는 것은 동시에 죽음을 암시한다. 세기말 문화는 역사와 사회, 인간을 자연의 맹목적인 힘에 휘둘리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퇴폐적인 양상을 띄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차별적인 자연 개발과 인간의 도구화가 자행되고, 노동과 생산, 형식논리, 추상적 교환이 지배하는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