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의 심연
-드 기리코, [이탈리아 광장], 1913년
-드 기리코, [이탈리아 광장], 1913년

열주들이 늘어서 있는 이탈리아의 광장, 어디서 스며든지 알 수 없는 오후의 햇빛이 광장 가운데의 조각상과 저 멀리에서 대화하는 두 인물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소실점이 어긋나는 이상한 원근법, 근경과 원경 사이의 현격한 스케일의 차이, 고풍스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난데없이 솟은 지평선 위의 건물은 이 광경을 수수께끼처럼 보이게 한다. 지평선을 향해있는 열주들의 반복은 무한을 향해 뻗어있다. 실제라기보다는 무대 세트같은 공간 속에서 대지와 건축물, 사람들과 사물사이에는 상호간의 내적인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한 낮의 텅 빈 공간은 종말론적인 파국의 이미지와 낭만적 폐허의 이미지를 교차시킨다. 맑다기 보다는 희박한 공기로 채워져 있는 그곳은 날씨조차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이다. 이 고요함 속에는 앞으로 도래할 사건이 야기 시킬 경이와 호기심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절묘한 순간에 대해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완벽하게 고요한 어떤 위대한 움직임에 의해 야기되는 엄숙하고 희귀한 감각이, 나를 공포마저 섞인 환희로 채워주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나를 둘러 싼 찬란한 아름다움 덕분으로 나 자신과 우주가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도 분도 초도 사라진 무한의 시간, 모든 시간 개념이 사라진 도취의 순간, 이 같은 예외적인 순간들이 곧 시적인 순간이다. ([파리의 우울] 중에서) 드 기리코의 그림은 이러한 ‘영원한 현재’를 포착함으로서, 인간의 숙명인 시간과 공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영원성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드 기리코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 니이체도 이러한 ‘목표 없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찬미하였다. 그 속에서 완전함을 성취하는 갑작스런 영원성, 그 신성한 순간은 일종의 미학적 현상으로서 세계가 영원한 정당화를 받는 순간이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게 보여진다. 이 때 세계는 예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영원한 현재에 진입하면서 그 자신을 망각하는 창조적 인물인 초인은 영원의 우물에 빛을 비추는 눈을 가진 자이며, 영원 회귀하는 한낮의 심연에 일순간 빛을 던진다. 니이체는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면서 ‘모든 것은 환영이며, 기하학적 광장 너머로 우리는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을 수 있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이는 냉랭한 햇빛이 드는 드 기리코의 유령 같은 도시 풍경에서 다시 나타난다.
한 낮의 강렬한 햇빛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명암을 없애고, 극히 평면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특유의 비현실감과 창백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 그림은 드 기리코의 실제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는 어느 화창한 가을날 오후에 피렌체의 한 광장에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 그는 강렬하고 뜨거운 가을 태양아래 모든 사물들을 생전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느낌을 받았고, 그 주위의 모든 세상이 소생하는 듯이 보였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기억의 사슬이 갑자기 끊어지면서 사물들 간의 의미관계가 파기되고, 모든 사물이 새롭고 불안한 외양을 띄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경험은 늦은 오후의 광선이 자신만의 낯선 삶을 사는 사물들에 스며들어 영원히 얼어붙어 있는 듯한 장면을 창조하였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은 그의 작품을 계시의 순간으로부터 비롯된 불가사의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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