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한국조각의 다양한 유형들



조각을 다른 조형예술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아마도 양감, 질감, 물성, 공간감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 조각은 조각의 이러한 본질적인 국면(장르적 특수성)에서 그 당위성을 찾은 환원주의의 역사이다. 이후 조각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회의에 부딪치게 되고, 그 본질에 반(反)하는 형식들이 조각을 재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움직이는 조각(키네틱 아트), 부드러운 조각(클래스 올덴버그에 의해 제안된), 팽창조각과 압축조각(세자르에 의해 제안된), 공기조각(풍선조각), 소리조각(사운드아트), 그림자조각, 심지어는 빛(라이트아트)과 영상 등의 온갖 무형의 소재를 대상으로 한 비물질 조각 또는 탈물질 조각으로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현대조각의 생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장소특정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흔히 화이트 큐빅으로 대변되는 미술관과 화랑이 비교적 안정된 형태의 조각(모더니즘 조각)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장소특정성 개념으로 나타난 열려진 공간은 이와는 다른 조각의 생리가 요구된다. 즉 상대적으로 불안정함에서 오는 생동감과 현장감이 강조되며, 심지어는 조형물로 나타난 결과보다는 행위와 과정이 강조되기도 한다(예컨대 퍼포먼스와 프로세스 아트와 같은). 더불어 삶의 환경에 대한 이해(예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 생태환경에 대한 이해(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일종의 도시공학 또는 사회구조학에 바탕을 둔 스트리트 퍼니처 개념에 대한 이해(환경조형물 또는 공공조형물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현대조각에서는 이처럼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의 다양한 지층들에 대한 중층적이고 다중적인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본 글에서는 주로 30.40대에 해당하는(사실상 한국현대조각의 중진들에 해당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확장된 조각의 개념과 탈조각의 경향으로 나타난 한국현대조각의 지형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이들 세대의 작품이야말로 정체되지 않은 형식실험을 견지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각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체에 대한, 인체조각에 대한 재해석

구본주(고), 김병철, 성동훈, 천성명, 이환권, 이형구, 이용덕 등은 인체 또는 인체조각에 대한 재해석의 예를 보여주는 작가들이다. 구본주는 1980년대 형상조각 이후 줄곧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샐러리 맨, 가족 등을 주제로 한, 동시대인의 삶의 이야기를 목재와 브론즈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포착한 그의 조각은 권진규, 류인 등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국 형상조각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동훈은 인체를 매개로 해서 성과 폭력 등의 개념들을 형상화하며, 인간 실존을 이슈화한다. 인간실존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와 함께 인간 내면의 억압된 욕망을 드러낸다.
일종의 구체관절인형을 소재로 한 천성명의 인체조각은 내면화의 경향성을 보여준다. 즉 그의 작업에는 마치 성장을 멈춘 듯한 어른 아이가, 어릿광대가 등장한다. 아이의 세계로부터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저당 잡힌 것들, 억압된 것들, 왜곡된 것들, 상실된 것들을 무언의 몸짓으로써 증언해주고 있다. 이런 상실감은 결핍과 결여에 바탕을 둔 존재론적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이면에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려는 자기 반성적 사유와 함께 죽음마저 껴안는 듯한 짙은 자폐의 인식이 묻어난다.
그리고 길게 늘여지거나 단축된 신체(마치 고전주의의 그림에서의 단축법을 연상시키는 듯한)를 보여주는 이환권의 조각은 각종 영상매체(거울의 또 다른 한 형태인)를 통해서 굴절되고 왜곡된 이미지에 길들여진 동시대인의 존재 인식을 반영한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는 이형구의 작업에 와서 상대적으로 더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띠게 된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비롯한 유사 실험도구를 이용하여 얼굴의 특정 부위를 왜곡시켜 보여주는 식이다. 그 이면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에 대한 반성, 그리고 마치 사이보그와도 같은 도구화된 인간, 기계화된 인간이 느껴진다.

조각의 물성과 구조에 대한 재해석

정현, 이수홍, 최태훈, 이재효, 김종구, 김주현, 유현미 등의 작업은 물성이나 양감과 같은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발전시킨 경우이다. 정현은 침목 또는 아스팔트콘크리트(일명 아스콘)를 소재로 하여, 인체와 자연이 내포한 생명의 원형적 형태를 제시한다. 물성을 강하게 환기시키면서도 그 재료의 한계를 넘어서는, 조각의 본질을 추구한다. 그리고 최태훈은 프라즈마라는 기법을 통한 자신만의 독특한 조각 언어를 개발하고 있다. 철판이나 동판을 두드리거나 열을 가해서 변형시키는 식의 비교적 전통적인 소재와 방법을 통해서 금속성의 소재를 마치 가죽이나 펠트 천과 같은 유기적인 소재로 변형시킨다.
이재효의 작업은 장작더미나 돌무더기 등 삶의 현장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미의식에 착안한 것들로서, 현저하게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환경친화적이면서도 절제된 감각을 보여준다. 근작인 불에 탄 목재의 표면에 박힌 연마된 못 작업을 보면, 정통적인 조각에 나타난 물성과 일종의 유사 연금술적인 비의를 결합시키고 있다. 이는 물질로써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몽상가의 비전에 맞닿아 있으며,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사물에게 그 본성을 되돌려주려는 의지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쇳가루를 소재로 취한 김종구의 작업은 매스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조각 개념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특히 쇳가루가 내재한 가변성이 흥미로운데, 그것이 때론 이미지로, 때론 문자 텍스트로, 때론 풍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쇳가루는 이 각각의 이미지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주기보다는 그 정체성을 회수해버린다. 따라서 이미지는 그 자체 결정적인 의미로서 존재하기보다는 비결정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로서 축조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김주현은 자신의 작업을 ‘확장형 조각’으로 정의한다. 전작에서의 ‘쌓기’와 마찬가지로 ‘확장하기’를 어떤 원칙, 규준, 방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경첩에 의해 연이어진 함석 조각의 구조가 정형화된 패턴을 만들어낼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함석판에 나타난 기울기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기 동일성의 원칙이 우연의 계기에 의해 비동일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는 조각이 하나의 개념(원칙)으로 환원되며, 조각과 탈조각의 개념이 상호 삼투되고 확장된다. 그런가하면 유현미의 작업은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견지하면서도, 이를 모더니즘(미니멀리즘)의 평면화의 경향성과 결합시켜 조각과 회화, 입체와 평면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거울과 유리, 그리고 스테인리스스틸 판으로 나타난 평면 소재를 블랭크 퍼즐로 처리하여, 파편화되고 분열된 세계(자아)를 반성케 한다. 이때 아무런 이미지도 제공되지 않은 블랭크 퍼즐 자체는 마치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의 지도를 상징한다.




확장된 조각, 설치미술

최정화, 안규철, 김승영, 임영선, 차기율, 손정은, 정진아 등은 정통조각이 공간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설치미술의 개념으로까지 확장된 현대조각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최정화의 설치미술은 사회에 만연한 가짜를 풍자하는 반사회적 비판기능으로 나타난다. 급조된 근대화와 천민자본주의, 그리고 만연한 속물근성을 논평한 것이다. 실물 크기의 교통경찰 마네킹을 설치한 <퍼니게임>에서 작가는 근대화가 간과한 억압의 가능성을 고발하는 한편, 가짜가 실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아이러닉한 현실을 풍자한다. 그리고 <썩은 미술, 썩는 미술>에서는 미술이 플라스틱 돼지머리와 조화(造花)로 치장되는가 하면, 현란한 불빛의 조명으로 겉만 번지르르한 현대미술을 고발한다. 이런 비판의 이면에는 각종 플라스틱 용기와 같은 세속적인 물건들이야말로 당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다.
김승영의 작업은 일종의 내면적인 방(무의식의 방 혹은 기억의 방과도 통하는)으로 은유 되는 공간설치를 통해서 자기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맞닿아 있다. 최근에는 환경과 함께 이질적인 문화간의 교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작업해오고 있다. 그리고 임영선의 작업은 인간의 실존과 문명비판에 맞닿아 있으며, 그의 작업에서의 조각은 이 이념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차용되고 있다. 이는 차기율의 근작에서 또 다른 형상화를 얻고 있다. 작가는 반쯤 수조에 잠겨 있는 온갖 오브제들을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지점들을 가로지르는 이 시대의 아이콘을 형상화한다. 그의 작업은 미술과 인문학이 만나는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그 자체 유사 고고학, 유사 박물학, 유사 의학, 그리고 정치 사회적 코멘트의 형태로 현상한다.
손정은과 정진아의 작업은 일종의 반어법을 통한 의미의 극대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손정은은 녹음된 맑은 물소리와 흐르지 않는 강,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정지된 시간, 그리고 온갖 플라스틱 조화와 박제된 새로 꾸며진 정원을 통해서 가짜 낙원, 키치 정원, 자연의 시뮬라크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복락원>이라고 칭한다. 또한 정진아는 합성수지로 만든 똥의 형태의 표면을 화려한 천으로, 스팽글과 같은 반짝이 무늬로, 형형색색의 타일로 치장함으로써 한낱 똥 덩어리를 우호적이고 유혹적인 오브제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는 분예기(糞藝記)라 칭한다. 이로써 똥의 예술적 가능성 혹은 미학적 의의를 묻고 있다. 그 이면에는 똥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가 놓여 있지만, 정작 이를 드러내는 방법은 진지한 태도와는 거리가 먼, 키치적이고 팝적인 가벼움의 미학에 맞닿아 있다.

확장된 조각, 대지예술

현대조각에 있어서 대지예술은 그 작가층이 국내에선 얇은 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전수천의 최근 행적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정도다(물론 이전에 이승택 같은 작가가 있었지만). 작가는 특수 제작한 흰색 천으로 둘러싼 기차를 타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환경 프로젝트를 실현해 보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을 내달리는 기차를 통해서 마치 자연에다 그린 (움직이는) 드로잉을 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 것이다.

확장된 조각, 행위예술

이불, 이윰, 김수자 등의 작업은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이 퍼포먼스와 이를 기록한 영상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된 예를 보여준다. 특히 이불에게서 작업은 페미니즘의 이념을 담아내는 형식이 되고 있다. 작가는 초기의 몬스터 이미지로부터 후기의 사이보그 이미지에 이르는 일련의 퍼포먼스와 조형작업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의 왜곡된 욕망과 편견을 직시케 하며, 근작에서는 그 지평을 오리엔탈리즘에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뚜렷한 담론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수자는 <행인>에서 형형색색의 누더기 천 조각을 이어 만든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문명사적인 이동과 영향과 교류를 암시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바늘이며, 세계는 작가가 이어 붙이는 천 조각에 해당한다. 이로써 영향사로써 교직된 일종의 관념적인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느질과 함께 펴고 싸고 풀고 묶는 보따리의 운명은 여성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사실상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사는 동시대인의 삶의 조건을 지시한다.




확장된 조각, 영상(설치)미술

정영훈, 고경호, 김영진, 오창근, 홍성철, 양만기, 정정주, 문주, 이용백, 김창겸, 한계륜 등의 작업은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이 영상설치미술로까지 확대 적용된 경우이다. 정영훈은 디지털 프로세스를 매개로 한 일련의 영상작업에서 옷과 신체와 몸짓에 투사된 성적 기호, 사회학적 기호를 드러낸다.
그런가하면 고경호와 김영진의 작업은 흔히 영상이 갖는 매체적 특수성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선입견을 비켜간다는 점에서 여타의 영상작업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들은 영상작업 고유의 하이 테크놀로지의 성과보다는, 최소한의 기계적인 조작과 오브제가 결합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과 함께 로우 테크놀로지의 흔적을 보여준다. 마치 정지화면을 연상시킬 만큼 느리게 흐르는 화면에서 영상매체가 하나의 테크놀로지이기보다는 시적인 아우라를 생산하기 위한 또 다른 매체로서 여겨질 따름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 외부와 내면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반영성에서 영상매체의 특성을 찾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영상매체(예컨대 카메라 렌즈, 슬라이드 필름, 모니터, 스크린 등의) 역시 반영성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물(수면) 또는 거울과 동격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영상매체가 자기 반성적인 매개체의 한 형태인 셈이다.
자기 반성적인 이러한 성질은 오창근과 홍성철의 영상작업에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얻게 된다. 디지털 프로세스를 매개로 한 영상작업을 마치 거울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모니터를 일종의 디지털 거울처럼 사용하여 관객을 자연스레 자기 반성적인 계기로 유도한다.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관객들에게 결코 자신의 완전한 모습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은 그 디지털 거울(모니터)로부터 마치 모자이크 퍼즐처럼 해체되고 재조립된, 분절되고 파편화된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경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혹은 과거 속으로 편입된 자기를 찰나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로써 작가는 완전한 총체로서의 자기, 현존하는 실체로서의 자기는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그 이면에는 근대인의 자의식을 견인해온 주체, 자기, 자아, 에고에 대한 회의가 놓여 있다.

확장된 조각, 사진

홍성도, 김준, 권오상, 고명근, 금중기 등의 작업은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이 사진으로까지 확장된 예에 해당한다. 김준은 온몸에 가득 새겨진 문신을 통해서 일종의 사회화된 문신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신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현대인의 고정되고 결정된 의식, 다시 말해 삶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은 의식을 상징한다. 그 의식은 아디다스, 스타벅스, 구찌, 삼성과 같은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기호로서, 붉은 악마와 같은 사회적 기호로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이념과 신념으로서,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팬 동우회에 반영된 취향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신념, 어떤 기호, 어떤 취향에 길들여진 저마다의 의식화된 문신을 몸에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작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이 그대로 이미 하나의 문신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몸 자체, 의식 자체가 그대로 사회적 문신인 것이다.
그리고 권오상은 재현과 관련된 전통적인 문제의식에 대해 독특한 방법으로 반응한다. 잘게 나눠진 사진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등신대 크기의 인체나 실물 크기의 사물을 재현한다. 그 사진 한 장 한 장의 리얼리티가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종의 데오도란트 타입의 사진을 실현한 것이다. 이는 마치 환조처럼 3차원적인 입체감과 질량을 갖고 일정한 공간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사진의 표면적인 세부(피부)마저 간직하고 있다. 이런 프로세스 상의 특질로 인해 그의 작업은 흔히 조각적 사진 또는 사진적 조각이란 말로서 형용되며, 이는 곧 조각과 사진의 범주와 방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그 경계를 허물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를 흉내 내는 유사 실제를 불러들이면서도 그 조작적인 프로세스를 공공연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오히려 특유의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이는 고명근의 작업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게 된다. 투명한 필름에 인화된 사진 조각들을 조합하여 가상의 건축물이나 구조물을 구축한 일종의 미니어처로서, 이것이 일견 실재를 재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작가의 공상 속에서 재편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와 가상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그 자체 엄연한 현실처럼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중기는 사물들을 병치시킨다. 그 사물들은 서로 무관하거나 이질적인 것처럼도 보이고, 우연하게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이 우연하게 의미를 생성하는 원리 또는 현상을 작가는 ‘느슨한 충돌’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느슨한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작가의 사유는 말하자면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들이 놓여진 방식 즉 맥락화의 방식과, 차이와 틈의 인식에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조각

함연주, 김세일, 박성태, 박소영, 박원주 등의 작업은 부드러운 조각으로 범주화할만한 경향성을 보인다. 함연주는 머리카락을 거미줄처럼 짜낸 가녀린 구조물로써 공간을 구획한다. 머리카락으로 공간을 구성한 공간설치작업으로서, 공간 속에 완결된 작품이 담겨지는 형식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제시되는 점이 특징이다. 우연성의 계기를 공간 속에 개입시켜 공간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드러내는 그 구조물은 마치 덧없는 이미지를 증명해 보이는 시간의 그물, 미망의 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김세일은 가녀린 철사를 소재로 하여 뜨개질을 하듯 엮어나가는 방법으로써 마치 비정형의 고치와도 같은, 안과 밖의 경계조차 없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놋쇠 숟가락이나 부처 소상 등의 사물의 한 표면을 기점으로 철사를 꼬아나가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그렇게 형성되고 부풀려진 망이 외부로부터 사물을 감싸 안는 식의 역설적인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듯 부처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그대로 절이 되고, 물고기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바다가 되고, 짐승을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숲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임의적일 뿐, 실상 망 구조 자체는 무한정 부풀려질 수 있다(결정되지 않은 것). 이는 그 자체 의미화의 산물인 모든 결정적인 형상, 결정적인 읽기를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열려진 체계에 맞닿아 있다.
박성태는 그 결이 미세한 알루미늄 망사를 소재로 하여 여러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형상을 떠낸다. 그 속이 비어있는 껍질로 화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를 통해서 진정한 존재와 그 실체를 묻고 있으며, 생성과 소멸, 실상(실제)과 허상(허구)과의 미묘한 경계를 다루고 있다. 그 이면에는 ‘있음’과 ‘없음’이 결국 마음의 현상(상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에서의 공(空) 개념에 대한 공감이 놓여 있다. 이런 공 개념에 대한 공감을 매개로 하여 박성태의 작업은 김세일의 작업과도 통한다.
그런가하면 투명 필름이나 천의 표면에 프린트된 나뭇잎 조각을 중첩시킨 박소영의 형상들은 껍질과 허물 그리고 생물학적 변태를 상기시킨다.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중첩되고 전개되는 비정형의 형상들이 어떤 이미지로서 고정되기를 거부한 채 애매한 경계를 드러낸다. 자신에게 투영된 빛을 걸러내며 자신의 투명한 신체를 드러내는 오브제들이 정적이고 관조적이고 시적인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박원주는 종이를 오리고, 접고, 붙이는 방법으로써 벤치나 나무의자, 그리고 창문틀 등의 사물을 재현한다. 한낱 종이로 화한 이 오브제들에서는 사물 본래의 질량도 무게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하얗게 표백된 오브제들에서는 일종의 사물의 재(탈)맥락화가 느껴진다.

미니어처 조각

함진, 이동욱, 최수앙, 권재홍 등은 일종의 미니어처 조각을 보여준다. 이 범주는 현대조각에 나타난 다른 경향들에 비해 그 세대가 좀 낮은 편이다. 작품들을 대략적으로 보면, 작지만 지극히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재현된 미니어처 인간 형상들로서 마치 우리 안에 갇힌 애완동물처럼 변해버린 왜소하고 고립된 현대인의 초상을 드러내 보여준다. 극사실에 가까운 리얼리티는 모호하고 부조리한 내러티브와 뒤섞여 마치 판타지 영화장면에서처럼 기이하지만 아름다운 불협화음을 연출한다. 때로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에 접맥된 마치 악몽과도 같은 기묘한 비현실적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조각 이후, 조각을 넘어서

현대조각은 조각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각에 의한 장르적 범주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 특정성이 약화되고 있다. 그래서 조각에만 해당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추출해내기가 그만큼 어렵다. 비록 비물질조각이라든가 탈조각 등의 말들이 있지만, 실상 이는 임의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조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의 이념이 회의에 부쳐진 이후, 모든 장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탈장르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예술, 대지예술, 설치미술, 영상(설치)미술, (조각적)사진 등의 현대미술을 관통하는 여러 형식적인 지층들의 이면에는 조각이 놓여 있고, 또한 조각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조각의 경계를 넘어 삶의 현장성 속으로 침투되고 확장된다. 그 예로서 로봇아트, 놀이터 프로젝트, 스트리트 퍼니처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먼저, 로봇아트에 대해서는 테크놀로지 아트와 공학간의 학제간 연구방식을 지향해온 그룹 ‘ASTA( ’인공감성‘과 ’감촉되는 소리‘ 즉 탠저블 사운드를 주제로 전시했던 그룹 )에서 그 예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들의 휴머노이드 로봇에 대한 연구와 전시에서는 자기동력과 상호작용성과 같은 각종 매체실험 등이 느껴지며, 인접분야에 대한, 나아가 상호간 이질적인 분야에 대한 매핑이야말로 현대미술의 또 다른 돌파구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이와 관련해서 노진아의 작업 역시 일정한 성과를 얻고 있다).
그리고 놀이터 프로젝트는 놀이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즉 조각작품이면서 동시에 놀이기구이기도 한 놀이터는 가능할까 라는 고민이 담겨 있다. 그 결과, 일방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수용하는 대신에 여러 가변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창의력과 참여의 계기를 끌어내는 놀이터, 세상과의 관계를 학습할 수 있는 장으로서 기능하는 놀이터를 제안한다. 이 개념은 기존의 공공조형물과 조각공원이 확대 적용된 것으로서, 예술과 삶과의 진정한 통합을 실현한 경우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스트리트 퍼니처는 일상을 그 자체 잠재적인 예술의 한 계기이자 장으로서 보는 개념이다. 작게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설치된 여러 환경 조형물을, 그리고 크게는 도시 계획까지를 아우른다. 형형색색의 간판들, 육교와 다리와 고가도로, 지하철 출입구 지붕 장식(차양)과 환기구,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환풍기와 노랗고 파란 물탱크들, 그리고 나아가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 등 도시의 인공적인 풍경이나 도시의 인위적인 스카이라인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이 가운데 특히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는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제 3의 사회와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 개념에 그 맥이 닿아 있으며, 그 자체 장소 특정성 개념과 함께 소위 도시 사회학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스트리트 퍼니처는 그 자체 결정적이고 독립적인 장르이기보다는, 기왕의 장르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적 개념이고 학제간(學制間) 개념이다. 여기에는 도시계획과 사회공학 그리고 디자인이 하나의 축을 경계삼아 서로 맞닿아 있다. 이는 미술과 삶과의 경계를 허물어 진정한 생활미술을, 삶의 미술을 실현한다는 강력한 실천논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상으로 현대조각에 나타난 다양한 양상들에 대해서 일종의 유형학을 시도해보았다. 한편, 이런 유형들로써 범주화할 수 없는 작가들 또한 많다. 이를테면 정통적인 캐스팅 기법에 착안하여 이를 자기화한 김상균과 채우승,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써 디지털 이미지를 실현하여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치현, 수상(水上)조각의 박용국, 그림자 조각의 차상엽 등의. 차후 한국의 현대조각은 이들 작가들에 의해 조각의 개념이 심화되고 그 지층이 더 두터워져서 조각의 유형학을 넘어 그 지평이 확장되리라 본다.

- 계간조각 2006년 봄호